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 5:19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1:7
사람보다 무지하고 무책임한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새삼 느끼지만 점점 더 혼용된 사고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다. 자신들 먹고 살기 위해 기껏 이방 나라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그 이유인즉 흉년이라 사는 게 빠듯하였다. 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1-4).”
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쳐도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5).” 자녀도 종으로 팔고 밭도 팔자고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3-6장)에서 지금까지는 건축자들의 명단과 그들이 담당했던 지역(3장), 이방인들의 방해 공작(4장)에 대한 언급이었다면, 이어지는 이스라엘이 당면한 현재의 내적 문제를 기술한다. 앞서 서술된 외적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앞장은 유다 백성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그 외적인 곳으로부터 발생했던 문제를 본장에서는 유다의 내부에서 생성된 난제를 다룬다. 즉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내적으로 직면한 흉년으로 인한 기갈의 해결책으로 서로의 가족을 팔려고 하려는 문제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를 기술하고(1-5절), 이로 말미암은 문제를 해결하는 느헤미야에 대해 설명한 후(6-13), 그리고 그 해결의 요인으로 느헤미야 자신의 청렴성을 그린다(14-19). 느헤미야는 당시 유다 백성들이 직면해 있던 사회 문제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 해결 과정이 어떠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발생했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성벽 재건 공사와 관련한 대부분의 어려운 고비들은 많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성벽도 어느 정도 높이까지 쌓아졌다. 산발랏 일당의 무력시위로 인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났다. 따라서 대외적인 문제는 거의 해결되어 마무리 되는 단계에서 사회 지도층의 횡포로 인한 내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흉년이란 표현이 도출되고 있지만 본장의 문제는 느헤미야가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기 전부터 잠재되어 있던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즉 느헤미야가 귀환한 후 성벽을 재건하는 데 있어 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반의 경제 형편은 어렵게 되었고, 그러한 노역의 결과로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표면으로 노출되었다. 그런데 상류층 인사들은 불법적으로 여전히 부를 축적하여 먹고 사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실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여 그 원망은 고스란히 가족 공동체가 파괴되고 붕괴되는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심하게 민중 봉기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택함 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나타내야 할 이스라엘의 장래는 어두웠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극심한 내분으로 민족적 통일성을 상실한 채 여러 이방 민족들로 다시 흩어지게 될 것이 뻔하였다. 따라서 본장의 사건은 반드시, 그리고 신속하게 처리되어야 했다.
결국 사회적 불평등은 어느 시대에나 늘 상존하였다. 1절을 보면 ‘때에 백성들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는 그들 형제와 유다 사람을 향한 원망이다. 그것도 성전을 중건하는 중의 일이라, 그들의 노역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건 공사가 완료되고 약 12년 정도가 경과한 후였다. 오늘 내용은 훗날에 있었던 사건과 중첩되면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가난했고 부당한 노동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곧 그 형제와 유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하던 이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가난이 대물림되고 부유한 자들은 그들의 지위와 부의 축적으로 불공평한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그 빈부의 격차는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기근과 과중한 세금 등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을 때 부유한 자들은 동족인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도리어 착취하고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같은 일이라,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와서 돈이나 곡식을 빌릴 때, 이자를 받거나 전답을 저당 잡았다. 물론 그러다 가난한 자들이 원금이나 이자를 갚지 못할 경우 그들 자녀를 종으로 삼기도 하였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 같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공산주의였는데, 그러한 공산주의도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하며 몇몇 사회 계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난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 이래 그 어느 시대에나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아가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구원의 개념을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로 이해하고 있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참여신학, 해방신학 등으로 재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의 구원은 이 세상에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 당시 일시적으로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개인의 모든 소유를 교회로 귀속시켜 불평등을 해소하려 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일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결국은 그런 가운데서도 부유한 성도들의 철저한 자기희생은 또 다른 교회 권력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가 비대하게 부유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의 소외는 여전하였다.
이에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0).” 하는 말씀으로 성경은 앞서 명령하셨고, 그러나 그러한 현상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알게 하셨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하나님의 축복의 단면을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 연관지어 생각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게 우리 삶을 괴롭힐 뿐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하고 외치시는 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경제적 여유’로는 서로가 가난한 자를 돕게 하기 위한 것임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관념으로 그친다. 마치 성경에서 한 번도, 그 누구도 지키지 않은 희년에 대한 명령과 같이 공허하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우리는 각각 자신의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런 가운데 부와 명성을 축복의 한 축으로 여기는 한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그와 같은 빈부의 격차는 결코 해소될 리 없다.
사실 나로서는 부교역자로 활동한 적이 없어서 직접적인 경험은 없으나 동기들이나 형제들의 경험을 보면, 담임 목회자와 부교역자의 간극은 엄청난 것 같다. 사례비를 포함하여 교회에서의 예우나 그 처지는 물론 사역의 강도에 있어서도 더러는 종 부리듯 하는 담임과 부교역자 사이를 보면 씁쓸하기까지 하다. 나야 늘 가난에 익숙한 미자립교회로의 개척교회 목회지만 그래서도 말씀이나 사역에 구속은 받지 않았으니 속은 편한데… 더러 ‘내가 이런 일이나 하려고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나?’ 하고 갈등하는 동기들을 볼 때면 마음이 너무 아프기도 하다.
어느 시대나 어떤 구성원 사이에나 경제적 위기는 부유한 자들의 무관심과 착취와 관련 있고, 나아가 방관자로서 각자 모르는 척 하는 다수의 외면이 더 쓸쓸한 일이기도 하다. 하긴 큰 교회, 목회자들의 차량 배기량이 목회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는 아무개 교수의 말에 기겁을 한 적도 있기는 하지만… 다시 신명기의 말씀으로 짚어보면,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9-10).”
결국 오늘의 모든 게 하나님의 은총일 뿐인데, 하여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1-44).” 주께서 이 두 사람의 예를 보이심은 하나님께 드림의 정도가 무엇이 진짜인지를 묵상하게 한다.
우린 어쩌면 너무 가짜 신앙과 그로 인한 세상적인 여유로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가늠하는 일에 무덤덤해진 것은 아닐까? 분명 주님의 시선은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4).” 하여 어느 게 더 큰 천국을 차지할 지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1-22).”
돈이 사실 걸림돌이기는 하다. 그것이 사회 생활에서든지, 신실하게 주를 따르는 일에서든지, 하여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3-35).” 하는 바울의 시선으로도 이어져서,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귀로 듣고 머리로는 깨달아도, 가슴으로 느껴 적당히 덜어주듯 나누는 정도는 되겠는데… 내 것을 손해 보면서까지 남을 돕거나 이롭게 하는 일은 어렵다. 누가 말하길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당대에 다 부유한 자로 살지 않았는가? 하면서 이를 마치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사는 자의 필연적인 축복의 보상인 것으로, 이 땅에서의 축적을 정당화하였다. 그렇게 누구는 대놓고 십일조를 쪼개서 여러 헌금으로 나눠 내거나 이를 자신의 교회에 실제 다 드러내어 드리지를 못한다. 이는 곧 자신의 수입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어서 말이다. 뭐라 하기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결국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하셨는데도, 더 나아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보면 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대체로 다 돈이 문제다. 이는 죄악의 원천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그렇게 오늘도 여전하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게 더러는 돈 때문에 지옥 같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수 22:24).”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신 24:12-13).”
그러나 부유함이란 만족함이 없는 것이어서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6-17).” 하여 오늘 느헤미야는 책망한다(6-8). 동족에게 이자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7), 자비롭게 행하기는커녕 동족이 이방인에게 팔리는 것을 묵인하는 것을 개탄한다(8). 느헤미야는 대회를 열어 당시 부유층 인사들을 꾸짖음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설득하고 권고하였다(9-11). 그리고 당부한다.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10)."
하여 자신이 먼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은혜를 구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시 37:21, 112:5).
이에 오늘도 어김없이 시편으로 묵상을 정돈하며,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91:1-3).
이를 붙들고,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7).
주가 나를 지키심을 믿고 의지하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느 5:19).” 하는 느헤미야의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1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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