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전봉석 2025. 3. 28. 04:27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삼상 14:35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사울은 종교적이고 그의 아들 요나단은 주의 이름으로 무대책이다. 먼저는 요나단이 임의로 그의 무기 든 자와 같이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적병을 도륙한다. 어찌 보면 저의 신앙은 무모하였다. 그럼에도 공적을 세우며 적군을 십여 명 이상 죽이고 그들 진영을 흐트러뜨렸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었다(1-15).

 

사울은 요나단의 활약으로 블레셋 진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블레셋을 집중 공격하였다. 이에 블레셋의 기세에 눌려 도망하거나 숨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합류하여 결국 믹마스 전투에서 빌레셋을 무찌르고 승리하였다(16-23). 이 전투로 인해 군사들이 많이 피로한데 사울은 승리를 위해 전쟁 중에 금식령을 내리고, 군사들은 먹지 못해 기진하였다(24-30). 그러다 언약한 기한이 지나고 굶주렸던 병사들이 짐승을 잡아 피째 먹는 죄에 빠진다(31-35).

 

그런 가운데 블레셋을 추격하고 이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종교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그 원인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으로 인한 것을 알고 죽이려 하자 백성들이 중재하여 아들을 죽이는 일은 피한다. 철수한 블레셋을 추격하는 일을 멈춘다(36-46). 사울의 통치 기간 내내 블레셋과의 전쟁은 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사울이 왕이 된 후 모압과 암몬, 에돔, 소바, 블레셋과 아말렉 등을 쳐서 이스라엘을 용맹하게 다스렸다(47-51).

 

이상의 내용을 읽으면서 그때마다 사울의 종교적인 치세와 신앙적인 면을 생각하였다. 상대적으로 요나단의 무모하나 진취적인 믿음의 행보를 읽었다. 특히 요나단이 답보 상태인 전쟁 중에 임의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갈 때,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 하는 부분에서 저의 신앙의 바탕이 주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을 알게 된다.

 

믿음으로는 능치 못함이 없음을,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더러는 종교적인 의식에 매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붙들려서 우유부단하고 미적거리며 뭉개는 것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최우선은 하나님의 뜻이다. 곧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요나단의 진격은 무모하였으나 그의 진취적인 기상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공격하는 데 있어 약진의 발판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사울의 우물쭈물하는 행태와 그 신앙이 본질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구색을 맞추려는 데만 집착하였음을 본다.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삼상 14:3).”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는 믿음으로 진격하며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이십 명 가량의 적군을 무찌르는 동안(14), 사울은 아히야에게 일러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한다(18). 겉으로는 이들의 행위가 경건하고 신앙적인 듯하나 종교적인 의식으로 마치 미신적으로 여겨진다. 그들이 치렁치렁 에봇을 입고 복장을 갖추고, 그 와중에 하나님의 궤를 앞세우려 하는 것에 의아한 마음이 든다. 신중하나 의식적이고 신성하나 종교적이다. 이를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신앙에 있어 때로는 무모하고 무대책이 상책이다. 요나단의 진격이 다소 감정적인 듯하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고, 사울의 의식이 경건하게 보이지만 미신적으로 보인다. 나는 가끔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럴 때면 어릴 적 나의 부친의 전투적인 목회를 생각한다. 마치 물불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사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환자촌 교회로 목회지가 정하여져 들어갔다가 가진 것도 없이 무일푼에 가까운데 개척을 시작하여 사택이 없어 옥상에서도 생활하고 상가 교회 한 편에서도 살림을 해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자식이 사남매요, 노모까지 모시고 있는 처지에 먹고 살 궁리나 자식들 학교나 교육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였다. 그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를 여남은 곳 전학을 하였고, 잠시 동안이지만 이모 집에 밑에 동생과 같이 맡겨지기도 했다. 그저 지겨웠고 지긋지긋했던 잦은 이사와 전학과 가난으로 치를 떨었던 기억도 있지만 지금에 이르러는 그러한 믿음의 무모함이 우리 형제들을 단련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누이는 하나님만 바라는 일에 단단해졌고, 동생들은 지금도 역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 하는 용기로 목회 현장을 지킨다.

 

나는 늘 여물지 못한 곡식처럼 빌빌한 것 같이 쓸데없는 생각이 많고, 돌다리도 두들겨보다 건너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인 것 같다. 미련할 정도로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나름의 도전이나 새로운 도약을 못하고 늘 그 타령이다. 오늘 여기 사울과 요나단의 현저히 다른 신앙의 약진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때로는 신앙의 무모함이 옳은 길을 가게 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하는 실질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나아가는 달음질이 필요하다. 이에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4-16).”

 

하는 진격의 용사였다. 이는 우리 한국 교회의 기틀이 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신앙으로 초대 믿음의 사역자들이 죽기 살기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 오늘의 이 엄청난 부흥을 이룬 것이다. 오늘 요나단의 무모한 진격이 교두보가 되어 블레셋을 쳐서 승리하는 약진의 발판이 된 것과 같다.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즉 오늘 이 현실에서 보이는 것에 연연하여 여전히 주춤거리다 엉거주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서있는 신앙으로는 어림없다. 우리의 신중함이 더러는 믿음으로의 행동하기를 막아선다. 어차피 이 모든 전투는 주가 행하신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삼상 14:23).”

 

오히려 그런 가운데 사울의 종교적 신념으로 내린 금식령이 백성들로 하여금 더 큰 죄를 짓게 하였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24).” 그러다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32).”

 

그러니 한 가정에서 부모로서, 교회에서 목회자로서, 누구의 선생으로서 자칫 나 하나의 판단이 나 하나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상황과 여건에 따른 게 아니다. 어떤 조건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이를 알 때 우리의 기도는 주만을 바라는 것으로,

 

“…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그러다 우리는 번번이 세상을 기웃거려 남들처럼 살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도움을 구하는데,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더러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면서 경건하기를 종교적으로 의식적으로 지킨다. 하나,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2).”

 

주께서 오늘 이 모든 사정과 상황을 다 알고 계심을 인정할 때,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3).”

 

우리가 무엇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는가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게 주의 뜻이다. 더러는 무모하고 무대책이라, 누가 봐도 어리석고 한심한 일일 수 있으나 이를 개의치 않고 나아갈 때 오늘 요나단과 같이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삼상 14:8).” 저가 그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뒤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느닷없이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창 22:8-10).” 저의 그때 심정을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어떠했던가? 뜻을 정한 후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단 1:8).”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3:17).” 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저들이 굳건하였고, 심지어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하는 이와 같은 담대함이 놀랍다.

 

이와 같이 욥의 신앙 또한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4-15).” 이 살고 죽는 게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그러하다면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뿐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다만 기도뿐이다.

 

오늘의 이런저런 상황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갈등과 회의가 나를 짓누를 때도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하면 우리의 의는 오롯이 주를 의뢰하고 믿음으로 바로 설 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일련의 이런저런 시국이 어지러운 가운데,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러므로 잠잠히 주만 바라는 것,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62:1).

 

그러므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2:5).

 

오늘은 이와 같은 기도와 마음으로 주 앞에 서서,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74:12).

 

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주의 것임으로,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6-17).

 

이를 붙들고 주 앞에 엎드려서 아뢰기는,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