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하현. 2025. 9. 15. 17:34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 9: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 95:1-2

 

 

다들 나름의 관점이 있고 주관에 따라 판단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저마다의 그것은 일종의 세계다. 망상도 그러해서 스스로 그리 여기는 것으로 세상을 감당하고 산다. 같은 사안을 놓고 저마다의 관점과 판단으로 이를 가름한다. 앞장에서 백성들이 에스라의 지도 아래 초막적과 나팔절을 지키며 ‘잃어버린 말씀’을 찾았다. 이어서 오늘은 금식을 결의하고 회개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곧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당시에 학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같이 했던 것이 복이다.

 

백성들의 금식과 참회의 장면을 언급하고(1-5),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느헤미야는 밝히려 한다(6-38). 보면 우리는 무엇이 드러났는데도 이를 인정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 모든 사람의 경우 증거를 바탕을 하는데도 수사 받으러 들어갈 때까지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결국은 모든 게 다 밝혀지고 나면서 체념한다. 혹은 더욱 억울해 한다. 지옥은 마치 이와 같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목청껏 소리치는 아우성의 구덩이가 아닐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러나 끝날에 그 심판은 단호하여서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그런 가운데서도 저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결코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곳이 지옥일 터.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이 중요한 것은 회개의 순간이다. 모두가 돌이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럴 수 없는 게 죄다. 지옥의 한복판은 회개가 없는 곳이다. 본문은 이에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철저한 회개가 먼저였다.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1-2).” 먼저는 애통함으로다. 스스로 티끌을 무릅쓴다. 다음은 절교다. 같이 어울리던 것들과의 절연이다. 그리고 자복이다. 자복하지 않는 사과는 위선이다. 그리고 나면 찬송이 나온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5).”

 

주를 인정하는 데서 애통함도 자복도 가능하다. 이는 말씀으로의 성찰과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것으로 회개는 이에 따른 동시적인 일이다. 하면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하실 때에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곧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은 가능하였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아침을 먹고 장모와 아내와 앉아 매일 예배를 드릴 때 나는 열의를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 주가 주시는 그때의 성령의 임하심은 나로 놀라게 하기도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으로 이를 풀어서 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때는 말이다. 말씀으로 우선하여 죄를 인정할 때 우리의 자복은 죄와의 단절을 동반한다. 곧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8-19).”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진리, 곧 말씀이 주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모든 자백은 위선이다. 고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러한 말씀을 듣고도 서슴지 않고 어울려 좋은 사이로 지낸다면 세상과 구별될 게 무엇이겠나?

 

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이어서 아브라함의 소명부터 광야 40년의 역사를 회고한다(6-22). 그런 뒤 가나안 입성 후 계속된 선조들의 반역을 직고한다(23-31).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불순종을 인정하는 것이다(32-38). 결국 이러한 내용의 의도는 언약의 갱신이 필요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부각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에 새로이 결단하도록 촉구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는 게 죄다. 죄인으로 생이 끝나는 것은 회개 없는 영혼으로 영벌에 이르는 일이다. 저는 이 땅에서도 죽을 때까지 자신을 할 만큼 했고 잘못한 게 없다. 그런 점에서 오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백성들과 그러므로 얻어지는 신앙 회복의 상관관계를 볼 수 있다.

 

이 시점이 비록 초막절 행사가 완전히 끝난 22일의 이틀 후였지만 그 행사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를 위한 국민적 회집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전 단락에서 언급한 것 같이 8장에는 언급되지 않은 대속죄일의 준수가 본장에서 회개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8:13-18). 7월 10일에 지켜졌던 대속죄일의 행사가 본장 전체에 흐르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여호와의 성일에 관한 분위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8:8-9).”

 

이에 앞장에서는 생략되었던 본장의 회개가 이를 대치한다. 그러므로 실제 본문의 회개 운동은 단순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 관계를 회상시켜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9:38).”

 

레위기의 기록에 보면 대속죄일에는 백성들이 노동을 금지하고 하루 동안 안식일로 지키며 자신들의 죄를 각성하며, 스스로 괴롭게 해야만 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레 16:29).” 이 날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할 수 있는 날이다.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자기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거룩한 옷을 입고 지성소를 속죄하며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32-33).”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고 자기와 권속을 위해서도 속죄하는 날이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11).” 본문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괴롭게 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느 9:1).” 그렇게 죄를 회개하였다.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2-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상하는 기사를 중점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백성들의 국가적 회개 운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공동체적인 신앙이 회복되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이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는 오늘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요즘 나의 우려는 실용주의라는 말과 국가적 실익을 우선으로 한다는 정책에 대해, 그러다보니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면 사상도 이념도 신념도 모두 별 것 아닌듯… 그것이 돈이 되고 홍보가 된다면 K-문화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실용외교가 허용되는 것은 아닌지! 교회도 종교도, 신앙도 철학도 이 모든 것으로 빨려들어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너무 폐쇄적으로 여겨진다. 하나 성경은 엄연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오늘 아내와 산책을 하는데 가는 길을 붙들고 여자 둘이 모 종교 단체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다며 붙들었다. 나는 그냥 무시하고 가는데 뒤따라오던 아내가 일부러 그러는 듯… 그거 이단이잖아요? 알 사람은 다 아는데, 본인들만 모르시나 봐요? 이단들이니까 이단 아니라고 이렇게 나와서 사람들 붙들고 홍보하는 거 아니에요? 하면서 마치 천진한 아이처럼 당돌하게 되물으며 왜 굳이 설문조사를 하는지? 전도하려니까 찔려서 그러는지? 하고 물었다. 두 여자는 당혹스러워하며 그런 게 아니라며 따라붙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멀찍이 서서 아내의 수작을 구경하였다. 아내야말로 일부러 그러는 것인 줄 잘 안다.

 

영적으로 건강하면 말씀을 즐겨 듣고 분별할 줄 안다. 하여,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 119:97)

 

그것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이와 같이 오늘 본문도 회개와 동시에 송축이 나오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6, 17).”

 

궁극적으로 주의 긍휼이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있을까?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렘 50:6).” 그러나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5-6).” 이와 같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이 없다면 우린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고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가 살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제시한다.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느 9:8).” 그렇게 해서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17).”

 

고로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19).”

 

하여 오늘 우리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5).” 하고 찬송해야 한다. 이에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6).” 곧 우리가 죄악 중에 있을 때에도,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17).”

 

하여,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31).”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하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 95:1-2).

 

왜냐하면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3).

 

이를 알 때 오늘을 바로 알고, 말씀으로 살면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6).

 

이는 주를 경외함으로,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7).

 

우리로서는 그리할 것이라,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2).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8, 11: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