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 30:14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 7:9-10
말씀이 늘 곁에 있다. 이를 들고 묵상하여 하루에도 언제든지 그 말씀으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우리로 살게 하신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유튜브에 사로잡혀 산다. 마치 개미지옥 같아서 한 번 관심을 두고 보다보면 계속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녹고 생각이 사로잡힌다. 내가 누구와도 정치 이야기 또는 종교 이야기, 다단계 같은 것에 대해 대화를 꺼리는 이유는 그것이다.
우리에게 이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가까이 할 수 있다. 다윗은 이 말씀을 항상 그 입에 담아 두었다고 하면서 ‘송이꿀보다 달다’고 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9-10).
이와 같은 고백이 실제 우리 삶에서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네 마음에 있은즉” 곧 온통 나의 생각이 말씀으로 기준하여 무엇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주께 아뢰는 것으로, 말씀은 우리가 늘 묵상하고 그 마음에 담아둘 때 복이 있다. 더욱이 오늘과 같이 어지러운 시국에 서로 갈려서 부모 자식도 이웃과 이웃도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이는 결국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우선, “너는 마음에 새기고” 즉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 말씀으로 하여 이를 내 마음에 먼저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여느 학원을 보내는 것보다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서로 대화하며 화두로 삼을 것이고,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늘 어디에서나 눈으로 보고,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그것으로 나의 표정이 되게 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나의 사는 터전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으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
하심을 삶으로 살아서 실천하는 삶이 되겠다. 분명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하여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곧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시는 게 아니다.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미루고,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고, 우선순위를 다른 데 두고 살기 때문이다. 하여 이 말씀은 빈부귀천이 없고,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깨달아 알 수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일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라고 하였다.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이는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내가 항상 낚시에 빠져 낚시를 좋아할 때도 늘 관심은 낚싯대나 봉돌의 무게에 대해 찾아보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하였다 하면 그것을 따라하여 한 동안은 바늘도 직접 매듭을 짓고 목줄과 원줄의 두께와 길이조절도 때를 따라 연구하였다. 그렇게 또 낚시를 한 번 갈 때면 가기 전 2, 3일부터 떡밥에 쓸 것이며 그곳의 지형과 고기들의 특성을 알아보고 이를 준비하는 일이 즐거웠다. 돌아와서는 일일이 낚싯대를 닦고 말리고 하는 그 즐거움이 좋았다. 같이 어울리는 친구도 낚시를 같이 즐기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로 나뉘었다.
하다못해 그러한데 하물며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경에 별로 관심이 없고 말씀을 묵상하거나 읽고 되뇌어 함께 나누는 일에 데면데면하다면…? 오늘 말씀은 이에 확실히 들려주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이 말씀은 앞서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하신 데 따른 강론이다.
먼저, “보라” 하신다. “볼지어다” 하는 뜻으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이다. 남의 설명이나 말로 듣지 말고, 직접 자신으로 눈으로 보라, 하심으로 ‘주목하라’는 뜻이다. 누가 말할 때 듣고 있어? 하고 묻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짓을 하는 것으로 듣긴 들어도 듣지 않는 것 같을 때 그리 되묻는다. 그것처럼 제대로 성경 한 구절 자기 눈으로 보지 않으면서 늘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마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을 직접 자기 눈으로 읽은 적 없으면서도 그 내용을 알고, 아는 것으로 다 안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들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주 엄히 표현하시는데,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이 두 가지가 항상 여기에 있다! 하고 주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똑똑히 보고 주목하여 바로 살피고 관찰하라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보라!” 하고 먼저 시선을 두게 하신다.
그런 뒤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하심으로 말씀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길에는 ‘생명과 복의 길’이 있고 또한 ‘사망 및 화의 길’도 있다. 우리 생은 늘 이 두 갈래의 길 위에 서는 일이다. 하루에도 항상 두 길밖에 없다. 누구는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 이도저도 아닌 길도 있는 듯 주장하여, 소위 자신들을 '중도'라 하는데 말이 좋아 그렇지, 저들은 회색지대의 기회주의자 같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시길, ‘좁은 문’과 ‘넓은 문’ 이 둘밖에 없음을 확실히 하시고, 이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런데 늘 보면 어디 중간, 이쪽과 저쪽 그 사이에서 기회를 엿보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단언하건대 그런 자는 최소한 ‘좁은 문’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성경은 엄히 말씀하길,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서로는 벗할 수 없다. 죄악의 길에 서든지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길로 나아가든지 둘 중 하나뿐이다. 분명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를 항상 애매하게 받아 교회는 안 가면서 하나님은 믿는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사랑은 마치 몸이 먼저 아는 것 같이 누가 이르거나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몸살이 나서 사랑앓이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하실 때 ‘말씀에 순종하라’는 명령보다 사랑하라는 선언이 먼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 ‘사랑하고’ 즉 사랑하면 의당 ‘행하고 지킨다’는 것으로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는 일, 몸이 알아서 먼저 달려가고자 하는 일이 현재 우리의 마음이 가있는 곳이다. 마음이 닿은 곳에 관심과 열심도 따라간다. 관심과 열심에 따라 돈을 쓰고 시간을 들여 이를 즐거워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의 우선적인 결정과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밝히 알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일로 이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 곁의 우리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확장하게 한다. 이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
결국 이 모든 게 믿음의 일로 믿음은 곧 사랑이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 믿는다, 하는 것은 말씀을 보고 이를 행함으로 스스로도 숨길 수 없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다. 요즘 연말연시라 친구는 교회에서 하던 성경공부들을 쉬는가? 그러다보니 전에처럼 말씀을 묻거나 궁금해 하는 일이 뜸해졌다. 어쩌다 물으면 성경 읽을 시간이 없어서 묵상노트(?)라고 교회에서 나눠준 일일큐티 책 같은 것을 하루에 정해진 분량씩 읽는 정도인가보다. 그것을 보면 거기에 다 설명도 나와서 굳이 궁금한 것도 없다고 하니… 나는 그래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말씀을 직접 읽으라고 해봐도 그게 그렇게 안 되는가보다. 그래서 그런지 벌써 두어 달 넘게 성경에 대한 질문이 없다.
이를 반박하듯 오늘 말씀은 “그 모든 길로 행하며” 즉 우리의 행함을 요구하신다. 사랑은 표현이다. 몸이 먼저이면 마음은 따르게 돼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는 표현도 나타나게 돼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믿음 장이라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 에녹을 놓고 말씀하시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였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
어째서 에녹을 그리 표현하시는가 봤더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1-22).” 곧 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동행의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바울의 절규와 그 고백으로 봐도 반드시 ‘나를 쳐서’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사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일은 때로 내 뜻과 다를 때 나를 쳐 복종시킴으로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가 의합하지 않으면 둘이 같이 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좋을 때야 좋은데, 서로 틀어지면 거기까지다. 사람과 사람의 동행이란 일정한 시간 동안의 일로 평생 한결같기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암 3:3-4).” 본래 그런 것이라, 하나님과 동행하기란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기준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신 4:1).” 그러므로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5:31).” 이것으로 우리가 생과 죽음, 복과 화의 갈림길에서 누구와 어느 길로 동행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죽기 살기로 말씀부터 붙든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나는 나의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우선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시는 말씀 앞으로 나온다. 그렇지 않을 때 따르는 내용의 말씀에 주의하며 오늘 말씀의 확고한 증거를 기준으로 삼는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이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시 7:1).
주 앞에 엎드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6, 9-10).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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