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전봉석 2025. 1. 8. 05:55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신 18:13-14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8

 

 

나이가 든다는 일, 나의 부모가 겪었을 육신의 질병이 하나둘 찾아와 내 몸에 자리를 틀 때 비로소 생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세상에서 기업을 받지 못하는 레위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신 18:2).” 하나님이 곧 나의 기업이 되신다는 일,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나이가 들면서 나의 생을 돌아보게 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우리에게 주신 것을 깨닫는 것으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곧 나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바람인데,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7-28).”

 

곧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지 않은 길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하실 때, 나의 것이라 여기던 나의 몸이 더는 나의 의지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주가 내게 나로 대신하여 지불하시는 비용과 같아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생을 사는 동안 그 여정이 각각 시간의 순서대로 다다르는 것은 아니어서 언제쯤 나의 아버지가 겪고 살았을 시간에 이르러서야 돌아보게 된다. 아버지는 소변을 볼 때 한참씩 시간을 지체하고도 난감해하였다. 그 일이 무슨 연고인지 알지 못할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였는데, 전립선 약을 먹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의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일이 복이었구나…. 다들 그러려니 하고 지내던 무심함이 흔들리면서 알게 된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대하 15:7).”

 

나이 들면서 다들 그러고 산다고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약을 처방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주신 바 몸을 돌보는 일이 사역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한 생이 가고 다른 생이 오기까지 30년 남짓 우리는 어쩌면 이를 망각하고 사는 것 같다. 그저 자신만을 위하다 부모가 늙고 자식이 장성하면서 내 몸의 신호는 비로소 생을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몸이 곧 주의 사명이었음을 알게 한다.

 

누가 요즘 시부모의 병치레와 곧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을 전하면서 자신도 나이 들어 하려니까 힘에 부친다며 병간호하는 일이 힘에 부치다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 몸이란 참으로 정확하여서 가장 원론적으로 창조주를 알게 하는 것 같다. 한때는 이를 알지 못하고 뭐든 내 마음껏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늙으신 부모를 돌보는 일이나 자신을 돌보는 일에서 우리는 창조주의 시간을 짐작하게 된다. 주가 맡기신 모든 것에는 유효시간이 있었다. 돌아보면 후회뿐일 것을 그땐 그게 왜 그렇게 와 닿지가 않았던 것인지…. 노인은 그저 무심한 시선 너머의 관조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생들 마감하는 줄 알았다. 누구의 일이나 나의 여러 몸의 증상들로도 알게 되는 것이 흔히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산다던 말이 참으로 심오한 세계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길을 걷다 어느 양지바른 곳에 노인이 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무심히 놓고 있는 시선에서도 온 힘을 다하는 수고가 있었다.

 

이때에 나는 오늘 말씀이 강하게 울리며 다가온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 18:13-14).”

 

우리로 완전하라, 하시는 데 있어 “여호와 앞에서”이다.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앞에’에 해당하는 표현은 ‘~와 함께’에 속한다. 하나님과 함께, 또는 ‘~에 의해서’라는 뜻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로는 완전하라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해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도와주실 때에만 가능함을 내포한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 20:8).” 하시는 구약의 말씀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시는 신약의 말씀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서 나는 완전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는,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14).”

 

곧 우리의 “완전하라” 하시는 명령은 도덕적으로 최대한 노력하라는 의미보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더욱 바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집중하게 한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죄에서 태어나고 그 결과로는 몸의 질병을 서로가 서로에게 유전적으로 전가하며 사는 일이 그 중 하나이다. 또한 우리는 날 때부터 죄책을 걸머지게 산다. 어린아이가 무슨 일을 두고 자기 때문이라며 부모의 이혼도 또는 그 학대에까지도 자기 탓을 하는 것을 보면 극단적으로 확연해진다.

 

아이가 강박적 난독을 겪으면서 답답해서 울다 엄마, 미안해! 하는 말에 가슴이 미어지겠다는 소리를 누가 했다. 아이는 자신의 증세로 엄마에게 미안함을 호소하고, ‘자기 때문에’ 엄마의 소원과 기쁨이 무너졌다는 자책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다. 그 말을 전하다 눈물을 흘리는 ‘엄마’에게 나는 우리가 가지고 사는 본질적인 죄책의 결과에 대해 말해주려다 그만두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할 때에 우리 기도의 귀결은,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6).

 

결국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에 의하여 완전하게 해결될 수 있다. 여전히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한다 해도 우리가 주 앞에 거할 때 나타나는 분명한 사실은 죄책을 면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의 죄책, 현재나 미래로부터의 죄책,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한 모든 죄책으로부터….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우리의 그러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서,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하여,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 결국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완전하다.

 

이에 우리가 근신하고 작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신성을 만물 가운데 나타내셨으나 이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도리어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하신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 1:20-22).”

 

결국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들을 곁에 두고 우리는 산다. 일련의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도 바로 이와 같은 무속과 운세를 중시여기는 문화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오늘 말씀은 단호하게 전하신다. “네게는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세상이 아무리 어떻고, 다들 다수롭지 않게 그러고 산다 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함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는 조건이 아니라 필수적인 관계의 근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위한 자신의 구속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우리가 거룩하고 완전하길 원하신다. 우리의 거룩과 완전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는 사악한 풍속을 좇지 말아야 한다. 이를 하나님을 우리에게 강권적으로 막으신다. 모든 형태의 복술(卜術)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한다.

 

이를 정리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곧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은 이 땅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사는 삶이다. 아이가 질문하여 보내온 성경구절은,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3-15).”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날’이 온다. 그날은 재난의 날이고 환난의 날이나 주의 날이고 재림의 심판의 날이다. 이때에 “각각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하시는 부분에서 재난이나 환난의 시련은 필연적이겠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바, 이는 곧 주의 날이기도 하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곧 지금과 같이 세상이 어둡고 혼탁하다. 우리는 무장해야 한다. 안이하게 굴다 저들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이때에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곧 안이하게 대처하지 말라는 것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4-6).”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6-9).” 사느라 사는 일에서는 그리도 죽기 살기로 젖 먹던 힘까지 다 해가며 산다고 살면서, 우리의 영원한 영생의 일에 대하여는 어쩌면 이처럼 안이하게나 해이한 것인지? 고작 2, 30년 여년의 노후생활을 위해서도 죽기 살기로 퇴직을 미루며 당장의 살날을 대비하면서, 우린 얼마나 영원한 삶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는지?

 

반드시 ‘그날’에는 각 사람의 공적에 따른 결과와 성적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신앙이었고 믿음의 정도였다. 이는 구원의 문제와 상관없이 당면한 현실, 고된 시련의 환난 가운데서 얼마나 주를 바라고 의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영적 실력을 가늠한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하는 사도요한의 새로운 진술로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에서의 불은 소멸시키는 것이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는다. 달란트 비유의 말씀에서 서로 다른 칭찬과 상급이 주어진 것 같이, 바울은 마지막 심판 때에 ‘보상과 형벌’이 있음을 밝혔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때 주어질 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쁨, 그 이상의 기쁨과 실질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개인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과는 상관없다. 그러니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태어난 것으로 기뻐하는 아이 같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으로도 영광이라 여겨 안이한 선수와 같다. 이후에 누릴 기쁨은 반드시 서로의 공적이 다르다. 곧 이 상급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하시는 은혜이다. 이는 개별적이고 차등적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하심으로, 단지 구원만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영혼은 심각하게 그 영혼의 생존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구원은 ‘불 가운데서 얻은 것’이 있다. 오늘 아이와 나눌 성경을 준비하고, 앞서 ‘완전하라’ 하시는 말씀을 연관지어, 오늘의 묵상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아이의 출근 전에 같이 나눌 말씀으로 되새겼다.

 

이에,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 145:2, 5).

 

하여,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8-9).

 

이를 아는 자는 간구하는 자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18-19).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