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전봉석 2025. 1. 31. 05:21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수 7:26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 18:30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이스라엘은 방자하였다. 아간은 전리품으로 여겨 훔친 것을 자신의 마당에 묻었다. 백성들은 다음 점령에 따른 아이성을 가벼이 여겼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수 7:3).”

 

교만은 일순간의 일이다. ‘바친 물건’으로 인하여 범죄 하였다. 아이성을 실패한 원인이 ‘바친 물건’으로 인한 범죄임을 알게 한다. 여리고성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가나안의 첫 열매이다. 이에 따른 하나님의 구별되심은 분명하였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6: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엄한 경고에도 ‘아간’의 행위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패역이다. 곧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범죄임을 알게 해준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7:11).”

 

탐욕은 교만의 눈이다. 어두워져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여겨 전리품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하나님은 엄히 명하신 바 있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6:18-19).”

 

이를 훔친 아간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투에 이은 가나안에서의 두 번째 전투 아이성에서 패배하였다. 아이성 전투를 패배하고(7:1-5), 아간의 범죄를 밝혀내고(6-15), 밝혀진 아간의 죄상으로 저를 처벌(16-25)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다. 아이성에서 패배하며 36명의 군사가 죽었다. 처음으로 큰 참패를 겪은 것이다. 이러한 참패 원인이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음이란 사실에 분노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간의 ‘그럴 수 있는 범죄’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무슨 일에서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범죄는 아간 한 사람이 했지만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것은 저들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앞서 묵상한 것 같이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아이성은 그 크기나 적군의 숫자로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여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고 자신들이 결정한다(7:3).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처럼 직접적으로 아간과 같이 범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들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죄이다. 교만은 크고 작은 범주의 일이 아니다. 그 자체로 죄이다. 이로 인하여 36명이 목숨을 잃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간의 범죄이나 엄밀하게는 여호수아의 경솔함도 책임이 있다.

 

가나안에서의 전투는 모든 게 성전(聖戰)이다. 우리가 출애굽을 한 것은 멸망의 도성을 떠나는 것과 같다. 세상과의 여러 인연과 그에 따르던 생활 습관과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다. 이에 따른 광야 생활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여정이다. 신앙의 훈련기라 하겠다. 더러는 원망하고 옛날의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옛 자아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으로 전적인 의뢰와 맡김의 삶이다. 이제부터의 전투나 모든 생활은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리고를 승리로 이끌고 이에 도취되었다. 다음 아이성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았다. 그들이 출전에 앞서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따랐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사에 주를 바라고 주께 묻고,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은 믿는 자로서 기본적인 자세이다. 비록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드러날 것을 믿으면서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아이성은 벧엘 동남쪽 약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인구 만 이천명의 작은 성이기는 했다.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8:25).” 이러한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은 간단하다. 먼저는 아간의 범죄다(7:20-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널 수 있도록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이어 견고한 여리고성을 단 한 사람도 인명 피해 없이 함락시키게 하셨다. 그런 가운데 아간의 죄는 개인의 일탈이라 할 수 없다. 백성들 대부분이 우쭐했나보다.

 

보면 우리의 교만은 일순간이 인다.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고, 분명히 아간의 죄악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이성 전투의 실패 원인이 되었지만 그 같은 범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은혜란 값없이 더하시는 것이라, 자칫 우연이나 어쩌다 그리 된 사소한 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누가 신앙에 있어 자기 안에 은혜가 없는 것을 두고 이상히 여기는데 대화하다보면 일상의 소소한 일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평소 자신의 생활 습관과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그런 일’로 여기며 여전히 자신의 활동반경에 두고 사는 게 자주 드러난다. 가령 안 믿는 친구들과의 일 년에 몇 차례, 정해진 술자리를 소중히 여긴다. 저의 말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줄어든다는 데서 이와 같은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또한 형제간의 안 믿는 가족에 대한 존중과 예의도 한 몫 한다. 그러다보니 명절 때나 기일 때 제사지내는 일을 끊지 못한다. 내가 보기엔 저가 강력하게 믿음으로 추진하면 안 믿는 형님도 순순히 따를 것 같은데 저는 그러한 불편함(?)을 원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사사로운 습관이다. 자식들과 가벼운 소주 한 잔 정도를 즐거움으로 삼는다. 저녁에 잠이 안 올 때 술 한 잔 하는 정도로 이를 결코 경계하지 않는다.

 

교만은 스펙트럼이 무한정하다. 무겁고 크게 느껴지는 게 있고 대수롭지 않고 적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교만은 결코 크고 작은 범주로 나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어쩌면 너무 가벼이 여긴다. 소중한 것을 잊고는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면 왠지 거부감도 든다. 그게 무슨 은혜인가? 하는 반감도 생긴다.

 

은혜는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에 비례한다. 이를 시편은 여러 편에서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이사야의 기록에서처럼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기도 하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하여,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34:18, 51:17).

 

고로 우리 삶에서의 불순종은 아주 사소한 데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퍼져간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8).” 그런데도 우리는 주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기호나 세상 즐거움을 버릴 수 없다. 안 믿는 자들과의 교류나 정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에,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이와 같은 말씀을 치부하거나 강한 거부감을 들어 자신은 예외로 둔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함몰된 자는 말씀으로의 경고에는 귀를 닫고 눈을 감는다. 저마다 말씀을 운운하지만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 할 뿐이다. 정작 말씀에 자신을 맞추려하지는 않고 말이다. 이와 같은 역행이 오래된 신자들의 단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아이와 주변에 묵상을 자주 강조하는 것은 이와 같은 못된 습성에 물들지 않기 위함이다. 말씀에 나를 맞출 때, 더러는 강한 거부감도 든다. 이를 누구는 유별나다고 한다. 그럴수록 시편은,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31:22).

 

우리의 한 날이 그날마다 간절한 것이 복이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의 간절함을 나는 사랑한다. 적당하여서 그저 견딜만할 때는 간절함이라는 게 ‘그 정도까지’로 스스로가 판단하기를 ‘됐다’ 싶은 것이다. 마치 여리고성을 함락하고는 이를 마치 자신들이 이루어낸 것으로 여겼는지, 아이성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주의 뜻을 묻지도 않았고 어떤 말씀도 받지도 않았다. 이는 여호수아의 경솔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뒤 저의 기도에서도 약간은 모세의 겸손함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수 7:7).”

 

마치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고 따지는 듯하다. 어디 한 마디 자신들의 죄악을 구하고 용서를 비는 내용이 없다. 여기서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우선하여 주의 뜻을 구하고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복종시키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초대교회에 사역자를 사역지로 보내는 데 있어 그 모든 결정에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행 15:2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게 귀함이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31:3, 79:9).

 

무슨 일의 결정에 앞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뜻에 자신을 맞추어, 말씀으로 순종함으로 행해야 한다. 이는 그만큼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함과 연관이 있는데, 우리의 간절함은 자신의 죄를 주 앞에 아뢰고 그와 같은 패역함으로 절규하는 마음과 일치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3:25, 44:22).”

 

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이번 주 아이와의 성경공부를 오늘 아이의 출근시간 전으로 맞추었다. 아이가 보내온 본문은,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 아이는 성경을 읽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턱을 괴고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고 묵상하다 질문으로 돌린다.

 

이는 먼저 앞에 두 구절에서부터 봐야 한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1-22).” 즉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함이고,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하는 것은 구주 예수 한 사람의 대속으로 인함이다. 곧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에, 오늘 아이의 물음은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 할 때 이는 주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이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면 우리들로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 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1:30).” 예수의 다음 차례로 우리들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7:22-23).”

 

하여,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15:24).” 하심은 곧 ‘마지막 부활’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을 일컫는 것으로, 우리의 구속자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모든 악한 권세들을 멸하느라고 잡았던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는 뜻이다. 곧 그가 재림하실 때에 모든 악한 권세들도 멸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와 같이 아이와 같이 나눌 말씀까지 준비하고, 오늘도 한 날의 시작을 아침을 깨워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나를 붙드는 것이어서…. 오늘의 이 ‘아골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것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하는 나의 고백과 함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

 

하는 고백으로 이어져,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3).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고 어쩔 수 없는 아골 골짜기라 해도,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19).

 

이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29).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