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하현. 2025. 9. 17. 16:37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느 11:4-5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 97:1

 

 

아닌 게 문제가 아니라,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게 문제다. ‘아닌 것’에 대하여는 그렇다, 아니다 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하여 예수님도 이르시되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타종교에 대해서나 복음을 아예 부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뭐라 할 필요조차 없다. 예수님은 그런 저들에게 나서 입증하고 설득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다만,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막 6:11).”

 

오히려 그 일로 우리의 자세를 바로 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심지어는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눅 10:11).” 하고 돌아서야 한다. 가타부타 말할 가치도 없다. 그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들을 귀가 없어서 안 듣는 것은 못 듣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뭐라 애쓴다고 될 게 아니다.

 

아이들 결혼 문제로 누구와 대화를 나눴다. 흔히 요즘 식으로 각자 아이들이 들어가고, 각자 혼인 서약을 하는 것으로 주례도 없다고 했다. 다만 아쉬우니 축사가 있는 모양인데 각각 부모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뭐라 덕담을 하는 정도로 끝이다. 나는 굳이 뭐라 할 게 아니라서 듣고만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하고 물어서 ‘그건 아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서로 섬기는 교회가 있는데 목사님도 모시지 않고, 말씀도 없이, 대체 누가 어떤 말로 덕담을 한단 말인가? 요즘 세대들이 어떻고, 하는 말에 나는 옳지 않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면서 줄줄이 자기들 좋은 행사는 다 하면서, 무슨 공연이니 연주니 축하송이니 하는 따위와 뒤풀이까지… 그러면서 어른의 축사는 싫고, 더욱 믿는 자들이면서 예배도 없이 무슨 결혼을 한다는 것인지?

 

나의 강경한 말에 우리 아이들이 이를 거부하고 요즘 아이들처럼 유행이라 그렇게 하겠다면 어쩔 거냐는 질문에, 나의 생각은 엄연히 성경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였고 그런데도 끝내 자기들 좋을 대로 하겠다면… 어쩌겠나? 그 또한 자신들 판단과 고집을 따르겠다고 거절하면,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분명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정작 우리의 문제는 혼합주의다. 안 믿는 자들의 유행이야 어쩌겠나만 내 자식들까지 그러겠다면… 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듯 나는 주장하고 그래도 아니라면 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앞서 이와 같은 일련의 화두로 점심께 나눈 대화에서 나의 생각은 성경으로 더욱 뚜렷하였다. 느헤미야서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8-13장) 오늘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율법의 해석(8장)과 언약의 갱신(9-10장)을 통해 ‘영적으로의 각성’을 살피게 한다. 곧 앞서 나의 에피소드는 영혼의 문제이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은 철학과 다르지 않고, 철학은 개인의 신념일 뿐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이에 신앙의 바탕은 순종이다. 오늘부터 유다 민족의 신앙적 자세에서도 이와 같은 순종을 기초로 한다(11-13장). 이 순종의 내용은 언약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이난다.

 

하여 오늘 가정예배 때,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하실 때 굳이 왜 영원하신 하나님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되셨나? 나는 이 처음과 마지막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한한 시공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은 시공간 그 자체에 아무 의미도 받지 않으신다.

 

결국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는 데 있어 그러한 인구 재배치 사업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한다. 곧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거민을 증원하기 위해 느헤미야가 전개한 사업을 눈여겨봐야 한다. 곧 성에 재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을 통해 밝히는 데 있어,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1).” 이는, 예루살렘의 거민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7:4).” 그러한 실태로 인하여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였다.

 

지도자란 솔선수범할 수 있는 자들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앞서 느헤미야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상류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2:16).” 그러다 이번에 언약을 갱신하면서 타 지역으로 가서 살던 일부 지도자들까지 일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스 10:14).”

 

하여 어제 그제 눈여겨 본 바,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느 9:2).” 먼저는 이방인과 절교를, 그리고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10:28).”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29)” 그리하는 것으로,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30).”

 

하여 나는 우선하듯 믿는 가정의 믿는 사람과 교제하기를 아이들에게 부탁하였다. 그게 안 되면 전도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곧 ‘느디님 사람들’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로, 어찌됐든 주의 자녀이면 돌이켜서 주를 찬송하게 할 것을 믿지만…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의 생을 돌아봐도 그 길이 너무 멀고 또한 여전히 가볍다.

 

그렇게 하여 텅 빈 예루살렘에 백성들을 재배치하면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곧 믿음에 따라서 자원하는 그러한 마음이 순종이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3).” 하고 이어지는 명단으로 일일이 거명되는 것이 그 중요성을 알게 한다.

 

앞서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1)” 하는 내용으로 볼 때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살던 백성들의 10%를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은 분명하고, 이때 가족 전체가 이주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다시 ‘거룩한 성’으로의 예루살렘을 이어가는데, “거룩한 성에 레위 사람은 모두 이백팔십사 명이었느니라(18).”

 

곧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사 48:2-3).” 이러한 일의 주체가 누구인지 우린 확실히 알아야 한다. 즉 시대에 따라, 요즘은… 하는 따위로 허용할 수 있는 게 있고 절대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누구에게 이르길,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비혼주의자가 있고, 심지어 혼자 살길 원하면서 아이는 갖고 싶어 하는 자도 있는데 이를 그냥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겠나? 동성애는 물론 소위 성소수자를 운운하여 인권 타령을 할 거면서 그런 걸 어떻게 교회 안에서 타협과 논의의 주제로 삼을 수 있겠나? 물론 바울 사도의 직언과 같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혼자 살고자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치는데, 대놓고 하는 소리가 결혼은 싫고 연애만 하겠다고 하는 소릴 버젓이 한다. 결국 동성애도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것 아닌가? 동성으로 사랑 그와 버금가는 우정도 있는데 굳이 동성끼리 사랑을 운운하는 것은 성관계 때문 아닌가?

 

유전적으로니 가치관으로니 하는 따위는 결국 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이는 이성애자나 동성애자가 둘 다 죄다. 처음 사람 아담도 결국은 하나님보다 여자를 더 사랑해서 그 사달이 난 것이지 않은가?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그 은혜 안에서 사랑하였다면 설령 여자가 행위언약 때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한 말씀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해도, 아담은 그때 뭐했나? 그때 이를 거절하고, 회개하였으면 어땠을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해서였다.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인 것은 비록 이방 대적들에 의해 훼파되고 늘 위협이 많던 곳이긴 하지만 예배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의 거주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3-24).” 고로 오늘 여기, 내가 지금 서서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쓰는 이 교회가 예루살렘이다. 수천 년 전 느헤미야가 개혁한 성전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로부터 내려올 거룩한 성이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10-11).”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 122:6-9).

 

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안에 정착한 자들의 명단을 언급한다(느 11:3-24). 그리고 성을 중심으로 그 밖의 지역의 이름을 서술한다(25-36). 느헤미야가 이처럼 공들여 신경 써서 인구를 재배치한 것은 그 시점에 여러 종교 행사가 거행되었다(8-10). 곧 신앙은 의식과 행사로 지켜야 할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저 막연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다. 늘 내가 안타까워하는 아무개는 코로나 이후 여전히 교회에 안 간다. 그러면서 줌으로 예배를 ‘본다.’ 나름은 누구보다 믿는 사람이라 여긴다. 교회는 안 다닌다. 그러니 성도의 교제가 없다. 찬양도 설마, 혼자 집에서 줌을 켜고 하겠나? 그것 모르겠고, 저가 믿는다는 것은 가짜다. 사랑한다면서 같이 안 살아도 되는 그런 사이의 부부 같다.

 

오늘 여기서 인구 재배치 사업이 느헤미야에게 있어 종교 행사, 곧 신앙 부흥 운동 뒤에 있었다. 곧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인구를 이동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인구 재배치 사업은 자칫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또한 그들의 신앙적 순수성과 통일성을 유지시켜야 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이는 교리나 사람의 해석이 아니다. 하여 사무엘은 가르치길,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그러므로 예수님도 겉치레를 경계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의 실태를 바로 보게 한다. 곧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곧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즐기는 우리 나름의 판단과 그 즐거움은 잠깐이다. 근본도 없고 신앙도 없다면 모를까, 한 가정을 이루는 일에 있어 저들끼리 좋다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그럴 거면 차라리 안 믿는 자들로 살든가!

 

결국,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 97:1).

 

주가 아니시면, 아무렴 어떻겠나? 개돼지로 살든지, 한낱 안개처럼 쓸려 다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들…! 다들 어떠하든지,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8-10).

 

그리하여,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