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6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9
어느 집이나 이런저런 사연들이 있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누구는 세상을 더욱 바란다. 오늘에 이르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데 있어 극단적으로 이끌리는 듯하다. 어지러운 사회와 그에 따른 사람들의 양극성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이어진다. 결국 ‘똥싸개’는 지적장애판정을 받았다. 아이엄마는 울고 아이는 자신이 그렇다는 것에 마음이 상했다. 다른 병원에서 좀 더 정확하게 진단을 받고 싶다고 하여 몇 곳을 알아보았는데, 보통 두세 달씩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소아정신과에 아이들이 밀려 있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하시는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먼저 주 앞에 바로 세우게 하신다. 여느 학원에서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며칠 만에 돌려보내기 일쑤인데, 아내는 아이와 벌써 7년이 되었다. 아이엄마는 울면서 학교 당국의 무심한 일 처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또 교사들 입장에서는 ‘그런 아이’로 인해 심지어는 휴직을 하거나 별의 별 송사에 휘말리기도 하는 일이다. 아이엄마는 학교에서 연결한 무슨 센터에서의 검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곳이 결코 공짜가 아니고 다른 곳보다 신중하다고 설득하였다. 아이의 지능은 63이 나왔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심이 어느 시대보다 필요한 때이다. ‘강하고’ 할 때 그 뜻은 ‘꽉 잡다’, ‘달라붙다’ 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맹수가 먹이를 공격할 때 사력을 다해 완강하게 부여 쥔 것을 놓지 않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강하고 담대할 때가 그러하다. 주께서 나를 두고 그러하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우리가 말씀을 의지한다는 게 그저 좋은 글귀나 문장을 읊조리는 정도의 감상이 아니다. 이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아이엄마의 눈물과 그러한 통화를 곁에서 할 때 아내는 내게 어찌 해야 하는가? 하는 눈짓인데 나로서도 뭐라 할 수 있을지? 스무살 정도 차이가 나는 그 위 큰 아들은 몸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뚱뚱하다. 거의 종일 게임을 한다. 한동안 같이 닭집을 한다고 하고 배달 일을 돕는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아이가 보기에는 형이 제일 부럽다.
그러니 부모 심정이 어떨까? 가장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게 우리 자신이면서 또한 자식들 일인데… 이를 주 앞에 아뢰고 맡기지 않으면 우린 무슨 수로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여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며 자신을 두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9-21).” 그러니 이 문제는 주 앞에 의뢰할 수 있을 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스스로 나 자신도 그러한데 하물며 남을 선동하고 부추겨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의 얕은 술수에 혀를 찬다. 저들도 진정 자신에게 속는 일이기도 하여서 거짓이란 거짓을 더해서 그것을 믿게 한다. 이러한 우리의 속성을 앎으로, “담대히 하라” 하시는 말씀 앞에 다시 멈추어 선다. ‘담대하라’는 것은 ‘방심하지 않다’ 즉 마음을 다잡으라는 것이다. 강하고 용감하라는 말씀이다.
사실상 우리가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스스로가 힘을 내고 분발하여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라는 게 고작 힘내세요, 하는 정도의 말인데 저가 안 믿는 자라. 예전에 교회를 다녔었다는 말로 오늘을 무마하려드는 데는 무슨 말로 위로한들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아이엄마는 물론 아이도 무서운 것이다. 이제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장애등급을 받고 특수학교나 일반학교 특수학급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엄마는 서러워서 운다. 아이는 싫다면서 운다.
이에 우리가 사는 동안 “두려워 말라. 떨지 말라” 하시는 데 따른 말씀으로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복이다. 우리가 살면서 앞날을 알 수 없으니 의당 두려움에 떨리는 것은 당연하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민 13:30-31).” 같은 상황에서 누군 주께 맡김으로 강하고 담대하다. 그러나 누구는 두려움에 떤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32).”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나는 어릴 때 나의 엄마는 어떠했을까? 하고 말을 꺼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다. 모든 학급의 담임들은 서로 맡지 않겠다며 나를 거부했다. 지체장애에 지능검사가 필요할 정도로 둔재였던 나를 그것도 학기 말에 자신들 학급으로 받기가 꺼려졌을 것이다. 학년주임은 엄마를 설득하여 장애인학교로 보내려 했다. 당시에는 그런 게 지금처럼 체계적이지도 않아서 주먹구구식으로 받을 수 없다고만 하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엄마는 한 시간 가까이 선생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를 두고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복도에 서서 몇 교시쯤일까? 몇 번은 수업 종이 울리고 다시 끝나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하여 결국 학년주임은 화가 난 목소리로 나를 자신의 학급으로 데려가 팽개치듯 소개했다.
그때의 어떤 서러움이나 원망하는 마음은 사그라져 슬프지 않다. 그러다 어제 아이엄마와 아내의 통화를 같이 듣고 서너 곳 병원을 알아보다 마음이 어려웠던 것인지, 새삼 나는 나의 모친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때 나의 엄마는 오로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하는 심정으로 살았다. 더욱이 자식들에 대해서는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가 알아서 하시길. 주께서 사용하실 거면 쓰시고, 아닐 거면 데려가시라 하는 심정으로, 마치 야곱의 단판처럼, 하나님만 붙들고 늘어져 죽기 살기로 자신도 놓지 않는 심정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나는 물론 우리 사남매 모두가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의 길을 가게 된 것인지….
시적시적 아내와 운동을 위해 산책을 하면서 그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새삼 대단하고 위대하였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이에 우리가 붙들 수 있는 말씀,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실 때, 여기서 ‘떠나다’는 ‘실패하다’, ‘게으름을 피우다’란 뜻으로 하나님이 그러실 리 없음이고, ‘버리다’의 뜻으로는 ‘낙오된 채로 방치하다’란 뜻인데 이 또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그러실 리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하시다. 특별히 조성하신 민족으로 저에 대한 마음은 남다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여기서 ‘너는 내 것이라’ 하심이 결코 괜한 소리로 한 것은 아니실 터,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2-3).”
이에 또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 있어 귀하고 보배로운 소유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하심으로,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신 26:18).”
또한 우리의 오늘은, 이 모든 상황과 여건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한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이와 같은 확신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어쩌다 물리거나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 모든 여정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의 영광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아내와 말할 때, 왜 우린 늘 ‘이런 애들’만 맡게 될까? 하는 소릴 하는데, 그게 우리여서 그렇다고 말해주면 새삼 나의 나 된 것이 은혜였다는 데서 감격이 온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듯 오늘의 내가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상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이를 위로하는 자로 세우심을 입을 줄이야! 나야 말로 평생이 내 코가 석 자일 줄 알았는데, 나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게 하심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하는 나의 어머니의 그 믿음으로 나 역시 주 앞에 다 맡겨버린다.
그야말로 맡겨버린다. 맡겨버리지 않으면 나는 단 하루도 나로서 살기도 힘에 겹다. 하물며 누구 일로 마음을 쓰거나 저의 사연을 같이 짊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는 할 수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여서 더는 바동거릴 것도 없이 이것까지도 주께 맡김으로 산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그렇게 나의 모친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그 낯설고 긴 복도에 나를 혼자 세워두고 가버렸다. 그때 어린 나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그런 건 이제 아무 감정도 없다. 오히려 감동은 있다. 숱한 감정이 서러움으로, 서러움이 원망으로 일그러져 몇 교시 째 선생들의 외면을 받으며 눈치를 보고 서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지지리 공부도 못하여 구구단도, 철자법도 모르던 게 뭐 그리 심각한 일이었겠나?
정작 오늘에 이르러는 그때의 그 일을 아이엄마에게 들려주고 싶고, 나의 모친의 모진 결단(?)으로 주께 맡겨버린 생이 어떠한가를 말해주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그 이후 나의 6학년 시절도 파란만장하여 여자아이들 65명 교실에 남자아이 4명이 강제적으로 들어가 1년을 보내야 했고, 큰 수술로 1년을 쉬고 중학교에 올라가야 했던… 말로 다 옮기기조차 어려웠던 시절이라, 어린 게 중1 학년 말께 거의 반 년을 모은 수면제로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을 정도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가장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인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고 조성하셨던 나의 모든 상황과 상황이 모여서 주의 뜻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3-14).” 그런 거 보면 나의 생이 참으로 오묘할 따름이다. 어떻게 견뎠을까? 싶은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렇게 또 어려울 게 없었던 것은,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9-21).”
그런 거 보면 성경의 믿음의 영웅들 또한 그때마다 주의 은혜로 살았을 터,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하여 오늘도 나로 하여금 말씀 앞에 이끌어 새벽을 깨우게 하심일 테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여느 때보다 특히 정신적으로 심약하여 한 집마다 애나 어른이나 상한 영혼으로 힘에 겨워하는 때이다. 교회로 권하고 말씀으로 전하여 저들을 붙들고자 하나 그만큼 마음이 또 완고하였다. 누구는 애가 서른이 다 돼 그런데 자신도 주일을 거르고 해외여행을 가고, 다음 달에는 아이와도 그렇게 주일을 끼고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하니, 뭐라 이른들…. 좀체 들으려하지 않고 각자의 길로 가는 것이라. 생의 한복판에서 여기서 끝이면 그나마 좋으려는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같은 생을 사이에 두고 누구는 주를 더욱 의뢰하고 누군 더욱 세상을 바라며 산다. 그런 가운데 나의 일생에서 나는 주의 은혜로 살았던 것이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4-5).
하여,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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