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하현. 2025. 9. 18. 16:44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 12:43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 98:1

 

 

난 사실 늘 황송할 뿐이다. 한 게 너무 없고 할 수 있는 것 또한 너무 보잘것없어서, 더욱이 자식들에게 늘 그러하다. 교회에는 말할 것도 없다. 늘 주 앞에 송구하고 죄송하다. 은혜로밖에는 달리 내 주장을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제 그런 대화, 요즘 세대들의 결혼관과 그에 따른 문화랄까 어떤 행태에 대해 실상은 자식들에게조차 나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하다못해 조카 누가 결혼을 하는데 아내는 나 몰래 백만 원을 만들어주었다고 나더러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우리로서는 큰돈이라 그걸 어찌 마련했는지, 하고 묻지도 못했다. 하물며 자식이 결혼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냉장고 하나 사 줄 능력이 없다. 딸애는 본인이 대학 졸업 후 모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민망하고 면구스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예식에 있어 어제 나눈 나의 입장을 아내는 저녁에 딸애에게 말했던 모양이다. 아내 앞에서야 강경한 어조로 나의 의견을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 없는 성혼이 말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딸애가 아침에 출근하고 긴 문자로 카톡을 했다. 자신들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예배로 서로의 시작을 주 앞에 올리는 것으로, 그 애도 그리 생각한다며 혹여 내가 우려하고 있을까 하여 문자를 보낸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지 한 번도 입학식은 물론 졸업식에도 가지 못한 처지라 늘 미안한 마음뿐인데…. 오히려 딸애의 위로의 문자와 이를 당연하고 여기며 믿고 섬기는 그 신앙에 감동하였다. 고마웠고 감사하였다.

 

우리 앞에 산적한 문제는 저마다의 어려움이다. 그게 무엇이든지 누구는 그래서 주를 더욱 의뢰하고 누군 그래서 주를 더 멀리하고 자신이 알아서 한다. 나로서야 입이 열 개라도 늘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특히 아이들 일로는 그저 늘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고 주께 황송할 뿐이다.

 

이를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연결 지으면 포로에서 귀환 후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직면한 경제적 문제(5장), 예루살렘 성안의 공동화 문제(7, 11장), 백성들의 영적인 문제(8-10장) 등으로 사람들과 갈등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주 앞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은 완성된 성벽(6:15-19)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데 있어, 나는 이를 자식들의 결혼이나 우리 인생의 어떤 중대사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매일 아침을 먹고 둘러앉아 하루를 시작하는 데 있어 가정예배로 올리는 것을 ‘하루의 봉헌’이라 여긴다. 그리 늘 기도하며 ‘오늘도 이렇게’ 각자는 저마다의 봉헌을 하며 산다.

 

그것이 개인적으로든지 공동체적으로든지, 오늘 본문의 묘사와 연결 지어서 묵상하는 게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즉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한 후, 현실적으로 노출된 성안의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해 종교적으로 대처해야 했고(8-10장), 이를 어느 정도 성공시킨 뒤(11장)에 있는 ‘성벽 봉헌’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니까 나는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중 일과를 시작하면서, 또는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도모하여 시작하는 데 있어, 이 모든 것들이 다 낙성식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본다.

 

이러한 낙성식을 위해 종교적으로 준비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은 언급하고 있다(12:1-26). 그렇게 낙성식이 성대히 진해되는 과정을 묘사하고(27-43), 낙성식에 이어 레위 족속을 위한 제도 보완을 하고 있다(44-47). 이 같은 내용은 느헤미야에게 있어 성벽의 낙성식을 전후해서 제사장 및 레위인에 관한 관심을 나타낸다. 즉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종교적 관심,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신앙을 한층 북돋우어 이끌어낸 후(8-10장), 성전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도성답게 예루살렘은 회복되었고,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들답게 이를 신앙적인 영광으로 회복하여야 했고,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어야 했다. 즉 느헤미야는 성벽의 봉헌하고 레위인들의 문제, 그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는 가시적인 장치, 곧 제도적으로 레위 족속을 위한 십일조 제도를 정비하여야 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직결하고, 이를 관장하고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은 백성들 모두가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일성을 유지시켜 주는 일이고, 성벽은 그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상징하면서 ‘성전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낙성식을 통해 성벽을 완공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그 성벽을 도구로 삼아 거룩한 도성,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11:1)” 이 예루살렘을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이쯤 되면 내가 어찌 오늘 본문에서 결혼을 다시 언급하는가, 짐작이 갈 것이다. 결혼은 단지 각각의 개체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이상의 의미이다. 곧 주가 처음 이루신 공동체로, 교회로, 각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 있어 그 울타리가 곧 결혼이란 성벽으로 보호돼야 한다. 나 역시 그렇듯 살다보면 서로의 사이가 좋기만 하겠나? 세파에 따라 더러는 보수가 필요하고, 행여 어디 구멍이라도 생기거나 허물어지면 다시 복구하고 지체없이 복원해야 한다. 이는 적을 막는 방어책으로 성적인 유혹은 물론 하나가 아닌 둘이 같이 기도로 합심하여 주가 허락하신 가족구성원으로 하나 되어 주의 나라 가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지켜야 할 우리의 도성, 하나님의 교회, 곧 우리가 주의 전으로써의 낙성식이고 봉헌식이다.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역대서 기자가 가졌던 ‘역사에 대한 제사장적 관점’이 분명히 수반되는 일이다. 즉 레위 족속이 담당했던 역할과 그들이 한 일에 대해 언급은 느헤미야가 가졌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에 대한 관심이, 만사에 다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0).” 그러므로 성도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마음을 관통하는 내면의 힘은 하나님께 대한 의뢰다.

 

곧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 8:20).” 그러므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이를 토대로 다소 송구하기는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나는 묵상글을 쓴다. 누구의 글을 읽고 말을 듣는다. 그 사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가늠한다. 해줄 말을 ‘학자의 혀’로 분별 있게, 말로 위로 할 수 있도록 구한다. 곧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내가 가진 것은 없으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이로써 내가 바른 말씀으로 서야 하고, 주시는 모든 순간 순간이 낙성식과 같이 봉헌되어 주 앞에 드려지기를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9-30).” 하는 바울의 마음이 내 것이었으면, 하고 오늘도 구한다.

 

하여,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부끄러운 소리 같지만 그렇게 나는 이 시간, 이 허접한 묵상 글 하나를 쓰는 것으로도 나의 성심을 다하기를 기도한다. 할 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세상은 여러 형태로 세분화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사는 게 이 시대의 덕목이 되었다지만 우리가 주를 바람은 ‘예루살렘 성곽을 하나님께 봉헌한 사실’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12:1-26). 이는 그냥 단순하게 그리 행한 게 아니다.

 

물론 이 또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나, 스룹바벨과 예수아 때 함께 귀환한 제사장(1-7)과 레위 사람들(8-11) 명단을 기술한 전반부의 의도가 있다. 곧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정착할 인원을 채우고(11장),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여호와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먼저 조사하였다. 이때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바벨론으로부터 제1차로 귀환할 때 주도했던 지도자들로,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스 2:2).”

 

따라서 오늘 본문 7절까지는 제사장 가문으로 모두 최초의 귀환자들로 속한다. 이어서 12-21절(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 후기 제사장 가문의 명단)에도 제사장 목록이 반드시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서 나는 저들 이름과 그 뜻을 찾아보게 된다. 가령 아마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이다. 말룩은 ‘통치하는’의 뜻이고, 핫두스는 ‘대적자’란 뜻이다. 므레못은 므라욧으로 ‘높은 곳들’의 의미이고, 잇도는 10장 5절의 ‘오바댜’의 바른 이름이다. 보다 후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12-21)에도 ‘잇도’(16)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오바댜’가 분병하다. 힐기야는 ‘여호와의 분깃’이란 뜻이다.

 

이런 식으로 이름들의 뜻을 찾아 유추하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나 그 개인의 업적이나 사역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본문은 요야김 때에 제사장으로 족장이 된 자의 명단(12-21), 레위 사람으로서 족장이 된 자의 이름(22-26)을 언급한 후, 그 계보를 파악함으로 본서 저자인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각별히 선별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작성하면서,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가 자신들의 고유한 반차에 속하여 성전 봉사에 온전히 임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느헤미야는 엄밀히 종교 지도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 시대의 지도자로 당시 상황을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느헤미야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차 체계를 정비하여 온전케 하기 위해 애썼다.

 

곧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선하는 의무가 예배다. 이를 봉헌과 낙성식으로 그러한 계기로일 뿐이라 해도, 날마다가 우리의 새로운 그날이었다. 가령 우리 생에서 결혼이 일륜지대사로 여겨지듯이 그렇다면 더더욱 믿는 자로서의 의무는 예배로 드려지는 봉헌식으로서의 일이다. 프로포즈를 하는 둥 예식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 둥 하는 따위는 하등에 중요하지 않다. 물론 사람마다 기분은 좋을지 모르겠고, 그것으로 사랑의 표현이라 하겠지만 어떠하든지 예배로 주 앞에 드려지는 낙성식이 되든지, 봉헌식이 되든지 이는 성도로서의 의무다.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시 22:22-23).

 

하여,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그러므로 오늘 여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하심은 단지 당시 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성도의 이야기다(느 12:30).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31).” 앞서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원히 기념될 것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오늘 이 모든 우리의 수고와 열심은 결코 헛되지 않아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3-14).”

 

곧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늘 우리의 한 날, 이 날들이 모두 낙성식으로 또한 봉헌식으로 드려지며 예배의 연속이 될 때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하심은 이 땅에서의 약속 너머의 영원한 복락을 강조하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알았고, 붙듦으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그렇게 해서 오늘 본문의 백성들도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그리 할 수 있었던 것 같이,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 98:1).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2-3).

 

하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4).

 

이것이 오늘 하루도 우리가 드릴 봉헌으로 예배가 되어,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5,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