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렘 4:3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4-5
때를 알고 뒤로 물러서는 게 아름답다. 쉽지 않은 것은 자꾸 뭐라고 참견을 하고 마치 그러면 더 나을 줄 아는데, 우리도 그때에 부모의 말이나 어른의 말을 듣기 싫어서 튕겨 나갔던 적이 있다. 물론 또 그런 실수를 같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훈계나 교훈을 일삼으려 하는 것이겠으나, 그냥 둬도 된다. 주가 우리를 다스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주가 행하신다.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린 이에 순응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6).” 하고 오늘 말씀은 경고의 나팔을 부는 듯하다. 그러므로 나태하고 안일한 영혼을 향해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3)” 하신다. 거둬낼 것과 갈아엎을 것을 먼저 이르시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를 붙드시는 것은 말씀으로다. 다른 어떤 경험과 먼저 살아본 이의 교훈보다 하나님이 오늘 이 은혜의 시대에 주신 것, 성경으로 사는 일이다. 해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4-5).
하는 오늘 시편의 기도를 따라서 읊조린다. 한 날의 삶이 언제나 주 안에서 온전하기를. 오늘로 이 땅에서 맡기신 날이 끝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주신 바, 이 한 날의 수고와 기쁨과 찬송으로 말씀 앞에 앉는 것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전하시는데 있어, 말씀으로 교훈을 삼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우리가 진정 이 시대의 경고음을 듣는다면 그저 안이할 수는 없다.
오늘 말씀은 그렇듯 깨닫고 ‘돌아오려거든’ 어디로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가를 일깨우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아” 하고 분명히 지칭하신 말씀이다.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기회로 두신다. ‘돌아오려거든’ 하고 분명한 어조로 ‘내게로 돌아오라’ 하심이다. 나는 ‘여호와’이시다. 곧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1-2).” 하시는 데 있어 ‘네가 만일’ 하고 가정법으로 전달하셨다.
이는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3:22b)” 하는 데 따른 말씀이다. 회개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기꺼이 용서를 전제로 하신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23).”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흔들며 기웃거려보지만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분명히 알고,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24-25).” 하는 후회와 돌이킴이 먼저 있었다.
이에 오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회개’는 ‘진실 되게,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진실은 나로 죄인인 것을, 젊을 때부터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 수치를 안고 인정함으로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3b).” 이는 곧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 주께 지목 받는 백성들이라면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하신다. 할례 곧 가죽을 베는 일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죄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죄악 가운데 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의식함으로 근신할 수 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심은 주의 결연한 사랑을 내포한다.
회개를 참되이 하라는 말씀으로,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첫째는 묵은 땅을 갈아엎듯이 죄를 끊고 단절하라는 것이다. 술 한 잔, 담배 한 대, 어떤 문화나 관습 따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로 굳어진 땅 같은 길가 밭 같은 마음을 개간하라는 의미다. 그런 뒤 둘째, 여호와께 속하라는 것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교회를 다니고 또 예전처럼 교인으로 살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말씀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순결하기를, 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를. 나에게 묵상글은 그렇게 말씀으로 살려고 하는 실태를 보고서로 작성하는 일과 같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심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와 같은 실제적인 삶을 일컫는다.
묵은 땅에는 가시덤불로 잡목들과 돌부리들이 가득하다. 우리의 죄 된 마음을 빗대어 상징한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8a).” 우리는 그런 가운데 먹고 사느라 죽을 맛으로 살다 결국은 그 땅으로 돌아간다.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8b-19).” 우리 삶은 이처럼 죄악에 뿌리박고 산다. 죄악된 사람의 마음은 그러하여 아담의 때부터 범죄 하여 내려 온 모든 인간의 숙명적인 마음이다.
그렇게 수천 년을 묵어서 굳어졌고, 가시덤불이 가득하여 말씀이 그와 같은 마음에 말씀이 뿌려진들 곧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눅 8:6-7).” 이를 실제 우리는 자주 경험하고 목격하기도 한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교회도 잘 다니고 말씀도 그만하면 잘 듣고 성경공부도 한다고 하는데도 전혀 그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말씀이 뿌려져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5).” 하심과 같이 단단하게 굳어진 길가 같은 마음이거나 가시덤불과 자갈밭이라 쉬 뿌리내리지 못하거나 자라다가도 현실에 걸려 금세 시들고 마는 것이다.
이를 갈아엎어야 한다. 땅을 개간한다는 것은 아예 갈아엎어서 위와 아래, 마른 땅과 그 속의 연한 흙을 뒤섞는 일이다. 그러면서 돌을 고르고 잡초를 뽑아내는 작업이다. 즉 밭을 가는 것은 그 토지를 부드럽게 하기위한 것이다. 곧 우리의 자아, 곧 자기 아집과 고집을 꺾고 뒤엎어서 내가 원하는 바를 거절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 앞에 새로운 나로 세워지는 그야말로 지각변동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게 말이 쉽지 열에 열은 어려워서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의 굳은 의지로 될 일이 아니다. 결국 우리의 묵은 땅 같은 마음이 보습으로 말미암아 부드러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복하는 데서 가능하다.
먼저는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섭취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 말씀을 겸손히 받아야 된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그렇게 되기가 혼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묵은 땅을 개간하려면 연장이 필요하다. 맨손으로 한다고 덤비는 꼴이란 금세 포기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도 누가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거나 중보하며 서로를 닮아가는 경건의 마음도 필요하다. 가시덤불은 오래 묵은 습관 같은 죄악이다. 이를 제거함이란 필요하다면 약물도, 격리수용도 필요하다. 즉 근신이란 따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세상과 거리를 둬야 한다.
보면 내 친구가 제자반 성경공부에 무슨 기도회에 새벽예배까지 열심인데 왜 그는 더디고 여전한가했더니, 우선은 안 믿는 친구들과의 모임이 여전하다. 늘 그렇듯 그런 자리는 술자리로, 세상사는 이야기로, 농담과 질퍽한 음담패설로 난무하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듯이 서로 모이면 이어지는 술자리가 있고 그런 자리에서의 예외는 싫은 것이다. 서로를 껄끄럽게 한다. 손위형님도 혼자 도서관에도 가고 교회에서 하는 성경교부에도 참여하는데 늘 보면 성경에 학구열이 대단하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연구하고 어느 박사, 누구의 어떤 주장 등에 빠져 가끔 만나면 나에게 어디 유튜브 사이트를 가르쳐준다. 그러면서 온갖 모임이 다 있다. 본인은 이제 저들과 구별되다고 하나 실은 그러지 못하다. 거기에 어디에 어떤 물건 등을 두고 부동산에 그렇듯 관심이 많다.
옳다 그르다, 싫다 좋다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묵은 땅이란 그와 같은 속성으로 죄악의 가시덤불과 묵혀온 마음의 어떤 한(恨) 같은 응어리가 있어서 가난이 또는 모자란 학식이나 어떤 열등감으로 자잘한 자갈밭으로 도대체 그 속이 온통 잔돌들로 가득한 마음 밭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악을 고집하는 심령들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는 사역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란 그만큼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 사는 일이다. 하여 이것까지도 주 앞에 인정하고 내려놓기까지는 별 수 없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하여,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다 보니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아는 게 병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이는 안 믿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가령 나는 회계사와 세무사 준비로 공부 중인 아들을 놓고 기도할 때 더욱 강한 믿음과 온전한 신앙을 가지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우린 누구도 감히 '그럴 리 없어!' 라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아브라함도 다윗도 저들 생각과 판단으로 궁리하고 꾀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이거나 심지어는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우린 누구나 죄의 굴레에서 자유할 수 없다. 아간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순간 돈에 눈이 돌면서 감추거나 숨겨서 하나님의 것으로 자기 것을 삼으려 했던 것을 안다. 조카아이들이 춤으로 대학을 갔다. 작은 애는 수시로 본 대학을 모두 합격할 정도로 출중하다. 그래서 나는 저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렇듯 춤은 세상적인 음악과 문화와 저들 세계의 세계관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음이다. 물론 우리 신자들도 춤과 노래로 주를 찬양해야 한다.
친구의 경우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회생활을 하려다보니 그렇다지만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 3:3).” 그러하기가 쉽지 않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 그런 것이어서 돈이나 사람들과의 교류나 문화나 나름의 것들이 필요하지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이를 두고 자신은 자신 있다고 할 때 저는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주가 날 위해 소리 높이실 때,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우리가 이를 들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장차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의 비참한 정경을 아는 선지자는 그 고통스러운 심정을 진술하는데 있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 이때에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내 안에 울리는 어떤 경고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떤 사연을 말할 때 그 어려움을 두고 주의 뜻을 전하고자 하면 저는 문득 ‘뭘 또 그렇게까지! … 살다보면 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모든 사고는 그렇게 전조증상을 보인 후에 온다. 아차, 싶을 때 멈추고 돌이켜 점검해야 한다. 이상하다 싶으면 중단하고 되돌아봐야 한다. 지혜는 말하길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하였다. 인생에 이 일은 반복되는데,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결국 우리로 주를 더욱 살펴 그의 뜻을 바르게 알고 돌이켜 실천하기를 바라였다. 일이 터지고 난 뒤에는 고통이 가중된다. 우리 몸도 그러해서 나이가 들수록 먹는 것도 그렇고 무슨 일에 있어서도 조심하게 된다. ‘혹시나’하면 ‘역시나’다. 늘 아프다고 하면서도 그냥 둔다. 그러다 결국 더 큰 병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하여,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결국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 그러므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결국은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0, 25).”
주는 이루신다. 그리하여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서 비는 말,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 25:7-8).
나로 하여금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셨으니,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9-10).
그러므로 나는 앞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1).
하고 아룀으로,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4-15).
이에,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16, 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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