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 5:9, 15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다. 이는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수 5:5).” 그 나온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가나안을 거부함으로 광야에서 공격당해 죽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다시 언약의 백성들임을 표하게 하신다. 이에 우리는 이곳을 길갈이라 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
‘길갈’은 ‘굴리다’란 뜻으로 애굽에서 나온 후 ‘노예의 수치’를 모두 ‘굴려버렸다’는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요단강 언덕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진(陣)을 친 숙영지이자, 가나안 정복을 위한 교두보였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되는 가나안 정복은 물론 사사시대 이후 초기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길갈은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저들이 당한 ‘애굽의 수치’의 수치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다를 게 없다. 이는 세상의 노예처럼 그와 같은 신분으로 먹고 사는데 전전긍긍하여 세상에 굴종한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다고 하면서 온갖 수모나 불명예를 감수하면서도 돈의 노예, 친분의 노예, 어느 조직의 노예, 자신의 신념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이 그러한 애굽에서의 수모를 벗어나 출애굽한 후에도 광야에서 이 지경의 삶을 사는 것도 여전한 애굽의 수치라 하겠다.
저들이 광야에서 유리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애굽을 그리워하고 부풀려서 그 시절을 회상하였다. 이에 저들의 방황은 애굽에게 있어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들을 죽이려고 인도해 내었다’는 조롱거리였다. 그와 같이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불신과 불평에 사로잡혀 산다. 청렴과 결백은커녕 부정과 탈세를 일삼는다. 사회로부터 교회의 신뢰도가 바닥을 친다. 어느 통계에서와 같이 기독교가 불교나 천주교보다 못하다.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이다. 이에 모세는 주께 구하였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12).”
이와 같이 오늘도 우리의 현실에서 여전한 것은 ‘애굽에서의 수치’가 되풀이 되는 것을 본다. 남을 비난하고 힐책하는 것으로 교회가 나서서 그렇듯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일쑤다. 자신들을 돌아보아 자중하고 근신하여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보다, 뭐 그렇게들 세상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정치에 휘말리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극우’니 ‘극좌’니 하는 소릴 듣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이번 소요에 어느 교회 전도사니, 목사니 하는 이름들로 불리며 언급되는 이들의 막말과 선동으로 교회가 고스란히 ‘애굽의 수치’를 당하고 있다.
이를 오늘 길갈에서 ‘굴러가게 하였다.’ 즉 오늘을 살면서 겪는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의 비난을 멀리 굴려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미 요단을 건넜다! ‘약속의 땅’에서 산다. 광야 40년의 배회와 유리에서도 놓여났다. 더는 떠돌이처럼 애굽을 그리워하고 지나치는 족속들의 땅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 ‘가나안의 길갈’은 그런 의미다. 여기서 다시 언약을 상기하며 그에 따른 징표인 할례를 받음으로 그동안의 모멸과 수치와 비루함을 굴려버려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 처음 행한 것이 할례였다는 데서 새삼 우리의 다짐과 각오를 돌아보게 된다. 할례는 육적인 조건을 버리고 구원의 방편으로 주 앞에 자신을 바로 하는 것이다. 이에 세례요한은 이르되,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즉 우리가 관념적으로 믿고 막연하게 가지고 사는 구원의 확신은 허깨비 같다. 안 믿는 자들도 서로 말하길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하고 죽은 이의 명복을 빈다. 저들도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님 없이도 위로하고 격려한다. 희망을 준다.
곧 할례란 단지 형식적인 종교의식이 아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롬 2:25-26).” 기껏 믿는 자로 사는 듯 자신의 소속을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면서 도리어 안 믿는 자들보다 못한 자기신념과 확신을 믿음으로 둔갑시켜,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이단과 사이비단체가 되어 저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이에 바울은 개탄스러워하듯,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8-29).”
결국 우리의 겉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다.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애굽과 같이 세상은 온통 겉사람을 가꾸는 데 혈안이 되어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퍼부으며 열심을 다하면서 하루에 단 얼마, 그 잠깐의 시간도 우리 영혼을 위하여 우리는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이에 일갈하기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교인이 다 신자는 아니다. 신자가 다 제자는 아니다. 제자가 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다.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다. 저들이 오늘 할례를 행하고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린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수 5:8).” 당장 가나안에 들어와 출격을 앞두고 있는데 왜 굳이 이런 의식으로 괴로움을 자처해야 할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겠다. 최소한 3일에서 일주일은 고통 중에 낫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믿음의 실천은 정작 고통을 지나면서 그 마음을 굳게 할 때 발휘가 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2-23).”
그런 거 보면 요즘은 자신의 인지도가 이목을 끌고, 사람들의 관심이 힘이 되고 권세가 된다. 다들 저마다의 계정을 가지고 페이스북이나 유뷰브니 하는 데서 활동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매일 이 일을 본업으로 하여 돈을 버는 기획사도 생겨났다. 이번에 보니까 왜들 저렇게 기를 쓰고 핸드폰으로 찍고 카메라를 들고 설치나 했더니 계엄 이후 수억을 벌었네, 일주일에 몇 천의 수익을 올리네, 하는 보도를 보면서 놀랍기도 하다. 하긴 이처럼 글을 쓰고 이를 유료화하여 조회 수나 가입자 수에 따라 얼마의 수입이 생겨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대가 그러하니 그것을 옳고 그르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말이나 글에는 가식이 섞이기 마련이다. 누가 보는 자리에서 그것도 소위 남들이 우러러보는 위치라면 더욱이나 위선적이고 외식하는 자로 설 수밖에 없다. 나야 늘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럴 위치도 정도도 아니어서 그렇지 나 역시 수백 명 수천 명이 주목하고 저들이 나를 주목한다면 어찌 아니 의식할 수 있겠나?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관심이 서로을 병들게 할 수 있다. 일순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바울은 기겁을 하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물리쳤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하며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따르며 경배하려는 제사를 강력히 거절했다.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성정(性情)이 같다는 것은 동일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다. 우리가 저들로부터 우러러보이며 존경할 대상이 아님을 확실히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요즘은 권력이고 돈이 되는 세상이라,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는 이것을 실력이라 하고 권세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길갈에서의 우리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심에 감사할 뿐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사 3:8).” 곧 어제도 이사야 30장 말씀을 토대로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이와 같은 경고의 음성을 들었다. 곧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30:1).” 한 마디로 일련의 시국과 그에 따른 교회들의 참전(?)과 선봉에 서는 일은 폐역하다. 나는 결코 어느 쪽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그 중심을 바로 잡으려 할 따름이다.
그럼 어째서들 여전한가?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7).” 세상을 딛고 사는 동안 교회가 헛되고 무익한 세상적인 정치이념과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이를 마치 하나님의 뜻으로 운운하며 앞장서는 일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데 있어 미국이 뭐? 대한민국이 왜? 기독교를 국교로 하던 영국에서 벗어나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가 미국이지 않던가? 그것이 고작 몇 백 년이 지나면서 오늘에는 자국우선주의로 온갖 잡신과 비화밀교의 나라가 되었고, 광적인 기독교우월주의자들로 활개 치고 있다. 이스라엘은 어떻고?
하나님은 원가지도 잘라 쳐냈는데, 하물며 접붙임한 돌감람나무 같은 우리 민족인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이는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 하여 오늘의 이스라엘도 어떠한지? 저들 가운데 남은 자, 숨겨 놓은 자들을 돌이키실 때가 곧 오나니, 우리의 뿌리가 성경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
하물며 이 대한민국 우리나라가 왜? 우리가 여느 나라보다 선하고 의로움으로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임하셨는가? 아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우리는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시는 말씀에서 자중하고 또한 겸손해야 한다. 자신들을 따르고 지지하는 몇몇의 대중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이름까지 망령되이 불러대며 미친 소릴 해대는 자 앞에서 고개 숙이고 악수라도 한 번 하려고 기를 쓰는 우상숭배 같은 형국을 보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2-13).”
하여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애굽에서 잠자는 라합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하나님이 어떠하신가를 들었고, 알았고, 하여 정탐꾼을 숨겨주며 하나님께 구원을 의탁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주를 바랄 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 30:26).” 이때에 오늘 말씀은 외친다.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이와 같은 말씀은 모세도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오늘 주의 사자가 나타나 여호수아 앞에 서서 저의 신을 벗긴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여기서 여호수아가 받는 소명은 앞서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았던 소명과 같다.
이와 같은 소명은 오늘 우리가 받은 소명과도 같다. 그러니 오늘 날 종교지도자들, 교회 목사나 장로라는 사람들이 바른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 입장이 성경적이지 못하면, 자신을 쳐 복종시킴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은 사명으로 길갈에서의 할례와 같다. 이를 다하지 못하면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되겠나?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 14:8).”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이에 오늘도, 매순간에 길갈에 서야 한다. 언약의 증표로 기다리며 대비해야 한다. 이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하실 때, 우리는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엎드려서 구하고 바라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1-3).
결국,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8-9,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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