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신 26:16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3:3-5
주의 은혜로 산다는 일은 살면서 사는 동안에 감사로 드러난다. 이에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나의 모든 상황과 여건과 그에 따른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인 것을 인정할 때, 모든 수확의 맏물 곧 첫 열매를 감사의 고백으로 드린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2).”
이는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두신 곳에서 “얻게 하시는 땅”의 것으로 내게 “주시는 땅”에서 얻은 것이다. 같은 말이 반복되고 쓰이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은 그 형편이 어떠하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신 6:3).” 이를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실하심을 고백할 수 있다.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신 26:3).”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며 우리가 장차 들어갈 영적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천국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모든 상황 속에서이다. 그렇게 해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하는 성경의 진리 앞에 승복하고 아멘, 할 수 있다.
그렇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결국은 오늘을 살면서 이 날들은 마치 천국에서의 삶을 두고 학습하고 훈련하는 시간으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모든 게 다 주의 선물이다.
설령 그것이 오늘은 고난이고 고통으로 주어진다 해도 그런 가운데서 주를 인정할 때 주의 은총은 더욱 선명해진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자세한 내용은 까먹은 이야기 하나 있다. 젊은 선교사 부부는 주의 부르심에 따라 어디 오지로 가서 말씀을 전하며 생활하였다. 그곳에서 세 아이를 낳았고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세 아이를 질병과 사고로 잃고, 선교사마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사모님은 본토에서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남은 사역을 감당하며 일생을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홀로 생활하며 지냈는데, 중년의 나이에 불량배들에게 잡혀 일주일을 끌려 다니며 성적 학대를 받다 간신히 풀려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내 주께 감사하며 자신의 생을 그곳에서 마치었다.
저의 일기가 전해지고, 나 같은 자도 그런 내용을 읽는 동안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롭고 답답하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는 심정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느낌과 달리 저자인 사모님의 고백은 놀랍도록 담백하여서,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더 나아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하는 고백도 가능하였다.
물론 이런 일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성령의 도우심으로나 가능할 테지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리할 수 있음은 주가 함께 하심으로였다.
오늘 우리가 얻는 ‘맏물’ 곧 시간이나 장소 그 밖의 모든 것에서 처음 것, 그 시작을 알리는 수확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의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서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민 18:12-13).”
그렇게 아내는 아이가 하나 새로 시작하여 얻은 첫 교육비는 그대로 주 앞에 드린다. 더욱이 이번에 오는 아이는 또 어떤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왔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첫 날 상담할 때 아이가 자신의 왜소함으로 겪는 서러움이 무거웠는지, 제 엄마가 털어놓는 고민에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리던 것이 내내 마음에 남았던가보다. 겨우 세 아이가 집으로 와서 수업을 하는데 한 아이는 ‘똥싸개’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제 중학생이 되는 시간을 같이 했다. 결국 아이는 양극성성격장애 의심군으로 분류되었고 아이엄마는 이 일로 마음이 무겁다.
이제 6개월 남짓 된 여자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는데 그동안 숫자도 글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학원들이 며칠 가르치다 모두 포기하고 돌려보내서 결국은 우리에게 온 것이다. 지난여름에 왔으니까, 아이는 이제 혼자 동화를 읽고, 덧셈뺄셈을 한다. 아이엄마의 병적인(?) 대인기피증으로 처음엔 전화로 상담만 하고, 문가에 서서 들어오지도 않고 우는 아이를 두고 갔을 정도인데 이제는 아내와 서서 한참씩 일상을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저마다의 사연 가운데 더욱이 아이 일로 힘들어하는 경우 아내는 유난히 그 일에 은사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왜소한 아이는 울면서 안 하겠다고 하더니, 아내의 어떤 말에 주의 영이 감동을 더하셨는지… 오늘부터 아이가 온다. 앞전에 두어 달 다니면 자폐성 지적장애가 있던 아이는 결국 세 달째 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는데, 혹시 교육비로 낸 것을 기부금영수증으로 떼어줄 수 있는가 하고 물어서 나는 기꺼이 그리해주었다. 아내와 나는 언제부턴가 우리의 모든 수입은 교회로 통하고, 우리가 수고하여 삯으로 받은 게 아니라 은혜로 주가 더하시는 것으로 인정한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이 말씀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내 것으로 여길 때 드리는 데 인색하거나 셈을 하게 되어 계산이 들어간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모든 범주의 영역은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이해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리하여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둘러싼 세상 모든 곳곳에는 다신교 사상과 저들의 예배 양식에 따라 우상을 섬기고 자기 좋을 대로 처소를 두어 저들의 신을 섬기며 살고 있다. 그것이 물질의 신이든지 앞날을 점치며 호기롭게 이를 신봉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기호에 따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의 예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뜬금없이 사마리아 여자는 이를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시며,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1, 22).” 하심으로 그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게 하신다. 곧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이를 우리의 일상 모든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여 매순간이 ‘이 때라’ 하심으로 ‘이렇게’ 나는 오늘도 같은 시간과 동선을 따라 올라와 주 앞에 앉았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산책을 하고 누구와 만나거나 대화하거나 저를 생각하는 일도 모두 주 안에서의 일이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나는 그 가운데 항상 ‘영과 진리’로 나의 모든 게 드려지기를 바란다. 길을 걷다가도, 오늘은 적당히 어디가 아픈 것으로도, 뜻하지 않았던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닥쳤을 때에라도…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 24:1).” 그 하나님은 오늘도 같은 분으로,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128).
하며,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하시는 말씀으로 나의 범사가 다 주의 것으로, 만사가 다 때가 있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그러므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이것으로 오늘도 산다. ‘범사에 자랄지라.’ 하심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5:20).” 은혜에는 감사가 따르고, 기쁨과 성장이 같이 하게 되어 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그리하여 이것이 주의 뜻임을 우리는 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예전에 알던 시인 아무개가 그때 말했다. 자신은 하루 24시간 무얼 하든지 시를 쓴다고 하면서, 자나 깨나 시 생각만 한다고 했다. 그 소리가 막연하면서도 당시 두 권의 시집을 냈던 그 친구의 말을 의식하며 생활하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에 이르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이 오늘은 나의 범사가 되기를 기도한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산다면 어떠하든지 모든 순간은 예배가 되고 주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천국 연습의 날들이 아니겠나? 그렇게 해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하심으로 오늘도 말씀 앞에 먼저 앉고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들을 때 연관하여 성경을 묵상하게 되는 일도 그 때문이다.
어제도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한 날에 기준이 필요하다, 매순간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서도 분명한 기분이 필요하다. 이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하루에서 중심이 되고 우선이 되고 먼저, 첫째, 맏물이 되어 주께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 서로 다짐하였던 것 같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하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에 나의 전부, 범사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맏물, 곧 십일조 등 주께 드려지는 모든 게 따로 구분이 없으나 성별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걸쳐 오늘도 지켜야 할 계명으로 우리 삶을 통치하신다.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께 드려지는 삶으로,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3-5).
그렇다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6).
이와 같은 확신과 놀라운 의뢰함으로 주를 바랄 때,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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