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하현. 2026. 2. 8. 05:59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겔 13:3-4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2-13

 

 

나의 하루는 그 행동반경이 정해진 것처럼 일정하다. 간혹 그 범주를 벗어나야 할 경우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게 되고 불안이 먼저 엄습한다. 병적이라 이 때문에 약을 먹기도 하지만 이에 따른 회의와 갈등도 있다.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하는 일에서,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고 이를 다시 묵상하는 데 있어서도 나는 가급적 제 3자로 그 자세를 가지려고 한다. 즉 나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묵상이라 해도 나 자신을 객관화하여, 나의 이야기에 주가 함께 하심을 중심으로 진술한다. 이때 나는 의도적으로 감정적인 표현이나 나름의 미사어구를 사용하는 데 주의한다. 곧 이 글은 문학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말씀을 묵상할 때는 ‘주시는 것’과 ‘느껴지는 것’을 구분하려 애쓴다. 그러는데 있어 나의 행동반경이 제한적이라 이를 일반화시키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두려운 것은 행여 덧붙이는 여담이다. 반복적인 표현이나 어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 말씀은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이라 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돼야 한다. 받든지 안 받든지,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이는 전적으로 성경이 배제한다. 그러므로 주시는 말씀으로만 논거를 이어가고 이를 결국 내 삶에 적용하는 데 있어, 나의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공감이 형성될 수 있다. 곧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와 다윗의 이야기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중심 내용은 그것이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주인공이 아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거짓 선지자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내용에서 내가 두려움이 먼저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혹시 나의 묵상글에서 또는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내가 부각되거나 나를 앞에 두지는 않는지, 임의로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여 더 많은 독자를 원하듯 더 많은 청중으로 설교의 성공여부를 판단하지는 않는지, 누가 좋다는 식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그 폭이 넓어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3, 19).” 이와 같은 말씀이 무겁고 두렵게 다가온다.

 

앞서 거짓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족속을 미혹하게 하는 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전해 내려오는 속담으로 말씀을 묵인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셨다.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 됨이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12:21-24).”

 

곧 거짓 예언의 폐해와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에게 예언의 영이 전달되었다고 뽐내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멸시하였다.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은즉(13:22).” 그저 그럴듯한 좋은 말로나 예화로는 말씀을 전하기 어렵다. 가령 예레미야가 선포한 70년 포로 생활의 기간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욕구에 영합하여 조속한 귀국과 예루살렘의 번영을 약속했던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허무함이었다.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들’의 무책임한 언동을 지적하고(1-16), 거짓 여선지자들에 대한 저주를 언급하고 있다(17-23). 거짓 선지자들 중 일부는 아직 예루살렘에 있다.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렘 23:14).” 오늘도 이와 같은 현상이 더러 교회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령 목사가 ‘어떤 존재’로 추앙되어 높임을 받는 가운데 호위하듯 부교역자나 성도들을 거느리고 다니거나, 특유의 어떤 은사를 ‘용한 재주’로 삼아 상한 영혼들을 미혹하는 경우도 그러하다.

 

내가 아는 누구는 마치 비밀스럽게 개인적인 신앙 상담을 하고, 어떤 기도를 해주고, 무슨 은사를 운운하여 은밀한 행위를 소수만 알도록 하기도 한다. 누가 저에게 ‘기도 받으러 간다’고 할 때, 나는 어딘가 미심쩍고 답답하다. 혹은 또 누가 ‘영매’를 사이에 두어 ‘그 사람’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며 무얼 전하거나 권한다. 그래서 실제 병 낫기를 위해 저에게 줄을 대고, 앞날의 해야 할 일을 듣고자 하여 대기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분명 우리의 대언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린 이제 신약의 시대를 살면서 성령으로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곧 다른 사람을 사이에 두고 죄를 고하거나 어떤 예언을 들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것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우리 모두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간구함으로 그것이면 된다. 여기에는 목사니까 좀 더 용하고, 어떤 신유의 은사로 누가 누굴 안수하고 안찰하는 행위로는 모두 미신적이다. 설령 거기서 병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해도, 그것으로 뭘?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한동안 나도 신유의 은사를 구한 적이 있다. 뭔가 남다른, 어떤 특유의 무엇이 주어져야 남들보다 약한 나로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요구하였다. 또 누가 그러라고 하며 내게 권하기도 했는데, 저는 곱추이면서 여성으로 기도원을 운영하면서 기도가 용하는 소문이 있었다. 심지어는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가운데 멀리 전화를 하면서도 저의 사연을 꿰고 앞뒤 맥락을 짚어내곤 했다. 그런 가운데 은근히 소문이 나고 그 기도원은 암암리에 목회자들이나 예비 목사들이 유독 자주 찾아오곤 했다. 나 역시 어찌 알게 되었고, 유독 나에 대한 남다른 관심 덕분에 여러 번 그곳에서 쉬다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한 번도 나의 사명을 두고 뭐라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신유의 은사를 구하라고 여러 번 권하기는 했다.

 

이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부 바벨론 포로들 중에도 섞여 있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렘 29:8).” 곧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거리가 있지만 동일한 진리를 전파하였던 것을 본다. 이것은 그들이 동일하고도 선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증거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은 동일한 미혹의 영에 의해 움직이면서 꼭 같은 거짓을 예언했다. 그들을 회개시킬 가망이 없었다. 마치 바로의 술사나 점치는 자들이 모세의 기적을 따라할 때 더욱 완고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자기 죄 중에 완악해지는 데는 별 수 없다. 에스겔은 그들을 쳐서 예언해야 했다. 이는 백성들을 거짓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주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누가 개인적으로 유튜브에서 누구의 설교나 성경강해로 말씀을 이해하고 배운다고 할 때 걱정부터 앞선다. 누군가, 하고 먼저 묻고 나름 알아본다고는 하나… 가령 누구의 계시록 강해나 기독교 교리 강해가 훌륭하다 하여 듣다가 솔깃한 말과 그럴듯한 근거로 갈라치는 어떤 공통점을 찾았다. 곧 저마다 개인적인 확신으로 물론 그것에 기초한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곤 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누군 킹 제임스 버전의 성경만을 강조하고 현재 사용하는 개정개역이나 일반 성경은 카톨릭의 교리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 현상을 적용하면서는 유독 어느 정당과 사람을 사탄화했다.

 

뭐라 단정하기 어려운, 애매하게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 13:19).” 하는 말씀과 같은 현상이 느껴진다. 우리는 각기 저마다의 정치적 신념이 다를 수 있고, 애국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대한민국 국적으로 천국 시민이 되는 게 아니다. 가령 두 믿는 성도가 각각 독일군과 연합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당대의 의무를 다하여 총질하고 싸우다 전사했다 했을 때, 천국에서 서로는 같은 성도로서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웃고 주를 찬송할 것이다. 즉 이 땅에서 내가 속한 나라, 정의, 의, 선행 따위는 지금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순종과 헌신으로 감당하는 것은 마땅하나 그래서도 우리의 신앙이 정치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사회 현실에서 ‘어느 쪽이 아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의 의와 나라가 먼저이다. 다소 답이 없는 말이겠으나 공직자가 되어 이 종교 저 종교, 이 신상 저 신상 앞에 절하고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해야 하는 일에서 과연 믿음으로 우리가 그래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고려해야 한다. 그럼 공직에 오르는 기독교인은 모두 이를 거부해야 하는가? 하고 물을 때 나는 성경적으로 그렇다고 말하겠다. 그런 논리로라면 모든 죄가 허용범위를 넘어선다. 사회생활을 위해, 회사원으로 또는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개인의 범주와 소속인의 범주가 엄연히 나뉜다. 교회도 다니면서 사업상 누구를 접대하고 로비도 해야 하고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일에서 과연 우린 어디까지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답이 없다고는 하나 나로서는 그래서도 나의 하루 활동반경을 일정하게 하고, 가급적이면 만나는 사람도 가급적이면 제한하는 것은 우리 영혼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너무 많은 데서 허비되는 것 때문이다.

 

누가 부유한데 저는 모임이 많다. 무슨 리더모임이니 지역사회 무슨 지도자 회의니 하는 데도 불려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앙적으로 어긋난 일인 것을 알면서도 거절할 수 없는 참여가 많다. 그것을 자신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무마한다.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목사나 사역자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거짓 선지자’로 사는 성도가 허다하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받았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2).”

 

곧 거짓 선지자의 죄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가급적이면 그들의 어리석음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야 한다. 그들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하거나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딤후 3:8-9).” 곧 그들은 여기서 우매한 선지자라 불리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겔 13:3).” 그들은 자기들이 자처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우매하게 그 앞에 섰다. 그들은 성도들을 우롱하고 심지어는 자신들도 속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다고 가정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6).” 그런데도 나름의 확신이 막무가내로 자처하여 자신을 합화하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10).” 거짓과 죄악을 괜찮다고 위로하고 책임을 회피하게 한다. 즉 이런 자들은 은혜를 남발하여 모든 것을 다 허용범주에 포함한다.

 

나도 한때는 그런 자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좋아하고 타종교의 어떤 미신적인 행위를 하나의 문화로 용인하고 따랐다. 그 앞에 같이 섰고 그 일에 거리낌 없이 참여했다. 그러면서 내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종교나 신앙과도 부대낌 없이 잘 어울렸다. 늘 사람이 많았고 또 저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흔히 술자리 분위기가 좋아서, 하는 말로 별의 별 이야기에도 동조했다. 우리가 성도로서의 직분을 사칭하고 하는 게 어디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저마다 믿음의 사람으로 치장하지만 자신이 지어낸 신앙의 합리화에 매몰 되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6).”

 

나는 그렇게 그들과 같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며 성경을 독단으로 읽고 해석하여 이해하는 대로 살았다. 내 곁에 늘 가까운 선생이 있었는데 저는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경외하던 청년기를 지나 자기 철학과 지식에 빠지면서 다원주의자로 모든 데 다 신이 깃들었다는 논리와 함께 밥 한 숟가락에도 신의 입김이 서렸다는 문학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신학을 결심하고 주의 길,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나를 말리고 회유하면서 ‘나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거짓은 항상 스스로도 하나님께로 교훈을 받은 듯 가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심령을 따랐을 뿐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3).” 교묘한 날조의 산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희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뜻의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들이 봤다는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쾌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6).”

 

그들은 보지 않은 것을 봤다고 주장하며 거짓된 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진리라고 내놓았다.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7).” 나 역시 그러했던 시절을 돌이켜 본다. 그때는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따랐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말씀으로 새삼 나의 행동반경을 돌아보고 일정부분 꼼짝 못하게 하신 나의 병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한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시 94:16-17).

 

돌이켜 오늘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접하다 보니,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50:5-6).

 

그러므로 오늘 이 주일 아침에,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1-3).

 

이것이 나의 기도가 되고 신앙 고백이 된 것에 감격한다. 나는 늘 지나온 나의 날들을 돌아볼 때면,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5-6).

 

그런 나로 하여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12-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