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신 32:1-2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하늘과 땅을 향해 들으라고 외친다. 모세는 이 노래를 같은 민족에게 들려준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외친다. 그렇게 주의 음성으로 외쳐 이르기를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39).”
이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이를 온 성경이 한 목소리로 고한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시 89:11).
이를 알고 바랄 때,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7).” 하는 말씀으로 오늘의 나 역시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말씀 앞에 앉게 하신다. 이 말씀은 이사야 27장 9절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사 27:9).”
곧 우리가 살면서 죄로 인하여 되풀이 되는 불의에서 속함을 얻어야 하는 것은 불의가 속죄함을 얻고 그 죄악을 없애버린 열매로 우리가 드려져야 한다. 즉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그 백성들의 죄악이 속함을 얻는데, 그 결과는 우상 숭배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 놀라운 선언이 우리 영혼을 관통한다.
이는 성경의 바탕으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하신 것으로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2).” 결국 우리는 우리의 죄악으로 날마다 주의 언약을 깨고 산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3).”
이 놀라운 은혜가 오늘의 나로 살게 하는 것이다. 즉 내 안에 주의 법을 두셨다. 나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그의 백성이 된다. 성경은 이를 증거한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명으로 산다. 곧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4).”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곧 내 안에 예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나는 비록 보잘것없이 작을지라도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나로 ‘죄를 없이 하신다.’ 이를 오늘 말씀은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하심으로 죄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얻게 하시고자 하는 복된 은혜가 있음을 말한다. 스스로 내가 나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할 때 주는 나의 심령이 가난함으로 천국을 채우신다. 이를 알았고,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묵상하며(사 27:9), 결국 우리가 우상을 진멸할 때 비로소 불의와 죄가 속함을 받을 것을 알게 한다. 이를 감당하시는 이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성된 구원은 죄에서 우리를 단번에 속죄하심이다.
이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고 외친 후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하는 데서 이를 인정하게 한다. 곧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보면 오늘의 여러 사회적인 현상과 이를 논하고 외치는 자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자기 기준에 따른 것이라 저마다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느끼고 판단하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개개인의 죄의 범주 안에서 그 시선을 고정한다. 아이를 어찌 위로해야 할까? 하고 아내는 생각이 많았고, 나는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먼저 아이가 말하기 전에는 속으로 기도하며 그의 영혼을 주께 아뢰는 게 옳다고 하였다. 섣부른 이해와 판단과 위로가 외려 그 영혼을 더 상하게 할 수 있다. 곧 우리는 모두 상한 영혼으로 살아간다. 저마다의 사연과 그 유년의 기억들을 토대로 하여 성격이 형성되고 판단기준이 달라진다. 이때에 ‘우리는 말씀으로 산다’는 기본 명제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확신하고 믿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도 없다.
그렇듯 자기 신념이 강한 자는 위험하다. 스스로의 거짓으로 확신을 삼고 거짓으로 거짓을 더해 수레를 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하여 오늘의 이 모든 현상이 거짓에 거짓을 더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에,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5).
거짓의 특징은 자신조차 자신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 곧 우리가 주 앞에서조차 스스로를 확신할 것인가?
오늘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마지막 설교이면서 찬송으로 외쳐 가르치기를,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신 32:1-2).” 곧 세상 모든 만물이 주를 바람은 본능적인 것이라,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20).”
오늘 날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인가? 하고 한탄하기에 앞서 이 또한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인 것을 인정할 때,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 곧 오늘의 이 모든 것은 끝이 있다. 우리는 기어이 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이를 앎으로 우리는 더욱 주를 바란다. 오직 주만 의지한다.
그러므로 ‘복음과 택하심’은 어느 것이 먼저가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와 같은 진리는 우리가 아는 시간의 선상에서 먼저와 나중의 일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으로 함께 누리시고자 하실 때 우선적으로 이를 전제로 하셨다. 하여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시다. 주의 신실하심으로 오늘도 우리는 산다. 살면서 천국의 삶을 배운다.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의 안식을 교육받는다.
저마다의 형편과 사정이 다르고 그에 따른 고충과 환난의 정도가 다른 것 같으나 이는 모두 절대적인 것이어서 누가 더 딱하고 덜하고 하는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동시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곧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할 때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더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려하지 말고, 세상을 보고 세상을 알려하지 말아야 한다. 일련의 사태나 현상은 성경의 예언과 다를 게 없다. 주가 이루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민족으로 살면서 보였던 온갖 부정과 죄악도 산 교훈이다. 오늘의 현상도 하나님을 더욱 알고 바라는 데 있어 교재가 된다. 역사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그러하고, 개인적으로 그 개개의 삶에 나타나는 사연들도 그러하다. 성경은 이를 말씀하신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이는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음성이다. 곧 오늘에 있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심도 결국은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 우리로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도록,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하여 오늘도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그러므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오늘이라 일컫는 이 한 날의 여러 현상과 사건과 개개인의 어려움과 고난이 결국은 천국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 밑거름이 되고 우리 영혼을 주 앞에 바로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우리의 갈한 심령은 돈도 건강도 이 땅에서의 몇 년 더 사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였다. 하여 오늘 아침도 아이가 출근 전에 같이 나누길 바라며 성경 몇 구절을 물어왔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과 여러 인생의 조건이 더러는 불공평한 듯 누가 더 심하고 덜하고 한 것 같지만 우리 각각의 삶의 형편은 모두 은사이다! 은사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은혜의 선물’이다. 어떤 사람은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처럼 돋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있는 듯 없는 듯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의 예화에서 주님은 스무 편이 넘는 비유에서 딱 한 번 실명으로 이처럼 말씀하심은 그 이름에 단서가 있어서이다. 나사로란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것이다.
모든 은사는 이를 기준으로 한다. 할 때 이를 ‘여러 가지’로 나누어주신 데는 우리의 은사가 그만큼 다양성을 띄고 그 목적이 따로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다른 듯하다 해도 “성령은 같다.” 곧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두 하나의 은사뿐이다. 직분과 직임은 달라도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저마다의 어떤 의무를 수행한다. 개개인의 공명심으로 행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역사는 여러 가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우리는 저마다 그 맡은 바 사명을 다한다. 거지로 일생을 부자의 집 앞에서 자신의 헌데를 앓고 고통 가운데 엎드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고 살았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를 받음으로 충성할 때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는 주의 나라에서 영광의 자리에 앉았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어진다. 이는 칼빈의 표현처럼 불가항력적인 은혜다.
그 목적은 하나,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로 주의 백성으로 주의 나라에서 주와 같이 영광을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그리하신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드러낸다. 우리로 진리를 나타내려하심인데,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곧 성령은 인격자로서 우리 각자의 은사를 주시고, 그것이 더러는 곤경에 처하는 일이나 세상에서 갈채를 받는 일이나 이 모두는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나는 아이와 조금 이따 7시 반에 나눌 말씀을 준비하고, 앞서 오늘 하루의 시작을 눈을 뜨고 교회로 올라와 말씀 앞에 앉히심으로 시작한다. 이는 다 주가 이루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3-4).” 말씀이 오늘도 나를 살게 하신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6).” 이를 붙들고 서서 말씀으로 엎드리며,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9:1-2).
오늘 하루도 천국에서의 천 날 만 날 같이 주의 인자하심이 충만하심으로,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13, 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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