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하현. 2025. 8. 17. 18:28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대하 26:16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시 66:5

 

 

마치 우리 인간의 공식 같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4-5).” 하여 저는 모든 주변국들로부터 위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에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8).” 이는 하나님이 저로 강하게 하심이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7).”

 

그럼 우리는 이에 따른 겸손으로 남은 생을 무던히 순종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 그러니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우리의 속성인가? 본성인가? 그렇게 하여 모두가 그러한가? 하는 여러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저지하는 제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18).”

 

그럼 좀 뉘우치거나 주춤하여 물러서고 깨달을 법도 한데, 오히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19).” 종당에는 이런 결과를 초래함으로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21).” 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 결과인지….

 

이렇게 오늘 본문은 선왕(先王)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린 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살해되었고,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25:27).” 그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웃시야가 통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왕하 14:21).” 여기서 아사랴가 웃시야이다.

 

웃시야는 유다의 10대 왕으로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간 동치하였다(주전 791-739). 앞서 그의 선친도 그러했듯이 저 역시 그 통치에 있어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웃시야는 하나님께 충실하여 번영을 누린 전반기와 지나친 경제적, 국가적 번영과 안정으로 교만해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반기로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네 사는 게 그러한가보다. 어렵고 힘들 때는 주를 찾고 바라다가도 살만하고 좋아져서 시집 장가가고 취업하고 돈 좀 벌면 주를 멀리하기 일쑤다. 내 곁의 많은 사람들 역시 이는 마치 공식 같다. 어제 왔던 아무개도 어릴 때는 교회를 다니다가 나이 들면서 안 믿는다는데,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겪고 사는 게 공허해지다보니, 글쓰기를 배우는 명목으로 찾았는데… 나는 저의 사연을 들으면서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다. 어쨌든 나이 환갑을 넘겨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만나게 된 것이기는 한데, 매주 토요일 하나님이 어찌 다루시는가 보면 그 뜻을 알게 되지 않을까?

 

오늘 웃시야의 통치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하여 생각하면서 우리의 일반적인 떠나고 돌아오는 과정을 연상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된 선왕(先王)들로 요아스와 아마샤의 경우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어서도 그럴 것이다. 세 왕 모두 통치에 있어 처음에는 주를 경외하여 선정(善政)을 펼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가도(1-15, 24:1-14, 25:1-13) 이후 그와 축복이 저들로 악정(惡政)을 행하게 하는 것을 보면, 없어서 문제인 게 아니라 있어서 문제인 게 우리의 자질이고 타고난 속성이지 싶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했던 경우는 슬프고도 애처로우면서도 무서운 경고로 다가온다(16-23, 24:17-25, 25:14-28). 오늘 본문에서의 웃시야를 묵상하면서 새삼 다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웃시야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번영하였다(1-15). 저는 ‘아마샤를 대신하여 온 국민의 지지를 받고 왕이 된 것이다. “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1).” 곧 그의 부친 아마샤의 행적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4).”

 

그리고 저의 곁에는 휼륭한 선지자 스가랴의 지도편달이 있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5).” 이로 웃시야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 그는 많은 성읍을 건축하였다. 그의 정복 사업은 많은 나라를 소국으로 만들었다(6-8). 또한 그의 두드러진 업적은 농업 분야였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10).”

 

이처럼 먹고 살 문제가 해결되자 군대를 양성하였다(11-13). 물론 직접 병기를 제작하였다(14-15). 웃시야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전성기를 누렸다. 이와 같이 강력해진 웃시야는 여호와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신 것을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북방의 강력한 세력이던 아람은 앗수르에 의해 급격히 약화되었고, 앗수르마저 저들 국내 문제로 인해 밖으로 시야를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근동의 최강국으로 부상되었던 여로보암 2세 치하(주전 793-753년)의 북이스라엘도 그가 죽은 후 심각한 내부 혼란으로 쇠약해졌다.

 

그렇게 되자 유다를 중심으로 한 주변 국가들은 자국(自國)의 문제 해결에 정신이 없었고,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웃시야 왕국은 전반적으로 무리없이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웃시야는 교만이 들었고 불순종에 이르렀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 곧 그의 교만은 강성과 비례하였고, 그러자 제사장들만 구별되이 행하던 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그로 인한 저의 불순종과 징계는 웃시야 왕국이 점점 강해지면서 백성들은 물질주의로 기울어졌다(16-23). 이는 정말이지 공식 같아서 뒤따르는 게 한없이 사치해지고 교만해지는 것이다(사 3:18-23). 이렇듯 웃시야 왕의 교만은 제사장직을 모독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제사장의 고유 업무를 대신하려 했던 것은 국가적인 번영을 계기로 다윗 때와 같은 강력한 제사장 나라를 꿈꾸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하여 성전에서 분향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에 걸렸다. 웃시야는 신앙적인 부흥 없이 단순히 물질적인 부흥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열왕기서에는 웃시야 왕의 통치 전반에 걸친 순종(왕하 15:3)과 이어서 불순종(4)을 소개하고, 심판 결과와(5), 그의 죽음(6-7)으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의 선정과(1-5), 내외적으로 승리하는 삶과(6-15), 범죄(16-19a)를 이어서 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19b-23)가 따른다. 도식적으로 웃시야의 통치는 인과적인 사실로 전개된다. 결국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웃시야 왕을 위하여 주변의 대국들을 잠잠케 하셨다. 유다가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섭리하셨다.

 

당시 대국의 각축으로 시달리던 유다가 이와 같은 호기(好期)를 맞은 것은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인함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신앙과 그 성장이 그러하다. 가령 다윗이 스스로 여호와의 집, 성전을 짓겠다고 소원했던 바와 하나님은 이를 거절하실 때의 다윗의 순종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로서 헌신을 보인 바 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삼하 7:2-3).” 이처럼 처음에는 나단 선지자도 이를 좋게 여겼다. 그러나,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4-5).” 하시면서 다윗의 마음은 받으셨으나 실제 저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기회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를 다윗은 순응하였고, 이어서 아들 솔로몬이 성전에 짓는데 모자람이 없게 철저하게 준비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 수단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어제부터 같이 수업을 하게 된 이가 이곳에서 예배도 드리나? 그럼 좀 밖에 뭐라도 하고 누구라도 알 수 있게 오게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식의 생각을 말하였다. 나는 저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정한 뜻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 믿는다.

 

곧 나는 이처럼 내게 보내시는 한 영혼으로 족하고도 벅차다. 주가 필요하시면 ‘여느 교회처럼’ 이런저런 것을 어찌 아니 구비하시겠나? 늘 내 안에 회의와 갈등도 왜 없을까? 나의 이런 마음이 자칫 회피와 방관은 아닐까? 하고 늘 내 자신에게 되묻는다. 그럴 때면 내 안의 한 대답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하는 것이다. 더러는 이렇게 앉아 몇 시간째 묵상글을 쓰는 일도 힘에 부친다. 어제 누구와 앉아 대화하고 그러는 두어 시간의 만남이 나는 힘들었다. 단순히 마음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몸도 말이다. 어디가 아프고 어떻게 힘들고 하는 소리는 구차하다. 다만 그럴 때 내가 읊조리는 말씀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여,

 

은혜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 되심이다. 그렇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오늘의 나로 이 자리에 있게 하신 이가 나로 하여금 맡게 하신 이 교회와 여기 모이는 몇몇의 영혼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성령으로 붙드실 것을 확신한다. 그렇게 하여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그리하여 나는 늘 묵상하기를,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그러므로 한 영혼으로, 한 작은 자 하나에게 귀히 쓰는 마음으로,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시 66:1-2).

 

나로 할 수 있게 하실 이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주를 사랑하게 하시려고,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5).

 

나는 나로 하나님의 산 증거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9).

 

그러므로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3-14, 17).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