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하현. 2025. 9. 13. 16:22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느 7:5-7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 93:5

 

 

성벽 재건(1-7장)과 부흥 운동(8-13장)에 관해 증거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전반부의 마지막 부분으로 상대의 집요한 방해와 음모 와중에도 성벽 재건 공사가 무사히 완결된 후 예루살렘 성내에 직면했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행정적으로 정비하고 대처하는 내용이다.

 

곧 성벽이 완공되고(1-4),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세운 대책을 나타내고 있다. 성벽 완공을 축하하는 낙성식에 대해 봉헌이 뒤로 미뤄진다(12:27-47). 다른 복잡한 문제를 언급한다. 그간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 여러 난관을 거쳤다. 물론 그 기간은 52일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보면 52일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극한의 불안과 초조한 가운데서 견디어온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성벽 공사 기간을 52일간이라 말하지만, 이 기간은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의 믿음은 훌륭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곧 우리에게 주어진 날의 고통은 상대적인 시간을 계산할 수 없고 저마다의 절실함으로 와 닿는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곧 우리로 힘들게 하고 어지럽히는 것은 수없이 많다. 성벽을 재건하는 동안 피곤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백성들을 즐겁게 하고 위로하기 위한 낙성식 거행은 필요하였다. 그러나 오늘 느헤미야는 그 시점에서 낙성식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인구가 너무 적어서 예루살렘을 방비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성벽 공사는 마쳤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이 완공되었음에도 바로 낙성식을 하지 않고, 인구 재배치를 위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인구 재배치가 완료된 뒤 성벽을 힘써 재건한 본연의 의미가 살아난다고 판단하였다. 어차피 예루살렘의 보호를 위해 성벽 재건을 시도했다면, 이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행적 여건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가 완성된 성벽만큼이나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8-10장) 후에 성벽을 봉헌하려 했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느헤미야의 판단과 그의 조치는 타당하였다. 회중의 의향만 중시하는 것은 훌륭한 지도자의 자격이 아니다. 바울도 이를 알고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고 강한 어조로 성도의 자세부터 바로 잡았다. 곧 성도들은 자신을 돌아보아 마귀의 미혹을 물리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6:1).”

 

결국 오늘 본문에서는 새로운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느 7:3-4).” 즉 성벽 재건을 힘겹게 완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완료한 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6:16).” 본문은 성전과 성벽을 재건 후 그 외형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성문을 담당하는 사람을 선발해 세워야 하는 행정적 조치가 필요한 것을 알았다.

 

성벽 공사를 완료한 후 계속되는 음모에 대해 앞에서 살폈다.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6:17-19).” 이에 그에 따른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느헤미야는 귀환 직후 오직 성벽 재건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당시 최대의 문제는 성벽을 재건하고 이후 예루살렘 시(市)의 공동체 생활을 어찌 행정적으로 관리하고 조치해야 하는지가 중요해졌다. 아무리 훌륭한 성벽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해도 정작 그 성벽을 활용하여 성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훌륭한 행정은 걸맞은 지휘관이 있어야 하고 그들 수하에 병력이 있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하면, 그 결과 예루살렘에 성벽이 없었을 경우와 다를 게 없다. 처음에는 산발랏 일당도 자신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공동화된 예루살렘의 실상을 파악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처럼 예루살렘을 약탕하기 위한 여러 공격이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1:3).”

 

다양한 공성(攻城) 무기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적들이 속출하였고, 더욱 잔인하게 그 일은 시도될 것이어서 산발랏 일당은 자신들은 느헤미야에게 복수하려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예루살렘이 공동화된 지경에 여태까지의 무사안일주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지도자는 조직 그 자체의 힘이 아닌 그 조직에 속한 개개인의 힘에 의해 조직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그러므로 더는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으로 국가 및 교회를 멸망케 할 수는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오늘 본문은 1차 포로 귀환 때 돌아온 이들의 명단과 그들 수장을 정검하였다.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느 7:6-7).” 하고 충성할 수 있는 인원을 점검한 것이다. 곧 1차 귀환자들의 명단을 서술하면서 문제의 실마리를 해결하려 했다.

 

성벽 증건 후 부딪힌 예루살렘의 인구 감소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느헤미야가 거시적 관점에서 대처한 방안은 그 다음 구절들로 알 수 있다(5절-10:39). 다시 말해 당시 직면한 사회 문제에 느헤미야는 인구 이주 후 복원될 수 있는 정책과 백성들의 신앙 운동을 대처해야 했다. 그 방안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언급한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5).”

 

곧 1차 귀환자의 명단을 살피고(6-73), 확실한 계보의 명단을 확보하면서(6-60), 불확실한 계보의 명단을 구분하였다(61-65). 그렇게 귀환자의 총수를 언급한 후(66-69), 성전 재건을 위해 드린 헌물의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70-73). 느헤미야는 당시 직면한 예루살렘의 인구 감소 문제를 1차 귀환 때 인구 분포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예루살렘 성안의 감소된 인구를 늘리기 위해, 1차 귀환 때 명단을 통해 백성들 자신들의 조상이 할당받아 점유해 살았던 곳을 상기시키며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2, 3차 때의 귀환자 명단이 아닌 1차 때 명단을 언급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성벽 재건과 하등에 관계없는 성전 재건 때 드려진 헌물의 종류,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스 2:68-69).” 이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느헤미야는 성전 중건을 위해 바친 헌물의 내용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언급을 통해 1차 귀환자들이 가졌던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대한 강한 열망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드라크마와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느 7:70-72).”

 

오늘 이 귀환자의 명부는 에스라서에 언급된 명단과 약간 차이가 있다(스 2:2-67). 이 둘을 비교해 볼 때 몇 사람의 이름이 그 철자에 있어 다르며, 숫자의 차이도 있다. 이 같은 차이는 각 조사자들이 관점을 달리하여 계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명단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장애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토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에스라서와의 숫자상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숫자의 차이도 별로 크지 않다. 즉 교회 내의 모든 일은 신앙적이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 18:16).” 또 모든 성도들은 옳은 일로 판단되는 것에 대해 어떤 난관을 무릅쓰고서라도 실행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이에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하는 부분으로 이 모든 문제와 여전히 미진한 상황들은 별 거 아니게 해결된다. 곧 교희 직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경외심과 충성심이다. 엄연히 성경의 요구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그랬을 때,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곧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잘 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중심이 어떠한가? 하는 데 있겠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는 우리의 겸손을 담보로 하여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할 수 있다, 하신 이가 모든 걸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3-14).” 즉 내가 할 수 있고 없고가 아니라, 우선은 충성으로 주를 신뢰함이고, 다음은 주가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더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사실 그 문제는 이제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와 같은 말씀으로 보면서 확신한다. 가령 내가 들은 어느 장로님의 일화를 기억한다. 내가 듣기로 저는 사업가였고 사업의 목적은 일생을 선교지에서 보내다 은퇴 후 귀국한 이들의 정착을 돕는 일이었다. 젊을 때는 도심 어디에 건물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의 사업장 외에 다른 호실은 선교사 가족들의 숙박시설로 제공하였다. 한국에 정착할 동안 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어찌하다 사업 대금으로 대신 받게 된 강원도 어느 맹지를 개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몇 채의 집을 지었고 귀국한 선교사들 각자의 재능을 살려 영적으로 상한 심령들을 위한 치유 마을을 조성하여, 선교사들도 생활하고 주님의 나라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일생을 바쳐 모았던 것을 투자하여 그리하였던 취지가, 선교사들 사이에 내분이 생겼고 어찌하다 서로 반목과 대립으로 얼룩져 그와 같은 취지는 무산되고 오히려 엉뚱한 송사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 마디로 뜻과 달리 실패했다. 

 

외형적으로는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일 것 같고, 그 결과만 놓고는 옳으니 그르니 판단하기 딱 좋은 일이 되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일을 전해 들으며, 그러한 실패까지도 주가 하신 일이라 생각하였다.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늘 이럴 때 주목하게 되는 인물이 나에게는 소경 장로이다. 저는 평생을 나병환자로 소경이 되어 사지육신도 가누기 어려워 여수 저 구석진 나환지촌 교회에서 몇몇 소경 장로들과 성경 66권을 암송하다 생을 다했다. 또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를 꿈꾸던 브레이너드는 국교회 목사가 되려다 당시에는 한직이었던 선교사로 밀려서 인디언 마을에 가서 고작 5년을 선교하다 폐렴에 걸려 스물아홉 살에 죽었다. 모두 다 실패 같다.

 

이런저런 결과론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뭔가 그럴듯한 업적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 이목을 끌 정도로 어떤 성과가 있어야 나름 성공한 목회자로 간주된다. 우리의 이런 사고방식이 오늘 날 미치광이 극우, 극좌 목사들을 배출하고 있다. 저들은 마치 자신들이 내린 A 아니면 B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 짓는다. 그런 교회로 사람들은 쓸려 다닌다. 애매한 복음을 확정적으로 전파하는 설교에 열광한다. 이는 다 사탄의 술수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제한하는 게 가능하다? 이미 우리가 단정하고 입증한다면, 그런 하나님이라면 더는 하나님이 하나님일 수 없다!

 

내가 아는 복음은 묵묵히 노아와 같이 막연하다. 무려 120년을 방주나 지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길을 나서는 미련한 아브라함이 훗날에 기껏 약속으로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데도 순순히 모리아 산을 오르는 얼간이짓을 어찌? 순종은 참 무모하고 어리석고 한심해 보인다. 이를 믿음이라 하기에는 요즘 같이 확증을 원하는 시절에는 차라리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는 게 낫다. 그렇게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고로 내가 더는 내 것이 아니라는 복음이 나는 참 좋다. 내가 주의 것이면, 나의 실패나 엉터리 같은 결과도 주의 것이다. 내가 책임질 게 아니다. 고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시 93:1-2).

 

어차피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오늘 나로 여기에 두신 것이다. 나는 다만 이 자리를 지키며 방주를 짓든지, 갈 바도 모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든지, 그러다 쓰러지고 넘어져 죽도 밥도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우린 그렇듯 꼭 뭐가 돼야 하는 게 아니다. 뭔가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 느헤미야의 마음처럼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하는 것으로 오늘, 여기에서, (하기 싫은) 어느 아주머니의 글쓰기를 보거나 듣고, 묵상을 글로 쓰고, 혼자 또 이렇게 하나마나 한 일 같은, 글을 쓴다. 하여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4).

 

난 다만 이를 목격하고 적고 묵상하면서,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