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현. 2025. 8. 19. 17:22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대하 28:19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시 68:35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일일이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양해를 얻으려는 것이 피곤하다. 나의 나 됨에 대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이를 어찌 그러한가?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저에게 설명하기란 슬픈 일이다. 나는 내가 힘들고부터 누구에게 왜? 하고 질문하는 것을 자제한다. 모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까, 굳이 내가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이니까! 하여 나는 누구의 슬픔이나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 속으로, 속으로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을 구할 뿐이다. 내가 상담사 일을 못하는 것은 내담자의 심정이 나를 먼저 울렁거리게 하기 때문이라, 그냥 같이 우는 게 낫지 이를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에덴을 나오면서부터이다. 더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는 오늘 유다의 아하스 왕으로 짙게 굳어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언급된 유다의 열왕들로 르호보암 때부터,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그리고 요담을 지나기까지는 그래도 얼마큼씩으로든지 선정(善政)을 행하면서 유다를 다스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아하스는 온통 악정을 행하였으니, 그의 나이 이십 세에 왕위에 올라 16년을 다스리는 동안,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1-4).

 

이는 유다의 씨를 멸하려고 작정하고 손자들까지 무참히 살해했던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주전 841-835, 22:10-23:15)의 악행을 능가한다. 그렇듯 아달랴와 다를 바 없이 아하스(주전 735-716)에 대해 그가 범한 악행만을 서술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내용은 끔찍하다. 저는 대표적인 악왕(惡王)으로 꼽힌다. 아하스는 즉위와 함께 온갖 우상 숭배를 일삼았고(1-4),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징계를 불렀다(5-7), 또한 앗수르 왕을 의지하는 것이나(16-21), 아람 신을 섬기는 그의 불신앙을 고발한다(22-25). 결국 아하스의 종말은 허무하다(26-27).

 

이러한 내용은 왕하 16장의 기록과 비슷하다. 열왕기서에서는 역대서와 달리 다메섹의 우상 제단을 도입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왕하 16:10-11), 그 우상의 제단에 제사한 사실(12-16), 성전의 기구를 이전한 것(17-18) 등을 첨가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열왕기사와 달리 북이스라엘의 군대가 유다를 침입해 사로잡아 간 포로들이 다시 유다로 귀환한 사실을 첨가하였다(대하 28:8-15절).

 

곧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침입한 사건(5)에 이어 북이스라엘에 사로잡혀 갔던 포로들이 귀환한 사실을 언급함으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잊지 않게 한다. 즉 패망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계속 펴시는 것을 알게 하고, 훗날에 바벨로의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당시 백성들에게 큰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그리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하스 왕의 광적인 우상 숭배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통치 초기부터 말기까지 완악한 우상 숭배를 자행하였다. 바알의 우상을 제작하였고(2),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였으며(3), 산당과 자연물 아래서도 제사를 드렸다(4). 심지어 몰렉을 숭배하여 자신의 자녀를 인신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다.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그러니 이 같은 죄악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다메섹을 방문하고 난 후 더 적극성을 띠었다.

 

곧 이는 다메섹 신들을 섬기고,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23).” 성전의 기구를 파괴함으로,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24)” 성전 봉사를 전폐시켰다는 사실이다.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29:7)” 그렇게 하여 유다 전역에 산당을 건립한 것이다.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이 같은 행적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28:25).” 그리하여 결국 유다는 전쟁의 장이 되었다.

 

먼저는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의 침입이 있었다(5-15). 당시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의 치하에서 강력한 영토 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은 동맹하여 유다가 참가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하스가 이것을 거절하자 르신과 베가는 유다를 침공하여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유명무실한 왕을 세워 유다를 반(反) 앗수르 연합 세력으로 삼고자 전쟁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사 7:6).”

 

또한 에돔과 블레셋의 침공이 이어졌다(대하 28:16-17). 먼저 에돔은 엘랏을 점령하였다. “당시에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기에 거주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6:6).” 그러자 그 곳에 거주하던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블레셋은 세벨라와 네게브를 침략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아하스가 이사야의 예언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사 7:3-4).”

 

결국 예언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왕하 16:7-8).” 이것은 하나님보다 주변 세력에 의지하여 위기를 일시적으로 피하려는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이 두 전쟁은 당시 주변 국가들의 군사적인 역할 관계 때문에 일어났으나 궁극적으로는 아하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수단이었다고 오늘 본문은 나열한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5, 9, 19).”

 

어쩌다 아하스 같은 이가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그 원인을 분석한들, 앞서 선왕들이 그래도 나름은 선정을 행하였다고는 하나 적들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실수로 죄악이 흉터처럼 선명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신앙은 외적인 환경과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으로 바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즉, 신앙은 비록 죄를 범하여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를 구할 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용서와 자비로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스스로의 자정능력으로나 특별한 교육의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령 경건하였던 아하스의 부친 요담을 봐도 알 수 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27:2, 6).”

 

그러한 부친의 밑에서 자라고 왕이 된 아하스가 이처럼 극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외에 진정으로 의지할 것은 우리에게 없다. 당시 아하스의 통치 기간에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현실이었다고는 하나 저는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렇게 앗수르의 도움을 구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19-20).”

 

결과적으로는 오늘 본문이 묵상하게 하는 논조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만족이나 욕구 충족이 아니라 보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명심하고 구하고 의뢰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유다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상을 숭배하고,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불신앙의 태도를 자신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심어주었다. 그렇게 하여 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방의 손에 붙인 바 되었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거룩을 드러내신다. 곧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다윗과 여호사밧에 이어 유다의 3대 성군으로 불린다. 아하스에게서 어찌 히스기야 같은 왕이 나왔는가? 의아할 정도이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야요 스가랴의 딸이더라(29:1).”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놓으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니 우리가 어찌 오늘의 이 상황을 두고 무엇을 예단할 수 있겠나? 때로는 슬프고 외로운 자신만의 서러운 고통을 안고 주 앞에 엎드림으로,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2-23).

 

우리는 쓸모없는 듯 하찮게 여기는 것으로도 주가 거룩하게 쓰신다. 우리로서는 누구에게 일일이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마음의 서러움을 안고도 묵묵히 주를 바랄 때 이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하여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그러므로 누가 알았겠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여 오늘도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을 가만히 주 앞에 울먹이는 것으로 내려놓는다. 누구는 그저 용기를 내라는 둥 한 번 도전해보라는 둥 하며 나름은 무심히 권하는 말일 텐데, 나는 그럴 수 없는 것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덧붙이다 서러움으로 주의 이름을 되뇔 뿐이다. 곧 우리는 저마다의 슬픔을 그리 안고 사는 것이 아닐까? 누구는 남편이 죽고 그 사업을 처분하려다 채무정리하고 세금내고나면 빈털터리라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 사업을 이어서 십여 년 가까이 끌고 왔다. 죽기 살기로 산다고 살았는데 숨 좀 돌릴만하니 자신이 너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밀려들고, 거짓말처럼 예전에 좋아하던 책 읽기나 글쓰기를 깡그리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온 것인데….

 

나는 저의 심정을 헤아릴 길 없어 주의 이름을 되뇔 뿐 어릴 적에 주를 알았고 교회를 다녔었다는 과거형의 저의 말을 주 앞에 되묻는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 하고…. 어렵고 힘들 때야 주를 찾았는데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어디서 잃은 것일까? 무엇이 더 귀하고 소중한지를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5-6).”

 

오늘의 아하스가 어찌 내 안에 한 속성이지 아니하겠나?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가장 큰 불행인 것을,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하여,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럼 이제 어찌할까?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기도였다. 돌이켜 자신을 주 앞에 고하고 나를 둘러싼 이 악의 환경을 두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이에,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시 68:1).

 

나를 둘러싼 악을 무찌르기 위함인데,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3-4).

 

그러할 때,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8).

 

고로,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34-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