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하현. 2025. 9. 9. 16:19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느 3:1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시 89:5, 11

 

 

나이가 들면서, 곁에 노인들이 같이 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생활을 볼 때 ‘아, 하루를 사는 게 사명이겠다’ 싶다.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잠을 설치는 아버지와 늘 허약하여 금세 기운이 소진되는 어머니의 소식이 그러하다. 저들보다 열 살이 더 많은 장모를 모시고 살면서는 일일이 그의 거동이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보면 경이로울 정도이다. 힘겹게 몸을 보조 보행기에 얹고 바닥을 쓸듯 한 발 한 발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때의 그와 같은 직립 보행이 아직은 가능하여 감사하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어딜 가야 하는 처지라, 그나마 집안에서의 어기적거리는 움직임이 저절로 산다는 일에 따른 사명으로 여겨진다.

 

오늘 시인의 진술과 같이,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시 89:47-48).

 

그런 가운데서도 생을 다하는 일이 놀랍고 기이한 순종이 된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기 전에 이러한 감상에 젖은 것은 오전 내내 어디가 아파서 힘들다, 결국 점심께 진통주사를 맞고 와서야 조금 살만하여 이런다. 사는 일,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며… 그러는 동안 저마다의 맡기신 몸뚱이로 그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내는 일…….

 

느헤미야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묵상하면서, 성벽을 재건하는 자체가 귀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해야 하는 것과 그 일을 행하는 데 있어 전심으로 다하는 느헤미야의 사투가 주어진 오늘 우리의 성벽을 따져보게 한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하는 데 있어 그 과정에서 각자 맡은 ‘성벽재건 공사 공로자들의 명단’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건 공사에 있어 공로자들의 명단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그 의도가 선민 공동체의 온전한 회복을 암시한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사업이 아니라 주의 백성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성스러운 노역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헌신한 자들을 부각시키는 것은 이 일이 갖는 의미로써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먼저 1-5절은 양문에서부터 옛문 앞까지의 성벽 재건 공사 공로자들 주요 명단을 기록한다. 이곳은 성의 북쪽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적들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곳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성벽 공사는 힘들고 어렵다. 이곳의 성벽 공사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가문이 주도적으로 담당하였다.

 

이어서 6-13절은 옛문에서부터 분문에 이르기까지의 성벽 재건 공사 공로자들의 명단이다. 이곳은 성의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문득 그 직분들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이다. 교회에서의 직분과 같다. 상하관계의 서열로서가 아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공사를 담당하였다. 심지어 여인들까지 참여하였다. 다음으로 14-19절은 분문에서 군기고 맞은편에 이르는 지역의 성벽이다. 이곳은 성의 남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곱 구역 가운데 여섯 구역을 예루살렘 거주자가 아닌 지방 방백이 책임을 맡아 중수하였다. 끝으로 20-32절은 군기고가 위치한 성 모퉁이로부터 양문 앞에까지 이르는 지역의 성벽을 중수한 자들의 명단이다. 성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가장 범위가 넓고, 느헤미야의 탐사에서도 확인된 바 있듯이 가장 파괴가 심한 지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고, 심지어 다른 지역을 담당하던 바룩, 므레못, 탓습, 드고아 사람들, 하나나, 므슬람 등 지원하는 자들이 참여하였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던 선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성이 선민의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에 어어, 이렇게 다시 중건되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루살렘성의 중건은 성전의 재건과 더불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증거다. 멸망하고 사로잡혔던 이들이 돌아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외형적으로 다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1절에 보면,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하는 말로 시작한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팔레스타인에 귀환했던 대제사장 ‘예수아’의 손자다.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고(12:10)” 나중에 그의 손자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고(13:28), 또한 그는 이방인 도비야(2:10)에게 성전의 방을 내어줄 만큼 산발랏 일당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13:4, 7).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아십이 처음에는 느헤미야를 도와 헌신적으로 재건 사업에 참여하다가 나중에 산발랏 일당에게 매수당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불온한 마음을 가진 채 성들의 눈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이 사역에 참여하였을 것을 추측하게 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제사장이 재건 사역에 협력하였음을 느헤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먼저 부각시키려 했다.

 

그 형제 제사장들 곧 이들을 ‘엘리아십’의 친형제들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엘리아십처럼 아론의 후손들로서그 사역을 맡은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스 3:2)” 그렇게 저들이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였다.

 

양문은 예루살렘의 북동쪽 모퉁이에 위치했다. 희생 제사에 소용되는 양과 염소들은 이곳을 통해 들어갔다. 이 양문을 통해 들어간 제사용 짐승은 이 문 옆의 못에서 씻겨 성전으로 옮겨갔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요 5:2)” 할 때 여기서 양문은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 이것을 성별하였다는 것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재건 사역에서 그들이 대표 자격으로 하나님께 바쳤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이방 여인을 취한 사실로 인하여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명단을 제시하면서 그 중 유독 제사장들만 속건제를 드린 사실을 언급한 것과 같다.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스 10:18-19)” 즉 성벽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는 양문 서쪽에, 하나넬 망대는 어문의 서쪽에 각각 인근한다. 이 두 망대 사이는 짧은 성벽과 그 중간 어문이 있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북쪽 성벽의 재건을 담당한 것은 그곳이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로 제사로 드려지는 동물들이 출입하고, 앞서 씻기고 대기하는 장소로 성전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누가 어딜 얼마나 맡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맡기신 구역(삶의 반경)에서 주신 바 그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참여하여 양문과 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델 망대를 재건하였다.

 

곧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신 생을 다한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으로 또는 부모로 한 생을 다하기까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명을 맡기심으로 주께서 이루시고자 한 뜻이 값지고 소중하였다. 즉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바로 그 주께서 사도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하심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를 감당하심인데,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6).” 하는 이 원리는 우리가 각자의 생을 사는 데 있어 ‘내 것으로의 생’이 아니라, ‘맡기신 자의 것’으로서 오늘 이 육신도 생활의 여러 여건과 환경도 다 주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일갈하시길,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면 오늘 우리가 주신 몸으로 주신 처지에서 저마다의 생을 다하는 것은 다 주의 뜻을 이루려함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곧 더러는 내 뜻에 반하는 일거나 혹여 마뜩치 않은 일이라 해도, 이를 통해 주가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곧 인생이었다.

 

이러한 인생으로 우린 우리가 누리게 될 영생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맡은 자들로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주신 바 하루하루가 천 년이 되고 만년이 되어 우리에게 있는 영생을 이루는 것이다. 이에 주님은 우리가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를 통해 오늘 각각 저마다의 성벽을 중축하고 맡은 구역을 성별하여 그 사명을 다는 데서 짐작하게 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이런저런 사정과 역할과 그에 따른 순종에서 누구는 더러 이탈하여 무리를 떠나기도 하겠으나, 그 결국은 두렵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다시 말해 끝까지 주의 일에 참여하는 자로 생을 다하는 자도 있고 도중에 세상으로 가는 자도 있겠다. 더 많은 이들은 아예 이 일을 반대하여 훼방하거나 무관심할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알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8-10).”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오늘도 시편의 시선으로 본문을 묵상하여,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 89:1).

 

하고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더러는 주신 상황이 힘에 겹거나 나 하나 건사하기조차 어려울 때도,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2).

 

하고 주의 선하심을 붙든다. 언젠가 맡긴 맡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똥싸개’가 글쓰기를 하러 오기로 했다. 지능이 떨어지고 조울증도 있어서 종잡을 수 없는 아이라 지레 자신이 없기는 하지만… 나는 나를 비롯하여 내 곁의 모든 영혼들이 상한 영혼으로 갈 곳 잃은 모습을 본다. 누구에게도 말하길 나는 내가 의사가 아니라 저들과 같은 환자여서 때로는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아니면 뭐라 거들거나 참견하거나 마치 가르치려고 들 텐데, 서로가 상한 영혼으로 우리는 다 ‘아픈 사람들’이다. 무너진 성벽 같이 내 앞에 어느 아이가 혹은 60을 넘긴 아주머니가 있다. 또는 깊은 대화가 거의 어려운 아무개도 있다.

 

그러니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나는 어찌 할 수 없어서 어제 느헤미야와 같이 묵도하며 그들, 저 상한 영혼들 앞에 선다. 주일 날, 누구와 대화하다 내 속에 화가 들끓는 것에 놀랐다. 말귀가 통하지 않는데 뭐라 가르치거나 고치려고 하다 보니 서로의 말에 엉뚱한 데서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때도 새삼 알았다. 나는 저와 같이 상한 영혼으로 주 앞에 서야 하는 것이라, 우리가 서로 아픈 사람들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이번 주에 아이가 온다는 말에 어쩌나… 하고 걱정이 먼저 앞서다가 오늘 말씀 앞에서 아, 하고 손뼉을 친다. 나는 다만 내 앞의 허물어진 성벽을 쌓으면 된다. 이때에 할 일은,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5-6).

 

내가 뭐라서 이 일을 맡기심이 아니고, 이 한 생을 통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건설되는 일이었으니….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8).

 

그리하여 나는 이 말씀만 붙든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1, 24).

 

그리하여,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