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하현. 2026. 2. 9. 05:4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겔 14: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왜곡된 진리는 그 마음에 자기 우상을 두게 한다. 곧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신음하게 되는 형국이다. 이에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 중에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 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7-8).” 이를 또 왜곡하여 낙관적으로 보는 자들에 대해, 왜곡된 낙관주의를 깨뜨리고 심판을 확실히 더하실 것임을 알리신다. 이는 노아, 다니엘, 욥이 와도 예외는 아니다.

 

에스겔은 우상을 섬기는 장로들에 대한 책망과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회개의 권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심판의 불가피성과 ‘남은 자의 구원’을 제시한다. 특히 이전과 같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장로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는 장로들의 거짓된 신앙을 정죄하고(1-11), 변경될 수 없는 심판의 절대성을 선포하고(12-20), 남은 자에 대한 구원을 약속한다(21-23).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척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우상을 더욱 믿는 장로들의 가증스러움을 책망하고,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함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 두고 맹세하는 화법으로 하나님의 보복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나타내고 있다.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 18, 20).”

 

에스겔은 전례 없이 백성들의 불신실함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것을 선포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의도적인 논쟁으로 하나님이 언약에 입각하여 예루살렘이 갖는 특별한 지위를 생각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 의지가 확고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포로로 잡혀 와서도 배도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공적으로 이방 제의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이방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의식에 참여하여 이를 수행하였다.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3-4).”

 

사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이래 끊임없이 우상 숭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이방의 문화나 저들의 신에 대해 매료되고 따라했다. 비록 요시야 왕 때 개혁 운동을 전개하여 엄격하게 신앙을 수립하였으나 그가 죽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신앙의 각성을 불러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진노하는 하나님 대신 이방 신을 믿어 보려는 자들의 유혹이 더 강해졌고, 하나님을 공공연히 거부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언자의 도움을 얻으려는 생각과 동시에 이방 여러 신들의 보호도 받으려는 ‘혼합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심판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일체의 희망을 버리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는 곳에서는 어떠한 협약도 불가능하다. 이처럼 우상 숭배에 함몰되어 있는 이스라엘 족속들의 멸망을 단호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과 멸망에 대해서 거듭 선포한 바 있다(12: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장로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가나안 땅으로의 조기 귀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평강을 선포하였고,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10, 16).”

 

포로된 민족에게 빠른 시일 안에 귀환이 이루어진다는 거짓 희망을 전하였다(렘 28:1-11). 그렇게 해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선고됐다(겔 13:1-16). 이후에도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시 에스겔 선지자를 찾아와 유다의 운명에 대해 질문했으나, 우상 숭배 등의 가증한 일에 대하여 책망을 받을 뿐이었다.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0:3).”

 

오죽하니 영원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시기까지 저들의 거짓 증거에 대하여 심판은 확고하다. 무엇보다 그 마음에 개인적인 우상을 섬기는 것과 함께 거짓으로 선동하면서 낙관적으로 희망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 노아나 다니엘, 욥과 같이 의인이라 인정하신 자라 해도 예외 없이 심판은 임할 것을 알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으시다. 하여 지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를 예수님도 이르시길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곧 이는 두 마음을 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응답도 주지 않으신 것을 알게 한다. 교회도 다니면서 세상과도 잘 지내는 것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 우상을 두고 섬기는 일에 대하여,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와 같이 성경의 엄중한 경고에 오늘 말씀은 주안점을 둔다.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나님께서는 당신 외에 허무한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행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섬긴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겔 14:4).”

 

이러한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무수한 우상들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실제 우리도 다르지 않다. 즉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 하나를 섬긴 것이 아니라, 다수의 우상을 섬겼던 것이다. 곧 다원주의로 인하여 행하여지는 행실은 하나님을 여타 우상들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혼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임하신다. 교회가 하나님 외에 다른 더 무엇을 보태고 더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신격화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유일신 사상이 사라진 이 시대에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도 여러 신들 중 하나의 존재로 취급한다. 공공연하게 우리 믿는 자들의 입에서도 저들의 신과 신앙에 대해 존중하고 타협해야 할 것을 합리적이라 여긴다. 성경은 그 어떤 보편도 일반적인 논리로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결한 삶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4-6).

 

또한 같이 믿는 자들이라 해도 그 가운데 상식과 합리로 포장하여 그 신앙에 하나님도 두고 다른 우상도 그 마음에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우린 우리 자신의 유일신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 이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신에 대해 존중의 가치나 그런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은 모두 거짓이고 우상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6-7).” 이에 우리는 회개하고 돌이켜 자신을 꾸준히 복종시켜야 한다.

 

종교 타협주의는 이제 미덕이 되었다. 서로 각자 자신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었다. 곧 우상이 혼재하여 구분이 어렵다. 그런 가운데 요한 사도는 덧붙이길,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9-10).” 곧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 우리 마음에 혹시 두고 사는 다른 우상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표리부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더욱이 목사가 그러하고 교회 지도층의 사람이 그러하면 더더욱 심각하다. 이는 질책과 함께 가혹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렇게 하려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그러므로 오늘 날 가장 큰 문제는 애매한 신앙이다. 믿는 사람이면서 안 믿는 사람과 같이 다른 신들도 허용하여, 가령 요즘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데 각 나라의 신들과 그 신전의 행위를 마치 문화로 착각한다. 저들에 대한 존중이라 여긴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어떤 몸짓, 구호, 인사 등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한다. 그러면서 공공연하게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만 이 신도 저 신도 존중한다는 태도로 혼합주의자가 된다.

 

즉 이는 우상을 그 마음에 두고도 태연히 하나님께 나아와 질문하는 오늘 본문의 장로들과 같다. 또한 우상 숭배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아울러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한 징계를 강도 높게 묘사하고 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리하여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11).” 곧 하나님은 굳은 결심은 더욱 분명해진다.

 

결국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정화와 새로운 구속을 성취하신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 33:8).” 그러므로 성도들은 심판을 통해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더욱 온전한 섬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1-23).”

 

어제는 딸애의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하면서 먼저는 긴장도 하였으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또 한 번 확인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같은 시대를 교회에서 살았던 신랑 쪽 부모의 신앙 간증과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에 마음이 통했다. 식사 전 먼저 기도를 부탁하여 나는 주의 종으로서 기도를 하였다. 떨리거나 긴장되기보다 이상할 정도로 편안하고 즐거웠다. 상견례가 이렇게 화기애애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서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업을 하면서 여전히 술 담배를 끊지 못하고 더러는 세상에 치우쳐 살고 있으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말에 나는 안도하였다. 서로가 결혼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는 것에서도 통하였다. 예배로 드려지는 데서 감사하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 모든 시간에 더하여져 서로가 감사할 것뿐이었다. 이 놀라운 은혜 앞에서 새삼 나는 주께 더욱 감사하고 찬송하였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 35:24-25, 89:14).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86:15-16).

 

하나님은 모든 행사에 있어서 정직하고 신실하시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 33:4).

 

이를 인정하는 자리였고, 오늘의 말씀으로 더욱 더 혹시 내 안에 있었을 개인적인 나의 우상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언제나 함께 하심으로 예수의 구속으로 의로워지게 하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어제 그 상견례 자리는 마치 이와 같은 간증의 자리가 되어 감사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나로 이 자리에 두심과 함께 하심이 삶의 현장에서 증거가 된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