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3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48:1
하나님은 우리 생활 깊숙이 관여하신다. 오늘 말씀은 이에 피살된 사체를 정리하는 데 따른 상세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곧 불의한 죽임을 당한 시체에 대하여, ‘살인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계명이 파괴된 것을 수습하는 일이다. 그것이 “들에 엎드러진 것”으로 죽임당한 시체는 아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곧 그 사체에 접촉된 자도 의식상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민19:16).”
그만큼 우리는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순결함이 어렵게 느껴진다. 바울은 이를 두고 자신을 그처럼 돌이켜 회개하였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그만큼 삶이란 죄와 가깝고 이를 악용하여 악에 악을 더하려는 우리의 속성은 놀랍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그에 따른 자기들 주장과 이를 따르는 무리들의 언사에서 참으로 기이한 발상과 악의와 악으로 행하는 용기까지 보면서 놀랍다. 애국을 내세우며 죄를 덮으려 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들 ‘백골단’이라 하여 자신들을 결성하고 주장하고, 이를 이용하고 또는 멀리하는 자들의 각양 주장이나 그 모양이 다양하기도 하다. 참 무서운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저절로 감지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오늘 본문에서 새삼 우리의 윤리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살인으로 사체가 발견되고 이를 처리하는 데 있어 공동체의 책무가 따르는 것을 보면서, 오늘의 진영논리와 가치 기준의 격차가 참으로 심화되어 두려운 생각도 든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어떤 형태로는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때, 설령 자신들의 죄가 아니라 해도 공동체를 위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즉 우리 개인의 성결뿐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책임과 의무를 말이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하고 성경은 일러, 이 일로 그 결과는 무거워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7).”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이에 따른 것임을 상기시킨다. 곧 죄의 속량에는 피 값이 요구된다. 오늘 본문 3-9절까지는 결국 미제 살인사건의 시체를 처리하는 데 따른 공동체 모두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우리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한 사람의 극단적인 선택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과 이를 악용하여 자기 진영의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의 불순함이 뒤엉겨 급기야 말도 안 되는 애국청년단원들을 자칭하는 백골단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내 기억으로도 저들은 늘 거리에 공권력을 가진 깡패들이었다. 위아래 청옷을 입고 헬맷을 쓰고 쇠파이프나 기다란 곤봉을 들고 다니며 마구잡이로 가방을 검색하고 신분증을 요구하고 요설을 해댔다. 나 역시 한 번 서울역에서 가방검열을 당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란 책을 빼앗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를 자처하는 애국청년단이란 무리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보며 기겁을 했다.
아무리 유행과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지만 우리의 죄악됨이 참으로 기이하고 놀랍기만 하다. 이를 주선하고 주도한 이가 초선국회의원으로 앞서는 교수였다는 말에 더 한 번 기가 찰 노릇이다. 아무리 이해하고 또 헤아려보려 해도 도대체 무슨 생각들로 서로가 저처럼 서로를 변호하고 자처하여 국내외 기자들 앞에서 이 모든 사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말과 말 사이의 맥락이나 저들의 주장에 따른 논리에 도대체 한숨만 나온다. 소위 배울 만큼 배운 자들이고 특히 법에 관하여는 다들 전문가들로 일생을 살아왔을 텐데….
어찌하여 죄사함에는 피 값이 따르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결국은 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려 자신의 피를 그 속죄의 제물로 바치셔야 했던 것을 알겠다. 죄란 그만큼 악하고 질겨서 말로나 설득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다른 희생과 노력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10).”
이에 오늘 본문에서 반 이상의 지면을 할애하며 ‘쳐 죽인 자를 알지 못하는 사체에 대하여’ 왜 이렇게까지 처리하게 하시는지를 묵상한다. 저로 인하여 온 공동체가 범죄하게 된다. 일반 이방 국가에서는 영구 미제 사건이 덮고 흐지부지 끝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선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피 흘림에 따른 사건 해결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그 범인을 알 수 없어 벌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는 앞서 우리의 공동체가 이를 처지하며 자신을 성결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본 절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살인자에 대한 실제적인 심판을 유보하신 탓이지 결코 의식상의 절차로 마무리 짓게 하심이다. 결국 살인자에 대한 보응은 하나님만 아시고, 이에 보응하실 것이나 이에 앞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죄에 따른 의식과 그 부정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일련의 절차는 번거롭고 복잡한 것 같으나 반드시 이를 실현함으로 결코 악을 간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는 것을 본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오늘 일련의 사태나 그에 따른 다양한 주장이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쪽에서 상대를 비난하고 원색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외부로부터의 적보다 공동체 내부로부터의 적이 더 잔인하고 인간말종의 언사까지도 자행되는 것을 본다. 하여,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사 26:21).”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고통은 모두의 몫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오늘 말씀 가운데,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신 21:6-7).” 하는 의식과 고백으로 그 값을 피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안이하고 태평하게 민주주의를 누리고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었는지를 새삼 산 교훈을 통해 깨닫는다. 아울러 오늘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은혜의 시대’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또한 새삼 묵상하게 된다. 우리는 오늘을 보면서 우리가 여전히 죄 아래 종의 멍에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진저리친다.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듯 사람의 악은 내재되었다 드러나고 사람을 선동하고 상대를 잔인하게 묵살하려 드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는 사실이다.
이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너무 쉽게 누리고 사는 이 날의, 이 땅의 자유가 앞선 세대의 피와 눈물로 이뤄낸 것이었음을… 나 같은 사람도 ‘백골단’이란 말과 저들에 대한 회상에서 등골이 오싹하는데 오늘 날 너무 값 없이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듯하다. 믿는 자로서의 은혜도 같아서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에 구원이 거저 주신 은혜이기는 하나, 이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값을 치르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 우리는 바울의 절규와 애통하는 기도의 심정으로 이를 묵상하며 다시금 감사해야 하겠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2-25).”
우리는 너무 쉽게 교회를 다닌다. 자기 선호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고 더 크고 시설 좋은 교회에서 적당한 은혜에 도취되어 ‘고객 같은 성도’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 양 신앙을 누린다. 하루하루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혼신을 다하며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작은 교회의 피 끓는 희생은 낭만적이다. 내 곁의 친구나 여러 믿는 이들의 교회나 저들 신앙은 ‘좋은 사이, 좋은 시설, 좋은 설교’로 그저 좋은 게 좋은 신앙으로 적당하다.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의 직분과 그 사명을 아무리 설명해도 내 곁의 누구는 새해에도 당연히 집사 직분으로 불리며, 서로가 ‘사장님’ 하고 부르는 호칭 정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은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의미가 없다. 적당히 큰 교회, 나름의 시스템으로 서로의 사교와 친교가 어우러져 사회에서의 친구 정도로 서로는 다만 친절한 타인으로 적당한 거리에서 한 교회를 이루며 공동체 의식은 희박하다. 단적으로 오늘 우리 사회가 겪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 좋은 자유가 실은 얼마나 허술한지, 한 사람의 억지 앞에 속수무책으로 갈려 좌로 우로 각각의 진영논리와 셈법에 따라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주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은 진정 안녕하신가? 되묻게 된다.
점심 때 친구와 성경공부 겸 30여 분 대화중에 ‘뼈를 묻을 각오로’ 교회의 직분을 귀히 여기는가 물었더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는 투로 ‘그냥 주던데?’ 하고 자신이 올해도 집사라며 뭘 더? 하며 무슨 각오? 하는 식으로 나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나는 일련의 사회 사태가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실상은 사망이 늘 우리 코앞에 놓였다. 죄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은혜로 이를 사함 받았다고 하나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그만큼의 애통함으로 그 심령은 가난하고 온유함이 정상이다. 그저 아무 느낌이 없고 그러려니, 별 다른 감흥이 없다면 심각하게 돌아보고 이를 점검해야 한다. 그 믿음이 죽었거나 아예 없었거나… 왜 그토록 바울은 절규하며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거듭 다잡고 또 주 앞에 세웠는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12).”
곧 오늘 우리의 믿음, 그 은혜는 엄청난 값으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이에 오늘 우리는 천상과 천하의 모든 만물이 주를 찬송해야 하고, 이 찬양의 동기는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 148:5).
그러므로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 4).
뿐만 아니라,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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