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느 6:14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 92:15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사실을 언급하였다(1-7장). 그 핵심인 오늘 본문에서는 어려운 와중에서 성벽 공사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음을 서술한다. 그런데 성벽 재건 공사 과정에서 야기된 방해자들의 훼방과 그 집요한 방해를 고발한다. 즉 성벽의 완공 사실을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방해 공작으로(4장), 경제적인 이스라엘의 내부 문제(5장)와 공사 후 계속되는 음모를 오늘 서술한다.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6:17-18).”
보면 그 악성은 본질적으로 유전적이다. 저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름은 선지자들이었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14).” 이에 느헤미야에 대한 또 다른 적대 세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느헤미야는 여기서 이러한 사실을 언급함으로 성벽 공사가 단시간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강조한다.
저들은 유다의 귀인들이었다. 그들이 도비야에게 편지하였다.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 곧 오늘 이 공사로 행여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까, 권세를 잃을까 하는 정치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하여 저들은 느헤미야의 대적들과 내통하고 ‘귀인들’을 끌어들였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5:7).” 앞서 이러한 정치적 내부의 부패함을 지적한 데 따른 반감도 있었겠다.
이로써 저들 당대의 지도층은 느헤미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여러 방식으로 탐지하고 그것을 도비야에게 신속하게 넘겼을 것이다. 하여 도비야는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에서 손을 떼게끔 내부 공작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느헤미야 개인이 성벽 재건 상황으로 이득을 보려한다는 거짓 정보를 보강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가지고 협박하고 회유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19).”
그렇게 도비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와 얼마나 깊이 밀착되었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켰던 에스라의 개혁이 어느새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스 9, 10장). 그렇게 해서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느 6:18).
곧 ‘아라’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어떤 가족의 조상이다. 아라의 아들은 아라의 자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한편 ‘스가냐’는 동문지기였다.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3:29).” 곧 그의 아들은 성벽 재건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3:29). 그런 점에서, 스가냐 일가는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의 상류층으로 분류된다.
도비야는 바로 이 같은 유력한 가문과 정략적으로 결혼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하였다. 도비야의 아들은 므술람의 딸을 취하였다. 도비야가 이스라엘 백성 중 유력한 사람의 사위가 된 데 이어, 유력한 사람과 사돈 관계를 맺음으로, ‘므술람’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서 두 몫을 맡아 담당했던 제사장이다.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3:4, 30).”
여기서 ‘여호하난’은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이다. 즉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하는 것은 곧 ‘주인이 되다’, ‘지배하다’의 뜻으로, 유다 사람들 상당수가 도비야를 섬기기로 서약을 했다는 뜻이 된다. 도비야가 유다 사람들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동맹을 맺은 것은, 그가 산발랏의 고위 행정관으로서 예루살렘에 머물던 시절의 일이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총독의 자격으로 오기 전까지는 산발랏이 유다 땅에서 자신의 부하 도비야를 파견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이다.
이를 보면서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정치 상황과 각 진영의 논리를 생각하게 된다. 저마다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지만 실은 그게 다 기득권 다툼이다. 오늘 여기서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하는 데서 유력한 유대인들 중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자들이 도비야와 느헤미야 사이에서 매개자로 역할을 하려 하는 것을 보여준다.
무력으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고자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제 느헤미야를 음해하여 악의적으로 매장하려 하는 것이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느 6:5-6).” 그러니 세상에서의 정치란 게 얼마나 늘 같은 방식을 고수하듯 한 발짝도 더 나아지는 게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저들은 겉으로 우호와 친선을 가장하고, 위협적으로 여러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교란을 펴나갔다. 여기 본문에서 ‘선행’이란 내통자들이 도비야의 좋은 면을 부각시킴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그 중에 도비야의 스마야에 대한 뇌물이 자선이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12-13).”
그들이 이같이 거짓말을 한 까닭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도비야에 대한 경계심을 풀도록 하여, 도비야의 성전 재건 방해 운동을 성공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계속된 방해 공작과 연이은 문제 속에서도 공사는 완료되었다. 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1-4), 느헤미야를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려는 음모를 나타내기도 한다(5-9). 그렇게 느헤미야를 범죄자로 만들어서 정적을 제거하듯 하려는 음모도 드러났다(10-14). 그리고 성벽 공사 완료(15-16) 후 계속된 음모의 내용을 언급한다(17-19).
악은 집요하고 늘 똑같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 오늘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여기서 본문은 산발랏의 음모가 끈질기게 계속되었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 와중에 성벽 재건 공사가 여호와의 섭리로 완료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아무리 악이 더 악하게 굴고 교묘하게 훼방한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데 주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해 음모와 거짓으로 역적을 만들려는 음모가 있었으나 그럴 때 오히려 느헤미야와 믿음의 사람들은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9).” 곧 우리가 여호와께 대한 간구 외에 다른 길이 어디 있겠나? 여전히 계속되는 끈질긴 음모(10-13)와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기도는 어쩌면 비례한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14).” 곧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완성된 성벽 재건의 성공은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신이 집요하게 당한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 무던하였다.
결국 우리는 어떠하든지 신앙의 달음질을 멈추면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때일수록 자신을 돌아보아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에 먼저는 분이 나도 참아야 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그러므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어떻게 그런 상황에 그럴 수 있겠나? 할 때가 우리에게는 더 빨리 주 앞에 나아가게 하는 기회가 된다. 하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게 사람을 의지하려는 마음과 세상적으로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유혹에서 견뎌내야 한다.
가령 나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돌이키실 때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이제는 인정하며 감사한다. 하나는 부모님과 아들을 내 곁에서 떨어져 있게 하셨다. 당시 부친은 돌연 미국의 한 작은 교회를 담임하여 몇 년 나가계셔야 했고, 한참 사춘기였던 아들은 중3 초에 이런저런 일로 필리핀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생에게로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은연중에 나에게는 부모님과 아들이 의존의 대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저들 핑계로 나는 이에 따른 강권하심을 회피했을 게 뻔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내 곁의 은인들이 내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다들 멀어지게 하셨다. 그때는 마치 이 모든 게 억지스러웠고 더더욱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었다. 이때의 상황과 나의 심정은 시편의 고백처럼,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시 88:17-18).
다시 생각하지만 그때, 어쩌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돌이키실 작정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97학번으로 신학교에 편입하여 학부를 할 때는 더욱 더 기적적으로 그 일을 이루셨다. 그러나 그때는 내 곁에 나로 하나님 외에 먼저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들 있었다. 결국은 저들로 위로 받는 것으로 힘 입어 기적처럼 학부와 신대원을 다니게 하셨던 하나님의 기적을 저버렸다. 그렇듯 나의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기회는 결국 사탄에게 틈을 주는 일이었다. 하여 성경은 이르시길,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오늘 만약에 느헤미야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답시고 팔레스타인으로 사람을 보내 이방 나라의 왕의 힘을 빌렸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훨씬 더 수월하게 성벽 재건을 훼방하던 자들을 한 번에 제압하고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당시의 귀족들이나 방백들과 견주어 저들과 같이 적대적으로 대치했다면 훨씬 더 권위 있게 또는 힘들이지 않고 저들의 획책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 가운데 제일 가슴 아픈 일은 교회와 나름 존경할 만한 원로 목회자들이 세상과 결탁하여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몇몇 극 보수 교회나 목사가 그렇다고 하지만 어찌됐든지, 오늘 본문으로 비춰볼 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어쨌든 하나님 외에 좀 더 낫고 빠르고 안전한(?)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되었다. 오늘도 교회로 멸망의 길을 가게 하려는 게 사탄의 일이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8-19).”
결국 우리가 가는 길에서 세상을 피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것이 사탄의 올무가 된다. 지혜는 말하길,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시는 주의 말씀을 묵상하여,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그러므로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느 6:12).” 하는 말씀으로 묵상하며 주 앞에 앉았다. 곧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오늘도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말씀으로 말씀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에,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1-3).
할 때에,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5-6).
하여,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2-13).
그러므로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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