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수 6:16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여리고는 사해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요단에서 서쪽으로 9킬로미터, 예루살렘 동북 방면으로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였다. 여리고 성의 넓이는 대략 8에이커(약 32평방킬로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므깃도가 14에이커, 라기스가 18에이커, 하솔이 200에이커라고 하니 저들에 비해 여리고는 작은 도시국가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의 평균 도시 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성읍의 규모로만 보면 여리고성은 매우 컸던 편이다.
여리고 지역은 좋은 샘들을 가진 오아시스 지대이다. 일찍부터 개발된 고대 도성에서 일명 ‘종려의 성읍’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신 34:3).” 그리고 요단 대평원 서부에 위치하고 있어 여리고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여 방어 거점으로 용이하였다. 그처럼 군사 요충지일 뿐 아니라,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였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남북 연합을 미연에 차단하는 데 있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일은 가나안의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여리고성은 그만큼 거의 공격 불가능한 천연 요새였다고 하겠다.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용이했다. 그에 따라 성 밖으로 3-4미터 높이의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을 뿐 아니라, 본성의 중앙 벽과 약 35도 각도로 경사지에 만들어서 더욱 가파르고 미끄러운 경사지 그 자체로 방어진지가 구축되는 셈이다. 곧 이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신들에게 무너뜨리는 결과여서 자살 행위와 다를 게 없었다. 이에 여리고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마냥 버티는 작전으로도 충분히 그 성을 방어해내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수 6:1).” 그렇듯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별다른 전술적인 공격이 아니고는 저들이 빗장을 질러 잠근 성을 쳐들어가기는 불가능했다. 이에 흐르는 요단강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은 그 성을 포위하여 하루에 한 번씩 돌게 하셨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3).” 그러는 동안 성안의 백성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나님의 전술에 따라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6).” 주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행하였다. 이를 칠일 동안 그리하였는데,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4-5).”
그러는 동안 어찌 그 마음에 의구심이 들지 않았겠나? 이 견고한 성을 함락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전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법도 하다.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다 불평과 조롱의 말도 나올 게 분명하다. 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10).” 저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는 우리가 주의 일을 행함에 있어 필연적인 조치이기도 하다. 우리 입의 말이란 게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이 제멋대로서 한 번 열리면 말은 말을 보태고 그 안에 의미를 더하면서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일련의 사태에서도 저마다의 생각과 그 관점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말이란 게 그렇듯 하다보면 거칠 게 없는 바람 같다. 멋대로 흩어지고 더해져 작은 소요가 큰 파동이 되어 변혁을 이루기도 한다. 말에 말이 더해질 때 한 세계가 건설되었다 무너지는 일은 순식간의 일이다.
오늘 말씀도 그리하여,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수 6:10).”
여기서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한다. 곧 저들이 성을 돌 동안에는 일체 ‘완전한 침묵’을 지시하였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곧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3).”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말에 신중하여 자신의 세 치 혀를 다스리는 일에 주의해야 하는가를 집중할 수 있다. 이는 말을 않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자신이 떠들면 자신에게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지독한 병은 넘치는 말에 있다. 아무리 정치인들을 말쟁이들이라 하지만 어떠한 사안을 두고 양쪽 진영을 대표하는 패널들이 마주앉아 말에 말을 더할 때 정작 그 본질은 사라지고 엉뚱한 소리로 궤변이 난무할 때가 많다. 그와 같이 우리의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말에 말이 더해질 때 하나님의 뜻은 희미해진다. 누구의 말에 의존하여 말에 말이 보태어져 처음 말한 의도와도 상관없는 말로 씨름하기 일쑤다. 서로의 다툼도 하다보면 그와 같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함구령을 내렸다. 이는 ‘거룩한 나팔 소리를 보다 주의 깊게 듣고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지껄이고 떠들어대는 동안 정작 들어야 하는 소리나 놓치지 말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 묻히기 마련이다.
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이를 듣고 크게 소리 질러야 한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4-5).”
결국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의 조건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다. 저들이 성문을 굳게 닫았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나름의 방어전선을 구축한 것일 텐데,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궁극적으로 우리가 저마다 인생을 설계하고 의도한 대로 산다고 하나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저마다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는 주께서 이미 충분히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하심을 나타내시고 계시다. 이를 마치 없어진 일로 치부하여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산다한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때가 이르리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성경은 일관되게 전하신다.
여기서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순종이다. 더러는 납득이 안 되고 말이 안 되는 일 같아도 그렇게 애굽에서 나왔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밟고 건넜으며,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삶 하나하나 어느 것 하나도 허튼 게 없이 주의 도우심으로 모든 게 안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단을 건널 때도, 이제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도 우리의 할 일은 오직 하나 순종뿐이다. 순종이란 온전히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우리가 주 앞에 설 때까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우리에게 있는 것, 오늘도 이와 같이 말씀으로 나를 붙들어 주 앞에 세우고 좌고우면하지 않을 것은 순종함으로 올곧은 믿음으로밖에는 없다. 다윗이 그러하여 말도 안 되는 상대 골리앗에게 달려가며 당당히 외쳤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그리하여 고라의 자손들은 깨달았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시 44:6-7).
이에,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호 1:7).”
우리의 최대 무기는 순종이다. 우리의 최대 방어는 나의 말을 거두고 침묵 가운데 가만히 주를 바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신다. 우리 나름의 방책을 보란 듯이 거슬러 역사하신다.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 더 잘 사는 것 같다. 뭘 해도 잘 풀린다. 믿는 자들 중에서도 적당히 또는 나름의 신념으로 믿는 자들이 그와 그 자손들도 복이 넘치는 것 같다. 누가 결혼한다며 자식과 함께 인사를 왔다. 자식들이 교회를 안 다니고 저들이 데려온 짝들이 믿거나 안 믿거나 또는 무엇을 믿든지 개의치 않는다. 서로 좋은 것을 복으로 놓고 즐거워한다. 그러할 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2-3).
사람으로 사는 동안 어찌 저들이 부럽지 않겠나? 딸애 친구 아무개도 결국 안 믿는 가정에 안 믿는 아이와 결혼을 했다. 같은 사역자의 자녀여서 내심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 하고 신경이 쓰인다. 나름은 시집을 잘 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변 어디 아파트를 사주고, 주식을 연습하라며 1억의 돈을 내주고, 이번에 아이를 출산하였다고 크고 비싼 차로 바꾸어주었다고 한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어디 좋은 데로 놀러가고, 얼마 전에는 이를 혼자 데리고 다니기 불편하겠다며 무슨 차를 따로 더 사줬다고 하였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주일은 잘 지키는지, 결혼하기 전에 약속했다더니 교회는 다니는지?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3).
우리가 살면서 오늘처럼 이 터무니없는 사태에서 침묵하며 주의 뜻을 살피기란 쉽지 않다. 같이 떠들고 거들어 너는 어느 쪽이냐고 할 때에 나의 말로 떠들어대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침묵하고 성벽돌기나 범람한 요단강에 발을 딛고 건너야 하는 일이나… 이를 묵묵히 순종하여 가만히 있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보면 내 생각에 못 이겨 툴툴거리는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곧 일련의 사태나 상황 속에서 더러는 내 곁의 ‘적당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다보면 ‘이 길이 맞나?’ 싶을 때가 있는데, 시편은 결국 찬송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92:5-6).
결국 오늘을 사는 동안 “나아가라” 하실 때 따르고,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하실 때 입을 다물고,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수 6:27).” 그리하여 오늘도 시편을 살고 시편의 음성으로 고한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7:1).
그러할 때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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