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수 11:15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22:10
우리의 승리는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곧 우리가 오늘도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명령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여러 사람들, 족속들에 관하여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시며 먼저 두 가지를 분명히 하신다.
삼가 저들과 언약하여 올무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 또 하나는 저들의 우상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고 그 앞에 절하지 말라는 것. 이는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를 일러 ‘질투의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리고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곧 서로 청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고 딸과 아들을 며느리나 사위로 삼지 말 것은 그들의 신을 음란하게 섬길까 하여 그리하지 말라고 하셨다(출 34:11-16).
이를 하나님은 재차 강조하셨다. 즉 ‘가나안 인들과 언약하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며, 그들과 혼인하지 말 것’을 명령하여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민 33:52-53).” 이는 결코 침략이 아니라 본래의 소유를 되찾는 것이다.
그런 뒤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54).” 하고 이를 어찌 분배할 것인지를 알게 하셨고, 다시 일러 이르시길,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55-56).”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단지 우려나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리 행하지 않음으로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하심과 같이 실제 우리 생활의 여러 어려움이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를 모세에게 이르셨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일러,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것을 준행하였음을 알린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수 11:1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고, 이를 준행하여 차질 없이 실천으로 옮기는 삶은 귀하다. 믿는 자로 살면서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면 이상하다. 그들의 사고와 문화를 따르고 수용하여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상관하지 않을 때나 가능하다. 단지 저들의 문화로 받아서 이를 서로 인정한다는 주장은 허울뿐이다. 우리 생활은 어느 순간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물든다.
이에 말씀을 받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하는 오늘 여호수아의 준행을 눈여겨보게 된다. 순종 없는 예배를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암 5:21-22).” 세상 사람들의 주장과 그 이치에 같이 동조하여 상식을 운운하며 사는 일은 자칫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때 어김없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 같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오늘 날의 여러 주장과 각기 다른 말들 가운데 궤변을 파악하고 저들의 요사한 말을 주의해야 한다. 자신들이 말하면서 자신들이 모르면 오히려 이해는 가겠는데, 어떤 이는 판사였고 검사였고 변호사였던 사람들이 설마 법을 몰라서 하는 소릴까…?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 더하는 말들이 궤변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실 때 더욱 더 강퍅해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련의 사태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순간 오히려 감사하였다. 저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하고 희한한 저의 난동에 안도하였다. 먼저는 온갖 사술과 무속이 난무하던 것이 늘 마음에 어려웠다. 또한 너무 빤한 거짓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를 두둔하고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치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는 계엄선포와 실제 헬기가 날아들고 무장병력이 국회에 난입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극적인 역사를 느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들 강퍅하여 이제는 서로가 자기편이랄 수 있는 쪽을 물어뜯는 것을 보면서 그저 놀랍기만 하다.
본래 악이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악함도 같이 준동하게 돼 있다. 마치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11:10).” 그런 가운데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신기하지?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대하 28:22-23).”
그럴 때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는 위기가 곧 최고의 구원이 된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련의 사태나 앞서 그 유구한 역사의 현장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신 말씀 앞에서 무릎을 탁, 치면서 깨닫게 된다. 곧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10-11).” 결국은 성경에 다 답이 있다.
오늘 여호수아는 모세가 명한 대로 이를 다 준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이에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심으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결국 오늘의 여러 현상과 그에 따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논쟁과 주장이 자신들의 올무가 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은 많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이르시길,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13).”
결국 우리는 우리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해야 한다. 악인들의 악함은 저들의 일이다. 세상이 세상다운 것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주를 멀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이를 의식하여, 믿는 자들의 진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 하여 시인은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나의 대적들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3:1, 119:157).
오히려 먹구름이 잔뜩 낄 때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알듯 세상이 아둔함을 볼 때 이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볼 수 있다. 곧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하심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이에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신 20:16).” 이와 같은 말씀을 잔인하다는 식으로 받으면 안 된다.
흔히 ‘그럴 수 있지…’ 하고 여지를 두는 것에서 탈이 나게 돼 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그래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성은 한 번의 예외가 의당 당연한 것처럼 똬리를 틀기 마련이다. 무슨 관성에 따른 것인지 그저 그럴 수 있지, 하고 가볍게 여겼던 일이 어느 순간에는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주객이 바뀌는 것을 자주 본다. 오늘 말씀도 이에 분명히 명령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수 11:15).” 이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에이, 설마… 하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우리 스스로의 허용함에 대하여,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악은 어찌 됐든 악이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저 아닌 걸 자꾸 이런저런 말로 나름 합리화한다고 해서 죄가 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가나안 중부지역을 점령하고(6-8장), 남부지역을 점령하고(10장), 이어 북부 지역을 점령함으로 가나안 전체의 땅을 정복하였다. 요단을 건널 때 두려웠을 그 범람하였던 강줄기가 순식간에 마른 것 같이 이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 이때 하나님은 말들의 뒷발 힘줄을 끊고 불로 병거를 불사르라 하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11:6).” 말이 들어오면서 이동이 빨라지고 이를 병거로 사용하면서 전쟁이 가중되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그 어떤 무기나 군마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심이다.
우리는 항상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을 보았다. 그때마다 약속의 말씀은 주어졌고, 이에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5-6).” 우리에게 말씀이 없다면 우린 지금 무엇으로 기준을 삼고, 어디를 보고 푯대로 삼을 것인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우리로 오늘도 이 길을 가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럴수록 스스로 깨어 근신함으로 어느 쪽이 아니라, 악을 분별하고 선을 찾아야 한다. 그러할 때 항상 우리의 유혹은 가까이 있어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어제는 이 한 구절을 놓고 주일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기에 앞서 여러 생각이 많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곧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앞에 나아와,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22:9-10).
하오니,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1, 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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