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전봉석 2025. 2. 2. 04:38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수 9:14-15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하여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게 지혜이었겠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수 9:24).” 하여 저들은 꾀를 내었다.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4-6).” 문제는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먼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스스로들 판단하고 그리 결정한 것이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14-15).”

 

기브온 거민들은 히위 족속으로 가나안 땅 도처에 집단적으로 흩어져 살던 일곱 족속 중 하나이다. 여호수아 당시에는 이들이 기브온을 중심으로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등지에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기브온은 주변에 여러 작은 성들을 거느린 왕국으로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해발 722미터 가량의 가나안 중부의 주요 성읍이었다. 후일에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이어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구별되었다.

 

같이 듣고 누구는 대적하여 싸우려고 서로 연합하는데,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1-2).” 그런 가운데 저들이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는 것이어 이를 어찌 대하여야 할지 묵상하게 된다.

 

가나안 여러 족속들 가운데 히위 족속인 기브온 주민들도 연합군을 조직해서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기 위해 꾀를 낸 것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서로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대적한다고 해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들 나름의 냉철한 판단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남김없이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24)”에 대하여, 그들로서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저들의 종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여 꾀를 낸 것일 텐데, 가나안 땅에 살지 않고 먼 나라에서 온 사절인 것처럼 속여, 진멸의 대상이 된 가나안 족속들과는 다르게 가나안에 속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하고 목숨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분명 이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신 20:16-17).”

 

왜냐하면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18).” 이와 같은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문제이다(수 9:14b).

 

그런 가운데 저들은 ‘꾀를 내어’ 이 일을 감행한 것인데, 꾀를 내었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람’이란 단어인데 ‘벌거벗다’, ‘매끄럽다’란 뜻으로, 그 의미는 교활하다, 간계를 꾸미다, 술책을 부리다 등의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저들이 꾸미고 온 것을 보면 ‘해어진 전대’, ‘기운 가죽 포주 부대’, ‘기운 신’, ‘낡은 옷’, ‘곰팡이 난 떡’ 등 나름은 애썼다. 그렇게 꾸며 가나안에 살지 않고 먼 이국에서 온 것처럼 한 것이다.

 

의당 다른 족속들과 같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악한 자들의 특색이다.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미 4:11-12).” 이러한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께 묻고 주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이른 것인데, 어찌하여 여호수아는 일순간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 순간의 영적 분별력은 평소의 연마된 훈련 곧 습관에 따른다. 어쩌다 한 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무한 반복으로 이루어져 몸과 마음과 온 정신이 그리 밴 습성과 같다. 우리가 주를 의지한다는 것, 순수함으로 어떤 조건에 따른 게 아니라 늘 소소한 일상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일심으로 주와 함께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이때에 예수께서는 이르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오늘 본문의 일련의 사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여호수아 입장에서는 먼저 주께 묻지 못한 뼈아픈 실책이고,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비록 꾀를 내었으나 주의 전에서 나무를 패고 잔심부름을 하는 종으로나마 ‘하나님의 백성들과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루는 주님 앞에 찾아온 이방 여인의 눈물겨운 고백을 떠올린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이는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5-26).” 하실 때의 대답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나는 이 두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오늘 본문의 기브온 사람들이 비록 꾀를 내어 이렇게 된 일이나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수 9:26-27).” 이를 나는 복이라고 생각한다.

 

기브온은 목숨을 얻고 자유를 박탈당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이 되었다. 그것이 비록 거짓에 대한 형벌이요, 저주였다만 궁극적으로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창 9:25).” 훗날에 실제 가나안에게 내려진 그와 같은 저주가 가나안의 후손들인 기브온 거민들에게 임한 것이다. 비록 거짓으로 화친한 것이나 주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신성한 것이다. 이에,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 15:4).

 

비록 거짓으로 꾀를 내어 얻은 약속이라 해도 반드시 지킬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이에 여호수아는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수 9:26).” 이처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일은 매우 진중하고 신실한 일이다. 개의치 않고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 얻게 되는 교훈 중에 하나, 사람 곧 영을 다 믿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둘, 철학과 신념에 사로잡힐까 주의하라는 것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셋,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오늘 이 일련의 상황과 결과를 보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마치 거울에 비춰서 보는 것 같이 선명하다. 나름의 판단으로 말을 하는데 그 말에 전에 자신이 했던 말과도 배치된다. 또한 문제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게 너무 근시안적이다. 또 하나는 좋을 때나 동지이고, 당원이고, 뜻을 같이 한다고 추켜세우는 것이지 서로 틀어지면 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보다 추잡스런 것도 없는 것 같다. 이때 성경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알리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55:22).

 

곧 우리가 주를 의지하고, 주께 그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기준을 삼을 것인가? 어찌 이 어지러운 시국을 판단하고 대처하여 말이나 행동에서 선을 취할 것인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그러니 사람보고 사람들에 휩쓸려 이리저리 기웃거릴 거 없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4).”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이 어지러운 파국의 당사자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 역시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우리는 다만 주를 의뢰함으로 굳건할 것이다.

 

어제는 eBook으로 두세 권의 책을 샀다. 어차피 늘 손에 들렸고 그것으로 글을 쓰고 글을 읽고 하는 가운데, 누구보다 종일 책에 익숙하고 종이 글이 편한 사람인데, 그때마다 핸드폰은 손에 있어도 책은 따로 늘 들고 다니지 않다보니… 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의 <내 구주 예수>와 C. S. 루이스의 <생애와 변증>, <고통 변증>을 샀다. 그렇듯 한 권 두 권 사서 읽다보니 어느덧 eBook으로 가지고 있는 서적이 스물여섯 권이다. 무료로 준 것은 빼고, 요즘은 성경도 핸드폰으로 읽고 듣고 묵상하는 시대라, 막상 그렇듯 읽다보니 읽을만 하고 유용하기도 하다.

 

이 짧은 생에서도 여러 번의 것들이 바뀐다. 살아있는 동안 늘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사람은 늘 그대로인 것 같은데 실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하루하루의 차이는 미미하겠으나 오늘도 눈을 번쩍 뜨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새벽 두시 반이 조금 넘었다. 신기하지? 언제부턴가 나는 알람이 필요 없다. 어제도 그제도 그 시간에 일어나 시간을 보면 그즈음이다. 곧 우리는 사는 동안 살아서 사는 데 길들여진다. 책을 이제 늘 손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으로 읽고, 그곳에 메모를 하고, 기도제목을 적고, 어느 부분 밑줄 그은 것을 다시 본다.

 

기브온 족속이 비록 꾀를 내었으나 저들은 살았고 살아서 주의 백성들의 종으로나마 그 생을 연명하며 주의 성전에서 일을 한다. 나는 우선 이 대목에서 오래 머물며 묵상하게 된다. 산 자는 사는 동안에 살아서 주의 곁의 떠나지 않는 게 복이다. 서로들은 연합하여 대적한다 해도,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오늘도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일처럼 주일 날 아침, 내가 주를 바라고 찬송하고 말씀을 전하고 묵상하는 일에 있어서… 이는 현실이다. 이는 곧 더 나은 것을 알기 때문인데,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하여 오늘도 주 앞에서 시편으로 호흡하여,

 

환난 날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20:1, 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