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신 27:6-7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3
축복은 한 고비 너머에 있다. 곧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신 27:2).” 하심으로 사는 데 따른 생의 여정도 그렇듯 신앙 또한 다르지 않다. 늘 보면 굽이지고 이어져 때론 저 끝 모를 길을 가고 있는 듯하나 ‘내게 주시는 땅’ 위로 굽이굽이 고비마다 은혜의 강이 흐른다. 아브라함도 그러하여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9).”
또 굽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 11:11).”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 이에 험난한 시간을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렇게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 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간다.
오늘 본문에서 그 약속의 땅에서 “단 곧 돌단을 쌓되” 하심으로 우리의 삶이 곧 제단이 되어 주 앞에 한 날 한 날이 거룩하여져 간다. 이때에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고 하심은 무엇일까?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신 27:6).” 이는 곧 자연석 그대로 주신 상황에 순응하며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내가 어찌 해보려는 의지나 노력에 앞서 이를 내게 허락하신 이의 뜻을 따라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삶이 된다. 곧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와 노력으로 이룩하는 결과가 아니다. 여기서 철 연장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데 사용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무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부정한 도구로 구원의 단에 사용될 수 없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 20:25).”
이는 우리의 애씀과 수고로 일구어지는 것인데, 우리 스스로는 순수하게 그 마음을 주께 향할 수 없다. 나름 교회에 헌신하여 자신을 드리며 산다고 하지만 그에 따른 바람이 우리를 부정하게 한다. 즉 우리 속에 무엇을 바라는 데 있어 어떤 조건과 같이 ‘~하면, 해주실 거야!’ 하는 마음으로는 이미 그 의도가 정을 쪼고 날을 부린 것과 같이 인위적이다. 곧 우리 스스로는 순수하지 않다. 주께서 더하시는 마음으로 주의 영이 함께 하실 때 온전하여진다.
곧 우리의 충실함은 말씀으로 승복하는 삶이다. 내 생각이 다르고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나름을 차선책을 찾는 게 아니라, 주신 그대로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7-18).
무던하여 다소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묵묵히 주의 말씀을 따를 때,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하여,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132:12).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르러 말씀이 우리를 지키심으로 함께 하시는 것인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0-21).” 이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를 오늘 말씀의 의미로 읽으면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곧 은혜 가운데 주가 주신 그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신 27:6-7).” 이에 “번제를 드릴 것이며” 하시는데, 번제는 죄의 속죄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한다.
오늘을 사는 이 ‘가나안 땅’에서 우리가 ‘제사’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한 날의 생활에 있어 있는 그대로 주를 인정하고 바람으로 가능하다. 당시 가나안이 그러했듯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 또한 온갖 우상 숭배의 온상과 다를 바 없다. 신년이 되면서 웃자고 하는 예능프로에서조차 한 해 운수를 점치고 자신의 날들을 살피느라 무당을 찾는다. 신접한 자나 타로점을 치면서 어디 영험한 기운을 느끼는 듯 서로가 신기해한다.
우리 일상이 그런 가운데 놓여 오늘 날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인데도 다들 정신을 못 차린다. 분명 성경은 이르시길,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하심을 우리는 안다. 알면서도 재미로, 호기심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자신의 관심에 맞는 자를 찾아 그 마음을 의탁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한술 더 떠 오만가지 유튜버가 기승이라. 대통령이라는 자가 그런 극우 유튜브에 빠져 저들 말만 들어 이 지경이 되었다. 보면 그들 곁에 뭐 그리 ‘용한 사람들’은 또 그리 많은지.
하물며 교회가 어느 목사가 스스로 술객이나 박수가 되어 객쩍은 소릴 지껄여대고 순교를 운운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거리의 사람들을 선동하고 돈을 모은다. 그러다 저들끼리 자중지란이 일고 서로가 서로를 고소하며 탓하고 등 돌리기 일쑤인데, 세상은 본래 그렇다 해도 교회는 또한 목사는 최소한 묵묵함으로 말씀으로 그 입을 다물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마치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대하 33:6).”
그렇게 교회를 다니거나 사람들을 끌어 모은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시대가 너무 악하다는 말, 세상이야 본래 그런 곳이고 가나안은 그런 족속들로 느글거리는 곳이면 우리가 들어가 살 때, 바로 그 ‘가나안에서의 모든 죄악’을 제거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들이 정결하고 온전하기를 바라신다.
이에 “또 화목제를 드리고” 하시는데, 화목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에 대한 감사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과 친교를 간구하는 제사이다. 광야 생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불화했던 때에 이와 같이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곧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이를 위하여,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예수께서 우리의 화목을 위하여 제물이 되심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즉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맡은 바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주목하게 하시는데,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그렇게 화목제는 번제와 달리 희생물의 기름진 부분만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레 3:3-5), 나머지는 제사장과 경배자가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기쁨을 나누는 제사이다(7:15-17, 30-34). 곧 오늘 날 이 어지러운 사회에서 마음 기댈 곳 없어 사람들은 유튜브 속의 온갖 말(言)과 말 사이에서 겅중거리듯 빠져들다 이내 망상에 사로잡힌 자 되어 각각 그 말에 도취된다. 내가 보기에 신접한 자로 오늘 날 새롭게 자기 말에 도취되어 사는 자들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지껄여대고 뱉어내듯 자기 말이 자신을 속이면서 그 말에 솔깃 하는 자들을 끌어 모은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되고 힘이 생긴다. 권력이 되고 한 세력을 이룬다.
나는 길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휘두르는 나이 든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어디 양지바른 곳에 앉아 어두운 귀로 크게 튼 유뷰브를 보며 서로가 쌍욕을 해대는 노인들도 안타깝다. 저들을 선동하여 노년의 그 아까운 시간을 그리 허비하게 하는 온갖 혀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더러 정신적으로 망상이 그 어떤 질환보다 무서운 것을 잘 안다. 얼마 전 어떤 이가 망상으로 인한 조현증세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다스리는 사연을 들었다. ‘에이, 설마’ 할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극도로 시달릴 때는 자신이 ‘대통령의 딸’이다. 친정아빠가 가짜다. 아빠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됐다. 억울하여 못 살겠다. 몇 통씩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고소했다. 하루에 수십 명이 넘을 정도였다.
비극적이지만 오늘 날 우리 사회가 그와 같다. 이를 신봉하듯 집단 최면에 걸린 것 같다. 거리로 나와 이 엄동설한에 목청껏 억울함을 호소하며 결사항쟁을 외쳐대는 노인들의 현실이 눈물겹다. 이를 선동하고 부추기는 젊은 것들과 함부로 교회가 나서고 목사가 단상에 올라 막말을 하듯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보면 슬프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하시고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하심을 되새기게 된다(신 27:2, 3).
하여 “거기서…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하심을 눈여겨보게 된다(5). 곧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6-7).” 주신 상황에서 주를 인정함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할 수 있을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곧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하여 오늘도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또한 오늘 내게 허락하신 모든 사실과 여건을 있는 그대로 주 앞에 내어놓고 제단을 쌓듯 이 한 순간이 나의 예배가 되어 주 앞에 드려지기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3-24).” 하심을 붙들고, 나의 죄악 됨을 주 앞에 내놓고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이와 같이 주 앞에 엎드린다. 아,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2).
하시는 말씀 앞에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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