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전봉석 2025. 1. 19. 05:11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8-9

 

 

우리가 변해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우리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3-4).”

 

직접 애굽에서 겪고, 보았고, 기적적으로 출애굽을 하는 과정이나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시는 이 놀라운 사실을 겪었다. 그럼에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적에 두고 우리는 불평하고 두려워하여 이내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그렇게 광야 40년을 돌아 가나안이 건너다보이는 요단 앞에 서서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듣는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이 주지 않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받아들일 자세를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기회가 있으면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기 일쑤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함이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주지 않으신 것인데, 마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에덴에서 쫓겨나서 다시 에덴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그 길을 막으신 것과 같다.

 

온전히 하나님은 신뢰하지 못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서 보고 듣고 깨닫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는 더 악하여질 뿐이다. 죄가 그대로 정죄함 가운데 있는데 에덴으로 돌아와 영생의 나무 실과를 먹고 영원한 존재가 된다면 그것이 더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같은 이치로 순종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스라엘 곧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에는 완벽한 마음의 가질 수 없다. 스스로의 지혜와 의로움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해서 이를 전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스스로의 답답함으로 절규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에 통회하고 자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그것이 자기 안의 죄 때문이라 하였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나 여전히 죄 된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에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빛을 받지 못하면 백주대낮에도 어두운 소경과 같을 뿐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깨우침도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바, 그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로서는 그 어떤 것도 이해하거나 확신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조금 살만하고 기력이 남으면 이를 거부하고 이방민족의 여느 사람들처럼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으로 신을 찾아 경배하였다.

 

결국 이 모든 결과는 우리의 속됨으로 인한 것이다. 여전한 죄로 우리가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절규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고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장 다루기 어렵고 믿을 수 없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스스로의 판단이다.

 

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는 바울의 처절한 회개와 절규는 그렇게 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함으로 불순정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피력하고 있다. 하여 저는 더 나아가 우리에 권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오늘을 살면서 내가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하고, 날마다 나를 죽여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구하는 일이겠다. 우리의 불순종은 결국 우리의 책임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 즉 우리가 온전히 주를 의뢰하지 못한 가운데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면 사탄이 된다. 그 사탄이 사람을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하였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6-27).”

 

결국 일련의 사태에서 모든 언론을 적으로 돌리고 자신들이 심취한 유튜브 방송이나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 외에는 다 적으로 돌린다. 심지어 모든 사법체계와 헌법재판소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보면 왜 우리 속성 안에 그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로할 수 없는지를 알 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받고 또한 이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친히 목격하고 경험하고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알 것 같다. 그와 같은 속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마치 철들지 않는 어린아이 같이 자기고집과 아집과 그와 같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고집을 부르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이내 거부한 이스라엘의 강퍅함은 오늘 우리의 굳은 마음과 다를 게 없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출 32:9).”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를 인정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34:9).”

 

나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그에 따라 감정적으로 휩쓸렸을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으라고 외치며 언제 주를 따랐냐 하는 이스라엘 군중의 심리를 이해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더 악한 존재들은 이를 선동하고 부추기는 바라새인과 서기관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다. 마찬가지고 일주일에 수천만 원씩 후원금을 거둬들이며 단상에 서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를 부추겨 추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다 법원에 난입하게 한 선동자들이 나쁘다. 이를 자신들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데 이용하는 정치가들의 세 치 혀가 문제다.

 

이에 오늘 말씀은 놀라운 진리를 도출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감추어진, 그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오늘에 이 모든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다. 여기서 감추어진 일, 그 ‘오묘한 일’이란 인간에게 계시되지 않은 일로 하나님이 우리로 알지 못하게 하신 일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일이다. 그 계획과 섭리이다. 반면에 ‘나타난 일’이란 말씀이나 예언, 기적 등과 같은 것으로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 역사로 배울 수 있는 곧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계시의 한계를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하다못해 우리 스스로 우리의 뇌의 구조나 아이큐의 활용도 10%를 다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다만 분명히 보여 주시는 일, ‘나타난 일’로 우리는 부지런히 탐구하고 묵상하며 주를 더욱 알고자 할 뿐이다. 그렇게 후손들에게 가르칠 것을 요구하신다.

 

오묘한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속해 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이를 인정함으로 주의 지혜와 총명을 구한다. 하여, 우리가 함부로 예단하고 속단하고 현실의 당면한 일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려는 것에는 반드시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3:16).”

 

이 점은 바울도 고백하고 있는 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따라서 우리는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에덴에 선악과를 두셨는지… 왜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속을 위해 이내 예수를 반드시 죽이셔야 했는지… 이러한 문제를 우리 이해와 상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감정적으로 느껴서 흥분하거나 스스로의 만족으로 카타르시스에 젖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의 논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성경이다. 우리는 다만 피조물로 그 한계를 가졌다. 그런데 창조주의 절대적 주권을 다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19-21).”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우리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뜻하지 않은 일을 두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면 스스로가 파멸을 자처할 뿐이다. 스스로 나서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지지하는 자들이 늘어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1960년대 당시에도 법원이 습격당한 일이 있는데 그때도 반공청년들이라 해서 극우열성지지자들의 소행이었는데, 그 뒤에 안기부의 선동이 있었다. 이후 오늘 2025년에 또 다시 그 일은 반복되어 일어났고 그 뒤에 누가 있는지를 우리는 다 안다. 역사는 소용돌이치듯 반복하고 그럼에도 우리의 깨달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겸손이 우선이다. 교만으로 모든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그런 당사자들은 여전히 저들만의 논리로 심지어 이번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찾아가 이러한 국내정세를 알리겠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래서 미국의 속국을 바라는지? 어떤 개입을 원하는 것인지? 나의 미력한 지식과 이해로도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들 저러는지 모르겠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6).”

 

오늘 우리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성경의 이때 당시의 사람들의 선택과 그 무지와 이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알게 된다. 수천 년이 지났다고 하여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되풀이 될 뿐이다. 문명을 운운하고 최첨단 기술들을 자랑하지만 모든 시대는 선조보다 나은 문명을 자랑했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서로 갈려서 너는 어느 쪽인가?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안의 적이 곧 우리 자신인 것을 인정하면서 주 앞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늘도,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0-41).”

 

하여 오늘도 주 앞에 아뢰며 나의 여러 생각이나 판단을 뒤로 하고 주의 뜻을 구한다. 그렇게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그러므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 6:3-4).

 

오늘이나 내일의 이 모든 일들은 주가 주관하시는 바,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