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하현. 2025. 9. 19. 17:2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 13:30-3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 99:1

 

 

하나님 앞에 성결하기란 그 마음을 다하여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우리로 갈등하게 하는 요소 가운데 ‘식구가 원수니라’ 하심을 이룬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어찌 그러한가 보면 마다하기가 가장 어렵다. 하여 아브라함은 이를 알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하실 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저는 아내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떠났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물론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6).” 심지어 당사자인 아들 이삭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그것은 주의 선하심을 믿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7-8).”

 

어떤 일에 있어 사람과 의논하거나 묻는 것이 걸림이 된다. 저마다의 의견이 있어 뭐라 저들 나름의 생각을 얹는데 이것으로 흔들리기 십상이다. 누가 다시 내게 그러한 사정을 토로하였다. 나는 일체의 함구로 하나님만 신뢰하기를 당부하였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랍사게가 조롱하고 저주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신하들에게 일체 상대하지 말고 침묵할 것을 명령한 것과 같다. 당시 “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사 36:12).” 할 때의 그 모욕감이 어땠을까?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21).”

 

내가 누구에게 전한 뜻은 그것이다. 사람에게 묻거나 생각을 말하기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하여 신하들은 히스기야 왕에게 고하였고, “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22).” 히스기야는 성전에 들어가 주께 아뢰었으며,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37:1).” 또한 주의 종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 기도를 부탁하였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4).”

 

이는 오늘도 같다. 수천 년 전 본문의 내용과도 같고, 다음 주에 있을 자식의 결혼을 앞두고 그나마 부모의 축사 가운데 끝자락에 기도하는 것을 두고 누가 물은 것에 따른 답이다. 안 믿는 자들은 물론 하객들로 오는 이들의 종교가 다들 다른데 거기서 기도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소리까지 들은 모양이다. 더는 말하지 마시라. 믿음으로 당당히 기도하시라. 누가 뭐라 하든지, 본인의 믿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시라, 그리 권하였고 위의 성경적인 예를 들어 당연함을 전하였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서의 끝장으로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언약을 갱신하고 신앙을 바로 잡는 내용으로 정리가 된다. 개혁에는 언제나 반감을 들어 위협적인 이들이 득세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신앙 개혁은 날마다의 일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 개혁의 의미가 아니다. 믿음은 지극히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일이다. 엄연히 모세의 율법에서는 암몬과 모압 족속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당시 저들을 대적한 일로 하나님의 총희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3).” 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에서도 같은 적용으로 금지되었다.

 

부패한 영혼은 전체를 곪게 한다. 타락은 어느 부분만 그러한 게 아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도 종교 개혁이 필요했고 아예 분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이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이는 바울이 우리들로도 곧 하나의 푯대를 향해 가는 것이라면 마땅하다는 것을 밝힌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개혁의 역동성은 삶을 통째로 흔든다. 어느 부분 하나 정리한다거나 자신의 각오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문제는 실제 너무 많은 인연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서로의 관계와 그러한 인친적과 동료와 모든 관계를 버리지 못해 생겨나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권면하면 저는 발끈하듯 나의 폐쇄적인(?) 사회성을 운운한다. 그러니 뭐라 한들, 혹여 나의 어떤 권면에는 공감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 같으나 여전히 이와 같은 일은 반복적이다. 오죽하니 내가 말하길, 이 땅의 모든 종교인이 다 모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듣고 아는 타종교의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 모였고 심지어는 그 가운데 종사하는 종교인도 여럿이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절교하게 하였다.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느 9:2, 10:28).”

 

이를 그저 옛날이야기, 구약 시대의 것으로 치부하면 오산이다. 우리 신앙의 개혁은 역동성을 잃으면 침체하고, 고이면 썩는다. 머물면 타협하고, 타협하면 빼앗긴다. 우리의 본질은 흙이기 때문이다. 곧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를 가지고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이지만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동성으로 활동하시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다(창 1:2).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곧 분리가 필요하다.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느 13:1-2).” 그리하여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3).”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분리가 필수이나 이것은 쉽지 않다. 아이 때 겪는 분리불안장애와 같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사람 사이의 분리를 꺼려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할 수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곧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듯 우리 안에 운행하실 때 가능하다. 이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그러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즉 저들과의 관계를 우선하여 하나님의 일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하여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하니라(대하 34:21).” 우리는 말씀으로 물어야 한다. 묵상이란 듣는 것이다. 명상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명상이란 자신을 비우라고 한다. 그러나 묵상은 채우는 일이다. 말씀으로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물이 넘치듯 속엣 것은 버려지게 돼 있다. 뭐 굳이 그런저런 인연들을 붙들고 살고 있는지…?

 

누구의 대답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 정작 서로가 안 봐도 그만인 사이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상하다면 이상한 것이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잊힐 권리’를 주장한다. 어느 시절, 어떤 그리움으로 문득 다시 만난다 한들? 그렇게 별의 별 모임이 만들어지고 서로가 마치 평생을 그리워하며 산 것 같으나 별로 꼭 그렇게까지, 그땐 그랬지… 정도로 족한 인연이면 내버려두는 게 낫다. 그래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시인도 노래하길,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우리가 무엇으로 깨끗할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에 따른 교훈?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말씀으로밖에 답이 없다.

 

차마 저의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의 부친이 조상 대대로 이고 지고 살았던 우상을 타파하고 심지어는 본인이 목회의 길을 가고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듯이 자식 넷 다 주의 종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 기적 같은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과의 분리, 하나님께로의 맡김. 그리하여 나의 모친의 애끓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때 나의 부친은 어찌 외면하며 견딜 수 있었을까? 가끔 나는 애간장이 타서 마음이 어렵다. 아들이 공부 중인데, 너무 앉아만 있다 보니 물론 하루 한 번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헬스도 가는데, 어깨 허리 무릎 여기저기 아프면서 급기야 치질이 도졌는지 얼마 전에 수술했는데 다시 또 고생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생각 같으면 공부고 뭐고 그만두라 하고 싶은데….

 

그러니 몸도 성치 않은 자식을 보면서, 이런저런 일로 학교로 불려 다니고, 가난으로 찌든 생활 속에서 우리 사남매를 키우는 데 있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달려온 생의 결과로 기적처럼 우리가 모두 목회의 길을 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듯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성결의 문제는 실전으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느 13:5).” 오늘의 도비야 같이 망가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8-9).” 분리에 이어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 청산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 안에 ‘도비야’는 어떠한가? 남 일이 아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신앙이란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그럴 수 있지, 하는 순간에 이미 물든다. 잠깐은, 이 정도는 괜찮다고 허용할 때,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그러므로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무턱대고 오늘의 어려움을 모면하려 할 것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충성을 배우는 일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그 가난하고 지겹도록 이사를 다니던 시절, 나의 부친의 전투적인 목회 현장을 같이 떠돌면서 원망도 다짐도 여러 번 했지만… 오늘의 나로 부르심은 주가 더하신 은혜로 어머니의 기도와 부친의 애끓는 심정이 있었음을 잘 안다.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느 13:29).” 하는 느헤미야의 절규어린 기도와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14).” 하며 주만 의뢰하는 저의 기도가 없었다면 오늘 이 본문의 성결이 가능했을까?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사 38:3).” 우리의 성결은 기도뿐이라, 이는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러므로 오늘도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주가 나를 통치하여 다스리시길…….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시 99:1-2).

 

이를 인정할 때,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3).

 

할 때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