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전봉석 2025. 1. 9. 05: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신 19: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우리의 악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를 아신다. 우리의 서러움이 원한이 되고 원한이 복수가 되어 이것이 순환할 것을 알고 하나님은 미연에 도피성을 준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보복의 한계를 정하셨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 19:21).” 이를 보복의 승인으로 알고 그대로 갚아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들어가’ 사는 땅의 전체를 삼구로 나누셨다.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전체를 거의 평균하여 세 구획으로 나눈 후 각 구획의 중심부에 도피성을 설치하도록 하셨다. 이리로 도피하는 자에 대하여 피의 복수로 따라 잡거나 잡히지 아니하도록 가까운 데 두셨다.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6절).”

 

곧 이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예수께로 도망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으신 것과 같다. 그리로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의 진리’를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피의 보수자의 칼이 죽이려고 쫓아올 때, 죄인은 세상 어느 곳에 숨더라도 결국은 서로가 냉혹한 보복의 원리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복수에 복수를 부르는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고 죄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 도피성으로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의 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오늘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대상에 대한 마음이 극에 달하였다. 공권력과 공권력이 충돌하기 직전이고 무리 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를 부추겨 자신의 죄를 덮거나 이득을 보려는 세력이 있어 저들의 저주와 탄식과 경멸이 제2의 남북전쟁이라도 불사할 지경이다. 이를 방조하고 오히려 그 뒤에 숨어 자신의 안위를 위하려는 권력자들의 비겁함에 치가 떨린다. 그만큼 우리 사람은 악하고, 악을 복수가 되풀이 될 것을 도피성으로 막으시려는 오늘 말씀이 새롭다. 법도 원칙도 없이 자신의 주장을 무기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는 두려울 뿐이다.

 

이에 하나님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시며 그 한계를 정하신 것이다. 이를 동해보복법이라 하는데 로마 성문법인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에 있는 한 조항에서 붙여진 말이다. 즉 피의 보복법은 살인에 대한 처벌법이고, 동해보복법은 신체에 상해를 입혔을 경우 같은 범주에서 다루게 하는 처벌법이다. 남에게 치유될 수 없는 영구한 상해를 입힌 자는 그 대가를 그대로 되돌려 받음으로 단순한 보복논리로 고대 국가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으로 집행되었다고 한다.

 

이는 필요악(必要惡)으로 요구되었으나 예수님은 이를 금하셨고, 심지어는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 6:29).” 하심으로 그 이상의 사랑을 요구하셨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0-31).” 뿐만 아니라 우리로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8).”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보복 심리는 되풀이 되어 악이 악을 확장함으로 서로에게는 미움과 증오만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보복법은 그 근본 원리가 감정에 치우쳐 죄 값 이상의 앙갚음으로 파생될 더 큰 보복의 악순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초로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서로의 질서와 보호 정신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에 의해 율법의 완성이 되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용서하신 그 사랑으로 말이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누가 먼저 멈추지 않으면 그야말로 사회는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서로의 증오는 내전으로까지 확대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를 두고 말씀하시길,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곧 자신을 돌아보아 바로 알기를,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자기 사랑이 궁극적으로 남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의 근본이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가 이를 안다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리하여 서로 용서하고 각자가 자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 우리의 구원의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 오늘 도피성을 사방 14Km 가량 일정하게 두려하신 것도 같은 의미이다. 곧 우리 영혼의 도피성의 거리가 그만큼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하여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이는 예수께서 그 문을 여셨고,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가리고 있던 휘장을 찢으셨다. 이에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오늘도 보면 이를 선동하고 부추겨서 자신들의 이익을 꾀하려는 자들이 도처에 있다. 저들은 저마다 정의를 외치고 사회 악을 부르짖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하나님은 우리를 귀히 여기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신 19:10).” 하심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아시는 주님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6-7).”

 

하물며 일련의 사태에서 옳고 그름을 다 아심으로,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오늘 사태가 진정되려면 서로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들이 사회 지도층으로서 한 걸음씩 양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 총구를 겨누듯이 서로를 탓하면 이로써는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고 교회가 범법자의 은신처가 될 수는 없다. 고의로 살인을 한 자에게는 도피성이 의미가 없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분명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 하고, 그에 따른 죄를 물어야 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즉 ‘도피성’을 악용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임의대로 해석하여 함부로 속단하는 것을 금하신다. 그런 점에서도 갚을 것은 갚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한데 그 하나님은 두려워할 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로가 경계하고 위축되어 우상으로 숭배하는 일에 대하여는 반드시 ‘죽이라’ 하심으로 공의를 실천하신다. 이는,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50:10-11, 89:11).

 

이를 바로 알 때에 우리는 서로의 잘못과 실수에 대하여는 용서하되 고의적으로 악을 도모하거나 악을 조장하여 선동하고 서로 무리지어 악에 악을 더하는 것에 대하여는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이에 따른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삶 가운데서 바로 알 때, 이를 실천함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즉 자기 분수를 알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 교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를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신 19:14).” 서로 존중하고 받아들임으로 그 모든 경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서로의 판단과 기준이 다를 수 있고, 그 생각과 가치 또한 다를 수 있으나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삼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된다. 가령 비행기 참사로 희생한 유가족들을 두고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분명 하나님의 진노가 따를 것이다. 남의 아픔이나 고통을 두고 비웃거나 멋대로 평가하는 자에 대하여는 그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은 돈이다. 악착같이 기를 쓰고 거리로 나와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조롱하거나 악의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자들을 보면 그 뒤에 다 돈이 따른다. 이에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결국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그와 같은 악함으로 구제불능인지를 아시는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도피성을 두시고, 이에 주께서 친히 우리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심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하여,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146:2-4).

 

이를 바로 알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7).

 

우리 주 앞에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