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마음은 급하고 상황은 긴박하여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때가 있다. 사울이 왕이 되고 2년 되던 해에 상비군 3천을 선발하여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했다. 이에 블레셋은 병거 3만과 마병 6천으로 믹마스에 진을 쳤다. 앞서 암몬과 싸울 때 이스라엘군은 33만 명이었다.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삼상 11:8).” 그렇다고 이들이 항시 군대에 속하면 그만한 보급 물자를 조달할 국방력이 안 되고, 또한 각 지파의 경제활동이 어려웠다.
여기서 사울이 택한 3천 명은 왕으로서 자신의 직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예군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발적으로 모였다기보다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차출한 근위병 성격이 강하다. 그중 2천은 믹마스와 벧엘 산에 두었다. 믹마스는 예루살렘 북쪽 약 15km 지점으로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해발 660m의 고지였다. 믹마스 남쪽은 협곡과 연결되었고, 남동쪽으로는 가파른 고개여서 군사적 요충지로 훌륭했다. 이곳은 보리의 소출이 많아 그 또한 유리했다. 벧엘 산은 믹마스 북서쪽 약 7km 지점으로 해발 960m의 고지에 위치했다.
여기서 사울의 군사행동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나머지 1천의 군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었다. 여기서 요나단이 처음 등장한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의미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다.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울의 통치 거점이다. 그리고 남은 백성은 장막으로 보냈다.
훈련 안 된 일반 백성은 블레셋의 강한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은밀한 가운데 블레셋 군대를 기습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게바에는 블레셋 수비대가 있었다. 게바는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통치 기간 중(삿13:1) 이스라엘의 주요 거점에 설치한 불레셋의 군사초소로 파견진지를 가리킨다. 이처럼 이스라엘 영토 깊숙한 곳에 블레셋의 수비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요나단의 군대가 블레셋의 수비대를 쳐서 전멸시켰다. 사울 휘하에 2천의 군사가 포진한 믹마스와 벧엘 산은 블레셋 수비대가 있던 게바 북쪽에 있다. 요나단의 군사가 게바 남쪽에 위치하여 사울과 협공으로 기습 작전을 펼친 것이다. 이에 블레셋 본토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약 40km 떨어진 블레셋 영토에서 군사를 동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울의 군사행동은 블레셋 수비대를 격파하는 정도였다. 블레셋과의 대규모 전쟁을 감행할 생각에서였던 것은 아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왕을 세우고, 그 왕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확보하여 암몬 군대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전면적으로 블레셋에 위협이 되었다. ‘길갈’은 요단 서편 약 6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이다. 사울이 이 지역을 백성들의 집결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요단 강 평야여서 병력 집결이 용이하였다. 또한 자신이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곳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충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정치적 수도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위치상 블레셋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사울은 군사를 모으고 사무엘을 기다렸다. 그러나 블레셋 본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대군이 소집되어 집결하였고 곧 쳐들어올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자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7).” 즉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그 마음이 더 조급할만하다. 그렇게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다급할 수밖에 없었겠다(8).
이는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길갈에서 사무엘을 기다리는 이레 동안의 상황이다. 기다림이란 더러 잔인할 정도로 불안하다. 사울이 왕으로 공식 소개된 후 암몬 군대를 결파했다(11:1-11). 이때만 해도 득의양양하였다. 후에 사무엘의 ‘길갈 메시지’가 있었다(12:1-25). 즉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6-7).”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을 구했고, 보란 듯 암몬을 무찔렀으니 백성들도 사울도 우쭐했겠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12:13).” 분명히 사무엘은 경고하였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14-15).” 그러므로 저들에게 명령한 것은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16).” 덧붙여서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24).”
그리고 2년쯤 지났을까? 오늘의 이 사달이 났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였다(13:1-4). 즉 왕이 되고 고작 2년이 지나서 시행될 일을 앞서 사무엘은 미리 지시한 것이 된다.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10:8).” 곧 사울이 군사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백성들을 소집하면서 사무엘과 사울 간에 약속된 또 다른 기간으로, 사무엘은 그때 이미 일주일 후 길갈로 내려갈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복합적으로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병거 3만, 마병이 6천 명, 전쟁에 동원되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을 쳤다!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급함을 보고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돌아갔다. 사울은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백성은 떨고 있었다(13:5-7).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무엘을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않고 있었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무엘의 제사장적 권위가 도전 받는 시점이다. 결국 사울은 참고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하나님께 망령된 일을 저질렀다.” 그것은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않자 ‘사무엘의 제사장적 기능’을 침범한 것이다. 사무엘이 먼저 약속된 이레이 지나도록 길갈에 오지 않았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9-10).” 상황과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사울은 궁색하지만 상황을 설명한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11).”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사울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12).”
여기서 서울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사울이 직접 제사장의 역할을 감행했다는 뜻이다. 사울이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오히려 그럴 수 있다. 다만 ‘반드시 사무엘에 의해 드려져야만 했었을 제사’였다. 사무엘 외에 다른 사람이 드렸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사울은 이 본질적인 문제를 모르고 있다. 여호와의 선지자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엄격히 구별하신 것이다. 경솔히 취급할 수 있는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망령된 일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13:13).” 사무엘이 드리도록 되어있는 ‘그 제사’를 부득이하다는 이유로 사울이 처리한 것이다. 이는 다소 미신적이고 불신앙적인 자기 위안을 위한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 선택이었다.
사무엘은 이를 지적하듯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14).” 하고 앞날을 예언한 후 사무엘은 길갈을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갔다. 이때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15).”
이때의 이 상황과 그러한 판단에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게 꼭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인가? 그런데 사울에 대해 사무엘의 진노가 너무 당혹스럽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는데 이게 그러한가? 이는 단지 지혜가 부족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음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결국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사울의 제사가 나름은 주를 경외하며 전쟁에 앞서 동요하는 백성들을 규합하고, 이와 같은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데서 취한 불가피한 성격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럴 수 있지!’ 하고 서로의 생각이 갈릴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관점은 하나이다. 곧 사무엘의 표현과 같이 ‘그리하였더라면’ 즉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끝까지 참고 기다렸어야 한다. 스스로 전쟁을 준비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이러한 성경의 관점과 사울의 관점은 차이가 난다. 이를 바로 알지 못하면 사무엘의 역정과 예언을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13-14).”
여기서 ‘왕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는 것이 어렵다. 명령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어떤 율법 규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왕으로서 사울 자신이 지켜야 했을 직무의 한계를 가리킨다. 곧 사울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의 절대적 지도를 경홀히 여겼다. 이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바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사울은 급한 상황을 이유로 들지만, 우리의 모든 상황은 언제나 급하게 어떤 선택을 요구하곤 한다. 이때 ‘여호와의 명령’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는 신앙의 기본자세이다. 이를 어기고 무시한 것은 사울의 망령된 선택이었다. 그래도 된다고 여긴 자신의 왕권 때문이다. 고작 2년이 지나는 때였다. 앞서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이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신 시절을 지나왔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의 소행을 핑계로 왕을 요구한 것은 백성들이다. 이에 세워진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무시하고 그의 권위를 사사로이 범하였다. 즉 사울은 여호와를 향한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영적인 안목도 분별력도 사려 깊은 선택도 하지 못했다. 저의 제사는 그저 종교행위의 하나로 다분히 미신적인 행사였다.
이로 인하여 사울의 왕권이 생전에 취소될 것이었다. 이 선언은 그의 결정적인 두 번째 실수에서 나타난다(15:9, 15). 결국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10-11).”
사울은 사무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8:10-18),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 왕’이 되려 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맡은 자로서의 사명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라는 중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무시하고 백성들의 눈치만 살피고, 자신의 안위와 권위에만 신경 썼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성결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울의 오늘 이 행위를 엄히 문책하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불변적이고 결정정이다.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진정 뉘우치고 회개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의 본질이 참으로 아둔하다. 그는 오로지 스스로의 자신의 왕권을 오래 연장하는 게 중요하였다. 오늘 이와 같은 경고 후에 사울은 더 강퍅해져서 스스로 자신의 왕권을 단축시키고 만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15:26).”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다급할 때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안 좋은 일이 어깨동무하고 오듯 엎친 데 덮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 주가 행하심을 바랄 뿐 또 다른 선택은 오늘 사울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위안을 삼는 일’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 안심하니라(대하 32:8).”
세상을 보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그러니 돌아가는 세상이야 늘 그렇듯…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어쩔 때 보면 우리는 미련한 듯하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잘만 굴러간다. 모두가 하나님 없이도 우리 믿는 자들보다 행복하고 유익하게 잘 사는 것 같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러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3-14).
억울한 생각도 드는데,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그것은,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0).
그러므로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2-23).
무릇,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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