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신 17:19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15
말씀을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살면 주의 뜻을 따르려 자신의 판단을 함부로 주장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자기주장이 난무한 세상이다.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드는 말들 속에서 본질은 없고 각자의 감정과 생각만 떠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청지기 같은 삶을 사는 데 주력한다. 내게 맡기신 삶이다. 건강과 시간과 모든 물질에 있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을 걸으려 허튼 길로 쓸리지 않는다.
마치 책을 읽으려면 혼자 있는 시간과 입을 다물고 눈으로 보며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 같이, 어울리고 떠들어 지껄여대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조용히 주 앞에 있어 맡겨진 생의 걸음을 다할 때, 하나님의 통치는 선명하여진다. 이에 “읽어서, 배우며, 행할것이라.” 하시는 오늘 말씀이 확실하다. 즉 우리의 청지기적인 삶은 소극적인 데서 적극적인 행함으로 나아간다. 이때 삼가는 것은 ‘남들처럼’ 행하지 않는다.
이에 주께 드리는 것으로 흠이 없는 삶이 드려진다. 바울은 이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곧 오늘 지금 이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가 되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하신 말씀과 같이 나의 감사가 제사가 되어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를. 비록 연약하여 여러모로 보잘것없다 해도 정성을 다해 주를 바람으로 드려질 때, 행여 세상을 따라 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말 1:7).” 곧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할 때 감사도 찬송도 거짓이 된다.
그러므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날마다 주 앞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이 ‘묵상의 시간’이다. 말씀을 앞에 두고 가만히 주를 생각하고 바랄 때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오늘 우리 사회가 너무 어지럽고 각자의 생각과 주장대로 판단하고 쓸려다닌다 해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말씀을 가까이 하여 묵상하는 시간은 필히 가져야 한다.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 같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 1:13-14).”
속상한 것은 길거리의 구호들 사이에서 찬송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있어 할렐루야, 아멘, 하는 외침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개인적인 신념으로야 뭐라 한들 뭐라 하겠나만 왜들 말씀을 전하면서 또는 개인적으로 단상에 올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외치는 것인지….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속된 말로 저게 다 돈 때문이다. 각자 유튜브를 하며 이번 사태로 벌어들이고 있는 금액이 어디는 1억 4천, 어디는 한 번 선동으로 몇 천의 돈이 입금되고 있다고 한다. 아, 결국은 그 속내가 빤한데도 저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우선은 자기주장에 함몰되었고 결국은 군중심리와 사람들의 환호가 저들을 눈멀고 귀멀게 하는 것 같다. 정치인들이 그러는 것이야 그렇다 하나 왜들 목사가 또는 어느 신학교 교수들이 나서서 대중을 선동하는 일에 앞장 서는 것일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4).
각자 자신의 신념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경홀히 여기는 것일 텐데, 그 속을 주는 다 아신다. 자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도 하나님은 이를 살피시고 계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의식하고 자중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현실이 마치 오늘에 있어 일어나는 일 같으나, 몇 년 전 그때에도 저들은 그러했다.
앞서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결국은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것도 이내 외세의 침탈보다 자중지란에 의한 내전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한데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한다면 이처럼 함부로 누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나서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에 거침이 없겠나?
자주 언급하지만 말씀은 선동이 아니라 선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바탕으로 말씀을 설득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의 이 모든 상황은 주신 바, 동시대를 사는 동안 우리의 산 교육이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있어, 오늘 시인의 깨달음 같이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144:3-4).
이와 같은 것을 두고, 칼을 뽑아 두기고의 귀를 쳤을 때 주님은 그리하지 말라 하신 것과 같다. 사람들이 왕으로 옹립하려다 십자가에 달라고 외칠 때에도 주님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함을 두고 용서를 구하셨다. 우리는 세상을 따라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안개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아이 일로 누구와 일찍 통화를 하는 동안 갑자기 찾아온 시련으로 아이의 강박적 난독을 두고 염려하지 말자, 주께 맡김으로 주가 사용하실 주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붙들자… 하는 여러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속상하고 답답하여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지만 그러해서 주를 바람일 텐데. 일련의 사태 뒤에는 각 형제들의 가정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가시처럼 박혀 있어 고통을 호소하는 가운데… 누구는 그래서 외국으로 이민을 결심하고, 누구는 서로 의절하고 원수보다 못한 사이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연 없는 생이 어디 있겠나만 그래서? 과연 그래서 우리는 주를 더욱 의지하며 가만히 말씀 앞에 자신을 앉히는지, 어떻게든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열심을 다해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살고 있는지. 그런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이를 인정하지 못함으로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27).”
보면 참 온갖 신을 다들 섬기면서 산다. 누구는 그렇게 해서 명리학을 공부하고 나아가 역술가가 되었다. 누구는 교회를 등지고 자신의 능력과 학문을 발판으로 이민을 갔다. 몇 해가 지나 그들의 사는 게 나아진 바 없고 오히려 더 궁색하여서 이제는 도로 주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저 다들 사느라,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사는 게 지옥이라! 이어지는 말과 말 사이에서 나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모범답안을 만지작거리며 저에게는 하나마나 한 소리 같아서 저의 말만 듣다 그만두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오늘을 사는 동안 저마다의 주장과 생각과 그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각자 그 우상의 형태가 참으로 다양하고 기이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돈돈거리는 누구나, 건강염려증에 사로잡혀 하루라도 더 건강하게 잘 사는 게 복인 줄 아는 누구나, 성경을 토론으로나 가져와 논쟁하기를 바라는 지적허영의 누구나… 저들 모두 믿는 자로 살면서 누구는 적당하여 그러하고 누구는 절실하여 그러하다. 어찌됐든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왕하 17:16).” 그러고 있는 자신을 부정하면서 그리 좇아가고 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골 2:18).” 그러는 자들과의 논쟁은 소모적이다. 뭐라 한들 들을 리 없다. 대화와 타협을 운운하지만 이 시대의 진영논리나 정치와 같이 불가능하다. 어느 한쪽이 쓰러지기까지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일고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시며,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하여 나는 피하거나 나의 말을 멈춘다. 결국은 자기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1).” 그런 상대를 만나면 피하는 게 낫다. 듣고자 한다며 와서 자기 말만 하는 자와는 성경공부가 어렵다. 상담한다며 대화를 시작하다 자기 말에 확신을 두어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자에 대하여는 뭐라 이르고 권하는 게 저에게는 총구 같을 뿐이다. 하면,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일련의 사회적 현상이나 내 곁의 어떤 어려운 일을 듣고, 보면서 나는 이와 같이 말씀 앞에 나를 자꾸 꿇린다. 저들이 나로 근신하고 또 주의하게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었다. 오늘 말씀은 이에 말씀을 가까이 하여 ‘읽고, 행하라’ 명령하신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
이에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144:2).
하여 나를 주께로 숨겨 주 앞에 조용히 거하게 하심인데,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3).
나의 나 된 것을 앎으로,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9).
나의 할 일은 단 하나, 어떠하든지 주를 찬송하는 일에서 오늘을 사는 동안에,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1).
주께 아뢰며 기도할 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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