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하현. 2025. 8. 18. 18:12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대하 27:6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7

 

 

하나님 앞에 온전하기란 인내가 필수이고 시험의 때에 말씀으로 굳건하게 서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오늘 이른 점심 식사 후 가정예배를 드릴 때도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는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빌라델비아는 고원 지대였으나 소아시아의 중심지로 여러 문화와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어느 교회는 그래서 악에 이끌리고 어느 교회는 더욱 인내함으로 말씀으로 굳게 선다.

 

그런 거 보면 환경적인 요인으로 신앙의 성패가 갈리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인내함으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 그러므로 저들은 자신들의 ‘작은 능력’, 비록 세상적으로는 보잘것없고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해도 맡기신 자리에서 그 사명을 다할 때,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

 

고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시는 이의 모습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시다(7). 그렇다고 왜 안 어려웠을까? 그러니 인내가 필요했을 테고, 그러므로 위로 하시길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11).” 이 얼마나 확실한 보증인가? 결국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

 

이에 오늘 본문을 보면서는 요담을 통해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고 이를 판별하여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계시록을 통해 일곱 교회에 대해 요즘 말씀을 나누는데 앞서 사데 교회에 대하여는 엄히 경고하시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2).” 하실 때의 아찔한 느낌과 함께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 하는 두렵고 떨리는 경고의 메시지를 되새겼다.

 

그런 최악 가운데서도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 하신 말씀에서 ‘남은 자 사상’을 새삼 떠올리기도 했다. 곧 하나님은 아무리 때가 악하고 온 세상이 부패했다 해도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레 26:36).” 하심과 같다.

 

곧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1).” 하여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 19:31).” 이와 같이 사데 교회가 비록 ‘살았다 하나 죽은 교회’로 분류되었다 해도 그 가운데는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러므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 하심으로 오늘에도 이와 같다. 고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 11:5, 7).”

 

이에 오늘 본문은 앞서 교만해져 제사장의 고유의 역할인 성전의 분향 사역을 대신하려다 여호와께 진노를 받아 나병이 든 웃시야의 남은 생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비참한 말로는 그 스스로 사서한 것이다. 이어 오늘 왕위에 오른 요담의 사역을 다루는 데 있어 그 내용이 의외로 간략하다. 요담의 성품에 대한 개괄적 언급과(1-2), 그가 행한 업적과 군사적 승리와(3-5), 정도(正道)를 행하는 그의 모습과(6), 그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 나열되고 있다(7-9).

 

요담이 행한 업적이란 여호와의 전을 건축과 증축하는 일이었고,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3-4)”,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조공을 받은 역사이다(5). 이는 그가 정도를 행한 것으로 그리하여 점점 강해졌다는 평가가 눈길을 끈다.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6).”

 

이에,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하는 바울 사도의 설명과 같이 유다의 왕들과 그들 개개인의 장단점이 우리에게는 산 교훈이 된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아무리 악인과 의인이 섞였다 해도 반드시 심판은 구분하심을 볼 수 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대하 27:2).” 여기서도 의아한 게 왜 저는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과 그것으로 백성들의 부패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하는 대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에 상당히 오랜 동안 웃시야는 살아 있었다. 비록 나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였지만,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26:21).” 그러므로 상당한 웃시야의 영향력은 요담에게 미쳤을 것이고, 따라서 요담은 웃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요담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하는 부분에서는 부친 웃시야의 행위를 알고 어떤 이유로 오늘의 질병이 임하였는가 하는 터라, 저는 여호와의 전에 함부로 들어가 범죄 하는 일을 삼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왕하 15:35).”

 

하는 말씀으로 왜 백성들이 악을 행하였는지를 알 것 같다. 즉 산당 제사를 ‘사악을 행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뤄 역대기의 본문은 이에 대해 엄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요담이 행한 선한 업적들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에 이어지는 아하스의 악정(惡政)과 선명하게 대비시켜 놓는다(28장). 곧 아하스는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1b-4).”

 

그러니 참 선을 이루며 하나님의 뜻에 합하여 산다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감동적인 일인가? 오늘 본문에서 요담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자’라고 하였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2).” 그러면서 그가 이뤄 놓은 업적을 강조하였다.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6).” 이와 같은 요담의 바른 길은 그 거울이 분명하였다. 곧 나병에 걸리게 된 부왕(父王) 웃시야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문득 나는 기도하기를 나의 지난날 어리석었던 나의 삶과 그러한 불신앙적인 모습까지도 나의 아이들에게 교훈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나는 종종 대놓고 ‘나 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신앙의 어리석었음을 인정한다. 누구에게라도 이러한 허물과 실수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것은 마치 부친 웃시야 왕의 나병의 원인과 그에 따른 그의 처지가 요담에게 산 교훈이 되어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세움을 받았다는 데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요담은 아버지를 경시하지 않았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도 않았고, 오직 부친의 선행만을 본받아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하였다.

 

웃시야의 통치에서 그 한 번의 교만과 실수로 나병환자가 되었던 것을 보고, 요담은 아버지의 죄를 참회하는 삶으로 통치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과거의 잘못을 딛고 일어나 정도를 걷는 신앙이 참 귀하고 보배롭다. 나의 바라는 한 가지 일, 나의 남은 생애는 부디 다시는 뒤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우러르며 주의 말씀으로 전심을 다하길 바랄 뿐이다. 그런 가운데 요담의 결점은 그런 가운데서도 외적인 번영을 추구하여 내적인 안정을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곧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히려 심각해져 가는 백성들이 사악하였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2).

 

나의 피상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교회를 부흥하고 확장하려 하거나 외형적으로 어떤 성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묵묵히 ‘나 하나만이라도’, ‘내 곁의 한 영혼으로라도’ 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요담은 아마도 그의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적으로 부요하게 될 때, 국민들의 생활도 나라의 번영과 평안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저의 노력(?)으로 오히려 백성들은 더 타락하였고, 국력이나 경제력은 신앙 회복과 도덕적 부패를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방탕하고 사치스러워져 갔으며(사 3:16-24), 거만하여 전쟁을 갈망하고 우상에 심취해 있었다(2:7-8, 17). 이를 통해 볼 때 결코 외적인 번영으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없다. 교회의 외적인 부흥이나 나름 그럴듯한 성장으로는 온전히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곧 저마다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로 그 행한 것이 증거가 된다. 하여,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9-11).”

 

하는 말씀으로 새삼 확신을 얻는다. 그러므로 은혜를 의지하고 주신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충성을 다할 때,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하여 겸손으로 고개 숙이며 주를 섬길 때,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3-4).”

 

하여,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하신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하고 주께 구한다. 그러할 때,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4).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