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19-20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1-2
심판의 여정 가운데서도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은 영원하심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부드러운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율법 언약을 체결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지키라고 명하신 것과는 다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오늘 본문의 이 은혜의 약속은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과 통한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곧 이 같은 일의 주체는 하나님으로,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11).” 곧 신약시대의 우리는 은혜의 때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2-13).”
이 모든 은혜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없이 주신 은혜이다. 더는 사람의 순종과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는 죄를 따를 뿐인 것을 구약시대를 통해 뼈저리게 알게 하셨다. 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시내산의 율법 언약으로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 율법을 지킬 힘과 능력이 없음과 죄로 더 가까이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감당이 안 되는 자신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곧 성령의 감동으로가 아니면 누구도 주 앞에서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입증이 되는 셈이다.
하여,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4-27).”
하시는 것으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곧 새 언약으로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를 하나님이 모르셨던 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알기까지 하나님은 참고 또 기다리시며 놓아두셨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이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곧 ‘일치된 마음 대신에 새 마음으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6-27).” 그렇게 하시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곧 ‘율례를 좇으며’, ‘행하게 하리니’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의롭고 온전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9-10).
그러므로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다만 이를 스스로 따라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사람은 그때뿐이라, 돌아서기 무섭게 또한 죄로 얼룩지고 만다. 이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 우리가 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만이 가능하였다. 다시 말해 무능력에 빠진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말씀을 따라 살 수 있게 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하시는 오늘 말씀에서도 내가, 주고, 그 속에 주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였다. 곧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성도의 마음에 새로운 말씀을 새기고 성도로 하여금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리하여,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0-13).”
그러므로 나는 오늘 신약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내가 내 것이 아닌 것으로도 안도한다. 주가 나의 주인이심으로 다행이다. 나는 나로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선하여 의롭다 할 수 없는 것으로 주 앞에 내려놓는다. 전에는 어떻게든지 내가 할 수 있고, 그리 내 뜻대로 하는 것을 바라며 살았다면 이제는 자꾸 나의 생각과 주장에서 주를 바라게 된다. 예전에는 서럽고 노여워하였을 일을 이제는 그 때문에 주를 더욱 바람으로 가벼워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되리라’ 하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감격하는 이유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20).”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은 암울하고 두려운 심판의 예언과 동시에 작동한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11).”
또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36:28, 37:23, 27).”
모두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하시는 데 주안점이 있다.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게 달라서 뭘 두고 서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들 대립과 갈등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더러 어찌 전하여 저를 설득할 수 없고, 강제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 나는 다만 듣든지 아니 듣는지 전할 뿐이다. 이는 나 자신에게조차 같다. 마치 내 앞에 놓인 내게 나는 전할 뿐이다. 그러는 내가 자원하듯 정직한 마음으로 말씀대로 살지는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도와 동시에 눈을 뜨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삶이다. 아이 결혼에 앞으로의 일정들이 서서히 불안과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장에 돌아오는 주일 저녁에 상견례가 있는데 딸애는 지팡이를 짚으라고 하고 아내는 짚지 말라고 한다. 아들은 이 옷을 입으라고 하고 아내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며 한숨을 쉰다. 그런 가운데 생겨나는 어떤 미안함인가, 서러움인가 하는 마음이 나로 울렁거리게 한다.
고질적으로 나는 어딘가 숨고 싶어진다. 누구에게 알리고 누구를 초대하는 일에서도 그러는 모든 게 미안하고 부담스럽다. 나는 가지도 않고 연락을 피하면서 왜 또 저들에게 연락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면구스럽기도 하다. 그런 거 보면 나의 일생이 그러했던 것 같아서 나는 자꾸 어디로든지 숨고 싶어진다. 나의 이 회피본능은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도 이대로 있어도 되나? 하는 지점에서 뭐라도 해야 하나? 하는 갈등으로 번진다. 나로서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마치 계속 도돌이표 같이 속을 끓일 뿐이다. 누구에게 말한들 저들은 대수롭지 않게 권하는 말들이 나는 늘 힘들다.
나로서는 나의 이 약함으로 주를 바란다. 나의 어쩔 수 없음으로 주께로 나아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심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이에 그 사역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이루신 일이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하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하심은 비록 나의 나 됨과 그 현실이 고단하여 힘에 겨울 때도 그것으로 이 말씀을 여기서 되새김으로 천국을 사모함은 물론 오늘의 여러 형편과 사정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방심하고 있는 세상에서, 에스겔이 환상 중에 이스라엘 방백들이 그 성읍의 당면한 사건을 논하기 위해 모여 있는 성전 문으로 가서,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그 문에 25인이 있었다.’ 한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겔 8:16).
여기에 나오는 25명의 사람들은 저들을 소송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집 문에’ 앉아 있는 방백들이었다.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렘 26:10-11).”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 타락된 행위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잘못 행했기 때문에 문책을 받았다. 이들 중 두 사람은 이름이 나와 있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가장 지도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비록 예언자가 몇 해 동안 외지에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곧 저들은 ‘블랴다’ 와 ‘야아사냐’이다.
야아사냐는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곧 8장 11절의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나오는 야아사냐는 ‘사반의 아들’이며, 여기에 나오는 ‘야아사냐’ 는 ‘앗술의 아들’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이 예언자에게 말해 준 25명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은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11:2).” 이들은 공공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실 아래 백성들의 죄악을 더욱 심화시켰다. 예언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백성들에게서 제거하였다. 그들은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베푸는 자들이다.
곧 오늘 우리 생활에서도 긍정적으로 괜찮다, 잘 될 거다, 하면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설교나 위로나 회복이 실상은 더 심각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비와 은총의 예언은 동시에 주어진다. 전반부에서는 ‘시온에 편안히’ 지내고 있던 자들을 깨우치는 말씀이고, 이 말씀을 받은 에스겔이 여기 바벨론에서, 그리고 그곳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앉아 있던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을 받았다.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15).” 예루살렘 주민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버린 자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 예언자에게 일러 주신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끌려간 자들을 ‘좋은 무화과나무’라고 인정해 주셨다. 저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게 한 것은 저들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선언하셨다.
정작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고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할 것이다.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6).” 그러므로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15-16).” 바벨론 포로들을 ‘형제’라 하셨고,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하나님이 너희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했다. 평안히, 교만한 맘으로 지내는 자들은 이와 같은 말씀을 경멸하였다.
겸손하고, 또 섭리에 의해 굴욕적인 자리에 처한 포로 된 형제들은 주를 바랐다. 그러므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이와 같은 역설의 기쁨 가운데 천국은 내주한다. 곧 오늘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러므로 오늘의 비극은 소망이 있다.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8-20).” 이것으로 고난의 목적은 뚜렷해진다. 하면, 우리들로 주를 인정하게 할 것은,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1-2).
이 놀라운 진리 앞에 모든 불안과 염려는 힘을 잃는다. 곧 오늘의 우리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5).” 그러므로 인생이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고, 여기가 끝이 아닌 것으로,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9).
그러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2-14).
주 앞에 아뢰어 기도하면,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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