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24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하나님의 말씀은 헛됨이 없으시다.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밝히 알고 기억하여 후손들에게 증표를 세우게 하신다.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3).”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딛고 들어설 때 범람하던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며 마른 땅을 건넜다. 온 이스라엘은 무사히 요단을 건넜고 이를 기념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3:17).”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서 있었던 그곳에서 열 두 돌을 취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은 요단 강 도하를 기념하는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증거를 살면서 삶으로 체험한 자의 기억은 또렷하다. 그러나 곧 시간은 흐르고 여러 또 다른 일에 뒤섞여 살다보면 이를 모르고 태어난 세대는 물론 그 다음 세대들은 이 의미를 잊을 것이다. 하여 오늘 말씀은 요단 가운데서 각 지파의 한 사람씩 돌을 취하므로 돌 열둘을 가져다가 각기 그 처소에 둘 것을 명하신다. 이렇게 하여 그들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연합된 민족임을 잊지 않고 늘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또한 후일에 어떤 분열과 갈등이 왔을 때 이를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게 하신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 33:2).”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이른 새벽 교회로 나오는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눈이 오면 사방이 고요하다. 나는 더러 이와 같은 정적을 두려워한다. 반쯤 왔을 때 순식간에 도로가 하얗게 덮였고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휘날렸다. 이러한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의 이름을 되뇌어 부르는 것이다. 교회 안에 늘 앉는 자리에서 바라보던 십자가를 보면서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말씀이 주는 위로를 구한다.
실은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어제는 노트북을 챙겨서 갔다. 오늘내일은 아침에 집에서 묵상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기억하는 일이라, 늘 눈을 뜨는 시간에 깨서 창밖을 먼저 살피고 평소대로 옷을 입고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왔다. 집 앞 도로는 멀쩡했고 제설이 잘 돼, 눈발도 바람에 성겨 가벼웠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이 퍼붓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도로를 하얗게 덮는 것이다. 늘 그렇듯 ‘이래도 갈래?’ 하는 것처럼 반쯤 이르렀을 때는 돌아가기도, 계속 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흔들렸다. 고작 이런 일에서도 갈등하고 본연의 할 일을 미루고자 한다.
하물며 당장은 요단을 마른 땅으로 건너온 저들이 곧 있어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그 의미는 퇴색할 것을 알고 이와 같이 명하신다. 이에 성경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먼저는 이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 알려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하여 일상 어느 때에라도 이를 기억하게 해야 한다. 이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해서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라고 하신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문에도 기록하게 하신다.
이는 마치 내가 주의 이름을 되뇌며 아뢰고 또 구하는 것과 같이, 이처럼 말씀을 손으로도 쓰고 기억하며 읊조리어 미간을 접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에 오늘 저들이 ‘유숙할 그곳’은 길갈이었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수 4:9).” 곧 그곳은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19).”
‘길갈’은 훗날에 이스라엘의 정치, 군사, 종교적으로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삿 2:1).” 이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처음 유숙한 곳으로,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 11:14-15).”
길갈의 의의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 5:9).” 곧 ‘굴리다’란 뜻을 가진 동사로 이 명칭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함으로써 과거 애굽에서 겪은 노예의 수치를 모두 굴려버렸다는 뜻이다. 요단강 언덕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진을 친 첫 번째 숙영지이자,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였다.
따라서 가나안 정복은 물론 사사 시대 및 초기 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 길갈은 이스라엘의 정치, 군사, 종교적 중심지로 특히 중요한 성읍이 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결국 오늘의 이 길갈은 주전 1406년 1월 10일로 출애굽한 시점에서 40년에서 5일이 부족한 날로,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 14:34).”
하고 말씀하신 후 정확히 40년이 지난 오늘 저들이 그곳에서 첫 유숙하여 야영지를 꾸렸던 장소이다. 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앞서 500여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곳으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3, 16).”
하여 500이 흐른 때에 저들은 결국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길갈에서 첫 날을 유숙하였다. 이는 후에 우리가 확신하는 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곧 하나님은 우리로 이 모든 일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여 잊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앞서 3장에서 보았듯이 4장은 3장과 함께 요단강을 도하하고 이에 따른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게 요단을 건넌 후 이를 기념하여 요단강 마른 땅 한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기념하게 하신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곳이 ‘길갈’이었다. 하나님은 요단의 기적을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신다. 또한 그것을 기념하는 이 돌은 요단을 도하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앞서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 보내며 그의 창에 줄을 달아 내림으로 언약을 삼은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은 그때마다 증표를 두심으로 이를 잊지 않게 하셨다. 훗날에 후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을 때,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6-7).”
결국 이를 세우게 하신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은 6-7절 말씀에서 언급하였고, 22-23절에서도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하고 다시 강조한다. 더욱이 마지막 24절에서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하고 그 의도를 분명히 하신다.
곧 모든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에 따른 이러한 기사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서로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생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한다. 곧 추상적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실제의 생생한 일들로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으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와 같은 역사가 거듭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요단을 건넌 기쁨은 모세 오경의 중심축이다. 저의 주제는 하나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저들 백성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였다(창 12:1-7). 이어 이삭(26:2, 4) 그리고 야곱에게도 전가되었던 약속이다(28:3-4, 13-15). 이 약속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임재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요단강 ‘도하의 의의’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5).”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실 것임을 이루신 증표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17).” 이 일로 여호수아도 모세와 같이 백성들의 눈에 크게 보이게끔 하셨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수 4:14).”
요단은 북쪽 헤르몬 산에서 출발하여 전 국토를 가로질러 사해까지 흐르는 큰 낙차를 가진 길고 중요한 물줄기다. 팔레스틴에서 가장 길고 일직선상의 그 길이만 약 13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이 강의 굴곡을 더하면 무려 400킬로미터에 이른다. 이 요단 강은 지류로서 두 개의 주요 강을 거느리고 있다. 하나는 곧 야르묵 강과 또 하나는 얍복 강으로, 야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창 32:22).” 야곱은 홀로 남아 하나님과 씨름하여 기도한 곳이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24).” 그곳에서 결국 이스라엘이라 이름하심을 얻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를 살피다보면 오늘 나의 이 사소한 하루의 일과가 별 거 아닌 것 같다가도, 하나님 앞에서의 놀라운 역사가 될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소한 날은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휴니 공휴일이니 하는 표현으로 그저 그만인 날은 없다. 물론 교회로 올라와 새벽 시간을 지키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나의 사소한 일일 수 있으나, 나는 나의 이 사소함으로 한 날의 수고와 사명을 다한다. 가끔씩 결연하게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 시간, 이 곳’에 의미를 부여함으로 나에게 더하신 사명을 되새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시 102:27-28).
곧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우리로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를 기억하고 이를 확신함으로 오늘도 요단을 건너는 것과 같이 불가능할 것 같은 여러 현실에서 기어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보게 하신다. 우리로 그 증인이 되어 이를 기념하고 기록하여 후대에 알리고자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7).”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신다. 요단강 도하 사건이 단지 그때의 일시적인 기적이 아니고, 저들만의 체험이 아니라,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동일하신 것을 알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8).” 이는 오늘과 같이 어지러운 시국에 또는 저마다의 사연과 어쩔 수 없는 환경을 탓하고 있을 때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9).”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 4:22).” 우린 이를 말씀을 통해 확신하고, 삶으로 체험하며, 이어지는 세대에 전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4).” 그런 우리가 사회적 이슈에 휘둘리며 국가와 민족을 그 이상의 가치로 여겨 세상에 속한 자들처럼 휩쓸리지 말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날 같이 어지러운 때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15:1).
시편은 하나의 명제를 던졌다. 누가 주의 장막에 설 것인가? 대한민국이 혹은 미국이 그러하듯 자국주의에 난봉질을 하듯 세상을 석권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한다 한들? 과연 이 땅의 나라로 모세나 아브라함이 그 이름을 떨치고 그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아뢰기를,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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