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대하 31:20-21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시 71:14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어느 날 우연히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저마다의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서, 누구는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하다 끝물에 만난 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애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누구는 둘 다 성공하여 각자의 좋은 직업과 돈벌이로 건물 몇 채에 아이 둘도 잘 자라는가 싶더니 작은 애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조현이 왔다. 그러니 이런저런 일이 어쩌다 발에 걸린 돌부리처럼 생겨났겠나? 더욱이 아이의 슬픔은 오래 된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일일이 그 원인을 찾아 분석한들 나을 수 있거나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라….
문득 누구의 이혼 소식과 또 누구누구의 아이들 소식에 새삼 내게 향하신 주의 은혜가 참으로 복이 많다 생각하였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우선 묵상하다보니,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5-6).
고로 오늘의 찬송과 기도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곧 우리의 기도가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에 올려져 하늘 보좌에 이를 때에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12).” 하여 나는 오늘 가정예배를 드리며, 저마다 각 가정의 사연들이 있는 가운데 우리가 이를 지키며 보존할 수 있는 것이 기도와 찬송이란 말로 설명하였다.
부부싸움이야 죽기 살기로 하다보면 어쩔 땐 열두 번도 더 헤어졌어야 할 것인데, 싸워서 감정이 상하거나 미움이 가득하면 기도가 안 나온다. 찬송이 드려질 리 없다. 그러니 내 속에 답답하여서도 이래저래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같이 등 비비며 살아가는 게 아니겠나? 하여 오늘 시편이 삶의 정답을 보여준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4).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를 보면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막연한 읊조림으로의 간구나 노래가 아닌 것을 되새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였고(29장), 온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다(30장). 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거나 그리 되기 직전의 형편인데도 이에 순종하는 지파와 조롱하는 지파가 갈리었다. 그럼에도 우선은 유다의 경건이 회복되었고, 히스기야의 구체적인 신앙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히스기야가 우선하여 성전 일을 맡은 자들 곧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을 회복시킴으로 가능하였다. 그들이 자신의 직분에 더욱 열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은 단순한 구호와 명령으로가 아니었다. 동시에 하나님께로 형통의 축복을 주심으로 이에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 곧 십일조가 살아나면서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 셋째 달에 그 더미들을 쌓기 시작하여 일곱째 달에 마친지라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쌓인 더미들을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5-8).”
이는 마음의 중심이 주께 있으면 주는 이에 상응하는 복을 더하신다. 먼저 저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킴으로 충만한 신앙심으로, 먼저는 외형적으로 우상을 타파 하였다. “이 모든 일이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1).”
이어 종교 개혁의 마무리 작업으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에 대한 직분을 회복하고(2-19), 개혁의 결과로 히스기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20-21).”
히스기야는 열조들의 패역한 우상숭배를 타파하려 무던히 노력하였다. “너희 조상들과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멸망하도록 버려 두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니라(30:7).” 우상을 숭배하여서 여호와를 진노케 하지 않으려고 히스기야는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먼저 우상숭배의 흔적을 일소하고(1), 남유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에까지도 행해진 이와 같은 우상 척결 운동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히스기야의 개혁 정신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음은 남북이 갈라지고 한 번도 행하지 않았던 ‘유월절 정신’을 복원한 것이다. 곧 저들은 어떤 민족인가? 속박과 억압의 애굽에서 구원 받은 속량의 민족이 아니던가? 출애굽 때에 따라 나온 무리로 인함인지, 120년의 노예 생활로 몸에 밴 습성 때문이었는지, 저들의 불신앙을 정화시키는데 무려 40년의 광야 생활이 더해져야 했다.
이때도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하시는 명령으로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13:3).”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하시고 이를 지키게 하셨지만, 삶이란 게 그런 것인지 사는 데 다들 정신이 팔려서 서서히 이를 잊고 말았던 것이다.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은 이를 구심점으로 하여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유다뿐 아니라 각 모든 이스라엘 지파에 공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앙을 회복하는 최종 목적은 우상숭배를 근절하고 참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이를 위해 히스기야는 오늘 본문에서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직책을 회복하고 일반 예배를 활성화시켰다(2-10).
히스기야는 분열 왕국이 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반차를 바르게 정립하였다. 이는 솔로몬이 먼저 한 일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또 그의 아버지 다윗의 규례를 따라 제사장들의 반열을 정하여 섬기게 하고 레위 사람들에게도 그 직분을 맡겨 매일의 일과대로 찬송하며 제사장들 앞에서 수종들게 하며 또 문지기들에게 그 반열을 따라 각 문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에 이렇게 명령하였음이라(대하 8:14).”
이것은 앞서 다윗도 그러하여서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에 따라 각 반으로 나누었더라(대상 23:6).” 그리하여 “아론 자손의 계열들이 이러하니라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라(24:1).” 이렇듯 버젓이 이어졌어야 할 저들의 사명을 부활시킴으로 올바른 예배 의식이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예배의 회복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지속시키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이러한 예배의 부활로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은 풍성한 물질적 축복을 받았다.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대하 31:10).” 그렇게 하여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돌아가게 하였다. 이는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하게 한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차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와 예물을 공정하게 분배토록 했던 것이다(11-19).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이와 같이 지속적인 지원이 가능하게 되자, 저들은 반차를 유지하여 발전시키며 각자의 중요한 역할을 성심으로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책임자들을 정하여 십일조와 예물을 관리하게 했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까지도 공평하게 배분토록 하였다.
결국 삶의 질서는 단순히 개혁이란 명분으로 파괴와 척결로 단숨에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어그러진 제도를 정비하고, 지속적인 참여와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는 올바른 형식이 내실을 다지면서 참된 참여와 봉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예배 의식과 신앙 질서는 정단한 보수와 생활을 지원할 때 가능하다. 나는 사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지만 신학 동기들이나 동생들의 목회를 볼 때도 부교역자에 대한 교회의 가혹한 헌신 강요는 궁극적으로 참된 헌신과 수고를 저해한다. 지금도 몇몇 동기들의 사연을 접하면 가령 부역자로 부임하면서 덤으로 사모와 자녀들의 헌신도 강요하는 것을 본다. 물론 충분한 생활을 보장하면서 그러면 모를까, 마치 한 사람 몫으로 둘 셋 그 이상의 인력을 착취하는 형국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담임 목회자와 부교역자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교회의 영적 수준이 어떠한지 알 것 같다.
결국 풍성한 물질의 축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더하시는 축복에 대하여 그에 따른 풍성한 연보가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야 옳다. 참된 믿음 생활이 허상을 추구하는 강요나 착취는 아닌 것이다. 유다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많은 십일조와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실이었다. 곧 교회가 먼저 담임 교역자는 물론 부교역자들에 대한 처우를 형평성 있고 질서 있게 하지 못할 때, 이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가끔 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밤낮 따로 없고 새벽제단은 물론 차량 운전까지, 마치 갑을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는 것은 이를 나누어서 더욱 모자람이 없이 헌신과 봉사가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려지게 하려 하심이다. 이를 가벼이 여기는 게 죄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교역자들이 탐욕스러워도 문제지만 교회가 일꾼들에게 너무 인색한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서로가 같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교회 사역은 군인이면서 농부면서 목자면서 곡식을 떠는 소와도 같은 것이다. 이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7-9).”
하여,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
마치 부교역자는 곧 있다 떠날 사람으로 여겨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곧 저들의 수고와 인내로 성도들이 더 좋은 꼴을 먹는다. 그러므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그러할 때,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 71:7-8).
가끔은 나의 사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려지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더러는 주 앞에 더욱 간절하여서,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2).
하고 기도함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더러는 너무 쪼들릴 때 행여 나의 궁색함이 주의 덕을 가릴까 하여 송구하고, 몸이 연약하여 난감할 때도 행여 나의 안쓰러운 모습으로 목사인 게 누구에게 짐이 될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더욱 간절하게,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4-15).
하여 오늘의 이 모든 형편과 사정이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7-18).
그리하여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3-24).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0) | 2025.08.24 |
|---|---|
|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0) | 2025.08.23 |
|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0) | 2025.08.21 |
|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0) | 2025.08.20 |
|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0) | 2025.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