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하현. 2025. 8. 16. 16:27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대하 25:14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시 65:6-7

 

 

앞서 유다의 8대 왕 요아스의 치적을 둘로 구분하여 선정(24:1-14)과 악정(24:17-24)으로 언급하였다. 오늘은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의 선정과 실정(失政)에 관한 기록이다. 아마샤의 통치에 관해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2).” 하는 말로 축약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어느 정도는 정직하였으나 그렇다고 온전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그의 말로는 처량하고 한심하다.

 

이를 나타내는 구절로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14).”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승리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하는 짓이란 게 고작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마샤 통치의 전반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다(1-13). 부친 요아스가 신복들에 의해 살해된 후 혼란한 시기에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아마샤는 먼저 부왕을 죽인 신복들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그의 나라가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하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3-4).”

 

그렇게 국내의 혼란을 잘 수습하고, 이어서 아람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24:23-25).” 유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에돔을 정벌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에돔은 다윗 이래로 계속 유다의 속국이었다. 그러다 여호람 시대에 유다를 배반하고 독립했다(21:8-10). 이 에돔과의 전쟁으로 아마샤는 병력이 30만에 불과하였다. “아마샤가 유다 사람들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 만한 자 삼십만 명을 얻고(25:5).” 그러므로 저는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였고, 이에 큰 승리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유다는 실추한 대외적 위신을 회복하였는데,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이고 유다 자손이 또 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들의 온 몸이 부서지게 하였더라(11-12).” 그리고 아카바만에 있는 상업의 중심지인 엘랏을 전령하여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보았다. 이 항구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고,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14).”

 

결국 이는 범죄다. 아마샤의 후반부 통치는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다(14-28). 그로 범죄케 한 것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은 자신감으로 인한 교만이었다. 그러자 그는 보란 듯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와서 섬겼을 뿐 아니라(14), 그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선지자를 배척하였다. 이렇듯 늘 보면 악은 악에 악을 꼬리로 물고 일어난다. 당연히 여호와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그로 인하여 저의 교만은 북이스라엘을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킨 후 참패하였다. “유다 왕 아마샤가 상의하고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오라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17).” 이는 다 교만 때문이다.

 

아마샤는 결국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고 성전과 왕궁이 약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이스라엘의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그의 부왕과 마찬가지 무리들의 반란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27).”

 

결국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우리의 신앙이 전심(全心)으로 주를 온전히 섬기지 못할 때, 마치 날림공사 같이 그 신앙의 건축은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대충, 적당히, 하는 신앙으로는 그러할 수밖에 없다. 어쩔 땐 충실한 것 같아서 목숨까지도 바칠 것처럼 굴다 어느 순간 어려움이 파고처럼 밀려오면 순식간에 쓸려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늘 전심으로, 온전히 그토록 말씀을 사모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심인데, 자기의지로 자신이 판단하여 결정하는 신앙은 처음과 끝이 다르다. 일찍이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성도들을 부지기수로 보고 자랐다. 솔직히 어린 게 뭘 알았겠나만 처음엔 그처럼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앞장서서 교회를 위하는 것 같던 이들이 뭐가 틀어져 감정이 상하거나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저이가 보인 신앙은 무엇이고, 그것이 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때가 여러 번이다. 가령 누구는 부친이 사역지를 떠날 때 같이 따라서 개척교회를 세웠다. 서로 형편이 빤한 터에 저의 적잖은 헌금은 교회를 개척하는데 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1년쯤 되었을까?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개척헌금으로 바친 것을 도로 내어놓으라며 한동안 실랑이가 있었고 결국은 얼마를 돌려받아서야 떠나갔다.

 

또 누구는 이런저런 어려운 교회 형편을 알고 때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맡아 했었다. 성도들은 저를 신뢰하였고, 부친 또한 저를 굳게 믿어서 서로가 건축위원장으로 세워 교회 건축 시작하였다. 저는 건축위원으로 마침 그가 건축 일을 하는 터라, 자재며 일꾼이며 그때마다 앞장서서 교회 건축을 도맡아 했다. 우선은 자금이 어려울 때면 저가 앞장서서 서로 믿고 일을 진행하였고, 그때마다 건축재정을 저가 임의로 우선 집행하고 보고하는 식이었다. 그렇듯 앞장서서 건축을 담당하던 터라, 설마 저가 건축헌금을 착복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저는 잠적하였고, 교회 채무는 무려 8년을 끌어오며 성도들을 흔들어댔고, 결국은 교회 건물은 빚으로 넘어갔고, 교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생각해보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오죽하니 나는 스무 살을 넘기면서 교회에 환멸을 느꼈고,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면 오히려 더 신뢰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신앙을 등한시 한 채 20년은 족히 세월을 탕진한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강권하심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오늘에 이른 것인데, 지금도 와 생각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나는 은연중에도 ‘너무 잘하는 사람' 또는 '지나치게 열심인 사람’에 대해 경계한다. 대체로 지나치게 열심이던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좋지 않게 교회를 떠나는 경우는 여전하다. 이에 성경은 '어디 시험하여 보라' 하시며 그 신앙의 중심을 요구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으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스스로 됐다, 괜찮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를 게 없다. 그러므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하여 우리는 오늘 아마샤의 처음과 나중을 보면서도 마땅히 말씀을 따르는 데 있어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다.

 

아마샤가 행한 선정도 물론 귀하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결국은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4:3-4).” 보면 산당이 늘 함정이 된다. 오늘의 산당으로 나는 줌이나 유튜브 방송으로의 예배를 생각하곤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우도 있겠으나 그것으로 인해 교회를 아예 등지고 '나홀로 신앙'이 내 주변에 여럿 있다. 

 

앞전에 반역한 이들에 대해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5-6).” 하여 하나님의 축복 또한 따랐다.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7).”

 

곧 저로 하여금 내적 외적 안정을 얻게 하심으로 아샤가 행한 선정(1-4)과 그 결과(5-13)를 대등한 관점에서 열왕기서는 기록하고 있다. 즉 아마샤의 선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에서 북이스라엘과 아마샤가 싸운 사실을 언급하여(8-14), 북왕국의 요아스가 죽은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15-16). 곧 이 전쟁으로 남북 양측에 피해를 주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오늘 본문은 요아스가 죽은 사실을 생략한 채 교만한 아마샤가 우상을 숭배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었다.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14-15a).” 그리하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였다(15b). 그러나 아마샤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16).” 

 

결국 아마샤는 축복의 원인으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고(1-4), 그 결과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이고 유다 자손이 또 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들의 온 몸이 부서지게 하였더라(11-12).” 곧 승리도 거두었다(5-13). 그러나 저에게 심판의 원인은 우상숭배였다.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14).”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였고(15-16), 그 결과는 끔찍하게 파국을 맞았다(17-28).

 

곧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다. 이는 단순히 이 땅에서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본문은 아마샤를 통해 순종하면 축복이고, 불순종하면 심판인 성경의 원리를 알게 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는 신명기적 사관이기도 하여,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그러므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우리들로 하여금 이를 듣고 실천하게 하심인데 이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이와 같은 간단명료한 원리가 아마샤의 치세에서 드러나는 핵심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안타까운 말씀은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25:2).” 저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가 행여 오늘 우리가 들을 소리는 아닌지… 하나님께서는 자고(自顧)한 자를 반드시 징계하신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사 2:12).” 이는 다시금 나로 겸손하게 하여,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1-53).”

 

그러므로 오늘을 살면서 나의 하루하루가 어떠해야 하겠는지를, 오히려 형통하고 무난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 간단한 진리 앞에서 다시금 겸손을 결심하며, 허리를 동여, 근신하고 깨어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신 말씀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어렵고 힘들 때가 오히려 주를 바라며 의지하기 쉽다. 그러다 적당하고 어지간하여 다들 고만고만한 것 같을 때 나태함은 교만으로 찾아와서 스스로에게 속삭이기를,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을 주입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1-2).

 

이처럼 주의 말씀 앞에서 나의 형편과 사정 그대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

 

하여,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0-12).

 

주신 상황 속에서 주를 경외하고 말씀으로 순종하여,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