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전봉석 2025. 1. 15. 05:14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신 25:13-15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우리가 주를 바라며 경외함으로 떨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신앙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데 따른 우리의 기본이 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우리 현실의 당면한 실상을 경계하게 한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하시는 말씀에서 두 가지 같은 내용을 지적한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즉 같은 입으로 두 말을 한다. 같은 주머니에 서로 다른 두 저울추가 있다. 혹은 서로 다른 되가 있다. 곧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스스로는 그럴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남을 향하여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으로 달리 해석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세계적으로 양분되어 갈리는 모든 사안을 볼 때 저마다의 주머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추와 되가 들어서 그때마다 달리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를 엄히 지적하시며 바로 하라 하시면서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하고 우리의 날을 보장하신다(신 25:13-15). 서로 “같지 않은 저울추”는 무엇을 뜻할까? 곧 무게를 재는 한 돌과 또 다른 한 돌을 각각 주머니에 넣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무게를 달 때 돌로 만든 저울추를 사용하였는데,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부정직한 자의 두 개의 추’를 의미한다.

 

오늘도 같은 사안을 두고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선으로 접근하다보니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라졌다. 현직 대통령을 체포하는 일이 벌어지는 데 있어 최소한의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는 것을 두고 마치 오늘 말씀이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신다.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5-36).”

 

본능적으로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시선을 두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더욱 성경의 기준과 가르침을 우선해야 한다. 이르시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또한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거나 판단할 때의 좌표가 되어,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잠 20:10, 21:6).”

 

그러니 보면 말씀의 기준은 언제나 ‘오직 주를 경외함으로 우리가 떨고 기뻐하는 삶’으로 모아진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범사에 주를 바랄 때 사람들 앞에 서서 함부로 선동하지 않는다.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듯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보면 나는 민망하고 면구스러워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이는 마치 자기 의지로 어찌 해결하거나 다스리려는 것이어서,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5-6).

 

그 속에 다 꿍꿍이가 있다. 이를 “네 집에 두지 말 것이요” 하심도 그래서이다. 남들도 모르게 그리 속에 감추고 있다 보면 은연중에 그 삶은 마치 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는 송곳 끝이 삐져나오듯 감출 수 없는 기질이 되고 성격이 된다. 앞서 ‘너는 주머니에 넣지 말 것이며’ 하심도 같은 의미다. 서로 같지 않은 추나 되는 실제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속여 그 영혼을 병들게 한다.

 

어제도 한 아이가 학업상담을 왔는데, 체구가 유난히 작고 왜소하여 그것 때문에도 강박적으로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시달림으로 눈물을 보였다. 아내는 안타까운 아이의 모습과 그 엄마의 집착을 눈치 챘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엄마의 관여가 결국 아이의 속에 내재된 자신의 외모와 그래서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아이가 울었다. 두 모녀가 돌아가고 아내는 아이의 안타까운 모습과 그에 따른 열등감을 놓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저 듣기만 할 뿐 달리 뭐라 거들 말이 없었다.

 

보면 우린 모두 저마다의 주머니에 각기 다른 경험치가 가치가 되어 그 사람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을 본다. 뉴스를 보면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시선으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게 때론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골이 깊고 멀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밝히신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설령 그것이 당장은 유익을 주고 손해를 피하게 하는 것 같아도 두고두고 그 일은 회자되어 부끄러운 역사가 될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또는 어제 다녀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나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사실을 생각하며 오늘 말씀의 결정을 묵상한다. “그리하면, 네 날이 길리라.” 이는 단지 이 땅에서의 삶의 길이로 끝나는 게 아니다. 또한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하다못해 오늘의 일은 역사 속에서 길이 남아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작 두려운 일은 사는 동안의 일이 아니라 살다 간 뒤 그 남은 자들에게 미칠 영향이다. 가까운 옛 일 가운데서도 저는 끝내 국민 앞에 사과하지 않고 스스로는 당당하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죽고 난 뒤에도 군사독재, 쿠데타 등의 대명사처럼 그때마다 회자된다. 어제도 전직 아무개 대통령이 탄핵 당하고 검찰에 수사 받으러 들어갈 때의 영상이 뉴스에 거듭 나오는데, 아직 살아서 자신의 저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다 내가 얼굴이 다 부끄러운 것 같았다.

 

더 훗날에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설 텐데, 우리의 죄가 주의 보혈로 가려지고 씻어지지 않았으면 우린 저마다 어찌 그 부끄러움을 감당할까? 내 속에 여전히 기억으로 남아 문득 떠오를 때마다 주의 용서를 구하고, 긍휼하심 앞에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죄가 여럿인데… 우리 안의 서로 다른 추와 되는 당장에는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나 이는 무릇 부정한 일이 사실이고 가증한 일이다.

 

비록 사람이 사람을 속여 당장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에 시인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시 33:13-14).

 

이를 의식하고 염두에 두고 살 때 우리는 주를 경외함으로 두려워하고 기뻐한다. 기뻐하는 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이 주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의 일을 낱낱이 고하며 사탄의 정죄를 받으며 부끄러움을 감당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아름다운 옷으로 덮으실 것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스가랴 선지자는 이를 보고 진술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사탄은 오히려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정죄하지만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 하나님은 저를 두둔하시며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그뿐인가? 오히려 저에게는 면류관을 씌우시며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5).”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총이 없다면 우리가 주 앞에 서서 드러나게 될 우리의 죄악으로 영원히 그 부끄러움을 고통 중에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에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잠 21:6).” 하심은 요란하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은 안개 같으나 곧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가 누구인지 밝힌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7-8).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왕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그렇게 세우심을 입은 자신이 실은 하나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심은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하시는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그의 아들로 그가 낳으셨다(삼하 7:14).

 

곧 오늘을 살면서 ‘여호와의 양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일이란 ‘시온의 왕’으로, 곧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인데 이는 또한 우리를 일컫는 말씀이기도 하다. 곧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것이 날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이에,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

 

곧 우리는 같은 싸움으로 오늘도 치열하다. 내 주머니 속의 두 개의 추와 서로 다른 되를 나는 안다. 그것으로 옳지 않다는 것도 알면서 실은 나도 모르게 그것이 튀어나와 남을 판단하거나 나 자신을 합리화한다. 이에 말씀은 덧붙이시는 것이다.

 

“내게 구하라.”

 

우리가 자유로이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미 선택된 자녀임을 안다. 이는 이제 우리의 특권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구한다.

 

오늘도 아이가 저녁에 보내온 성경구절로 출근 전 아이와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즉 바울은 우리도 남들처럼 할 거 다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하는 것은, 우선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낮은 등급의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자로 자신이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 물질적인 권리를 요구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범사에 참는 것은” 곧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다른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곧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음으로 비록 곤궁한 살림이나 인내로써 바울은 참았다. 왜냐하면 이는 행여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려는 자들과 복음 전파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곧 오늘 날도 이를 경계할 것은 자칫 목사로 너무 과도하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그에 따른 남다른 대우로 행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 변질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너무 지나치게 잘 사는 목사의 부유함은 아무래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곧 어떤 이게는 ‘신령한 일을 담당한 자’가 너무 물질에 얽매여 사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심지어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굳이 그렇게까지 행하는 데 있어 ‘몸’을 친다는 것은 실제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구를 제어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그만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오늘 아이와 같이 나누고,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묵상하면서 주께 오늘도 이 한 날의 삶을 의탁한다. 그러할 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1).

 

하심은 강한 울림으로 전하여진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7-8).

 

하심으로 나의 특별한 은총 앞에 엎드리며,

 

다시 한 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