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 17:24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6:12-13
성경의 비유와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함축한다. 본문은 두 독수리와 백향목과 포도나무의 비유로 시작한다(1-10). 두 독수리 가운데 한 독수리는 크고 털이 많으며 화려하다. 그러나 다른 한 독수리는 단순히 크고 털만 많고 화려하지 않았다. 이중 화려한 독수리는 레바논의 백향목 높은 가지 중 연한 가지를 꺾어 장사하는 땅에 이르렀다. 그것을 상인의 성읍에 두고 그 땅의 종자를 꺾어 큰 물가 옥토에 심었다. 그것이 자라서 포도나무가 되었는데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다(3-6).
이처럼 화려한 독수리가 포도나무를 큰 물가에 심은 것은 그 포도나무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8). 그런데 이 포도나무는 자기를 심은 화려한 독수리가 아닌 단지 크기만 하고 화려하지도 않은 독수리에게서 물을 받기 위해 그를 향하여 뿌리를 뻗고 가지를 켰다(7). 이어서 비유는 이 포도나무가 번성하여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 평가한다(9-10).
이에 따른 설명이 이어진다(11-15). 화려한 독수리와 다른 한 독수리는 각각 근동의 패권자로 부상한 바벨론과 전통적 강대국으로 애굽을 상정한다. 화려한 독수리가 레바논의 백향목의 높은 곳에 있는 연한 가지를 꺾어 상인의 성읍에 두었다는 것은 바벨론이 여호야긴 왕과 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 땅으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 화려한 독수리가 그 땅의 종자를 옥토에 심었다는 것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운 것을 나타낸다. 그 포도나무가 자라서 독수리 아래서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시드기야 통치 하에서 유다가 제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나무가 단순히 크기만 한 다른 독수리에게서 물을 받으려고 하였다는 것은 시드기야가 자신을 유다의 왕으로 세운 바벨론의 언약을 배반하고 애굽을 의지한 것을 의미한다.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게 된다는 것은 애굽을 의지한 시드기야와 유다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좌를 차지하고 그 나라를 번성케 하시며 못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실 것임을 복합적으로 예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에스겔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마치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상세하게 에언하고 있다. 그의 예언이 단지 그의 추론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감동과 계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인한을 나타낸다.
이어지는 비유의 해석은 포도나무로 비유된 시드기야와 관련한 주요 사건과 유다 폐망을 예고한다(16-20). 바벨론 왕과 맹세로 세운 언약을 배반한 시드기야와 유다가 비참하게 멸망하게 된다는 것,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주전 598-586년) 애굽 왕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589-570년). 필요할 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체포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게 되며 유다 백성들은 살육과 흩어짐을 당하게 된다.
끝으로 또 다른 백향목 비유를 보도하고 었다(21-24). 하나님께서 백향목 꼭대기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으심으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각종 새가 그 가지 아래 깃들어서 살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 중 겨자씨 비유를 연상하게 한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약 선민을 향한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다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의 반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다 성취될 일들이다. 우리가 이를 믿고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의 뜻과 같이 견고하고 확실하게 실로 든든히 세워지게 될 것을 알게 하신다.
본문의 비유와 그에 대한 설교는 우리로 더 넓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두 독수리와 백향목 및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하여 각각 바벨론과 애굽과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백성의 관계를 선명하게 이해시킨다. 그 가운데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임명된 시드기야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인상적이다(1-21). 이어서 선민의 회복에 대한 예언도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 예수의 상상하게 한다(22-24). 이를 통하여 고난과 소망이 한 걸음씩 같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이번 주일에 나누게 될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다 큰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진다. 인생의 극한 절망이랄 수 있겠다. 그런 가운데 ‘고난의 유익’은 거짓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욘 2:8).” 하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며 아뢴다. 곧 바다에 던져졌을 때도 하나님은 저를 위해 미리 물고기 뱃속을 예비하셨다. ‘물고기 뱃속’은 중의적인 의미로 고난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호의 장소이다.
거기서 요나는 잃었던 서원을 되찾았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9).” 그러므로 감사는 우리 ‘입술의 수송아지’이다.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 같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이는 우리 ‘입술의 열매’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4-15).”
요나 역시 중의적인 인물로 우리 자신의 불순종의 죄인인 것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요나와 같이 삼일삼야를 무덤에 계셨다가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나와 같이 선민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회개와 용서를 약속을 선포하셨다. 호세아는 이를 증거 하길,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 하고 예언하였다. 요나의 서원과 찬송으로 이를 더욱 깊게 한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욘 2:9).”
결국 성경의 예언은 자칫 그것이 멸망을 향한 것이라 해도 그 너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전한다. 고난의 현장에서 소망의 빛이 드러난다. 이에 바울 사도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말씀은 나의 부친에게 있어 결정적인 소망의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그리하여 사업에 실패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고 사역을 감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 죽음의 자리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살리시기 위한 자리였음을 말씀은 소망이 되어 우리로 나아가게 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곧 이 소망은 막연하게 ‘잘 될 거야!’ 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미 확정되고 예비 된 장래의 일이다. 이것이 오늘에서 마련된 것이 아니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의연할 수 있다.
여전히 나는 자주 왜 하필 나 같은 자로 주의 종을 삼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지난 주일 오후 상견례 자리에서도 저의 간증과 교회에서의 열심을 들으며 저이 같은 이가 주의 종이 되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비루하고 보잘것없어 오늘도 신경안정제에 의존하여 하루씩을 사는 중이다. 그것도 이상한데 늘 보면 조울과 공황과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곁에 있어서 저들의 사연을 듣다가 내가 운다. 앞서 누구는 남편을 잃고 그이가 하던 사업을 일구며 강인한 여성으로 산다.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을수록 그의 영혼은 시들해져간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술에 의존한다. 사업을 핑계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위선적인 자신으로 괴로워한다.
나는 종종 답이 없는 질문을 받고 나 혼자 끙끙 매는 것 같다. 도저히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없을 것 같다. 대부분은 하염없이 자기 이야기로 사람을 들들 볶는다. 서너 시간을 그렇듯 시달리다보면 나의 불안도 고조된다. 실은 답이 없는 게 아니다. 저마다 교회를 다니거나 믿고 있다고 한다. 혹은 예전에 다녔다고 한다. 저들도 이미 그럼 답을 알고 있다. 우리도 요나와 같이 고난이 왔을 때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마다의 예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또 이를 알려 전하면 다들 나름의 방법을 고집한다. 앞서 저이도 그래서 더 술에 의존하고 사람들과의 교류로 ‘애굽을 의지한다.’ 얼마 전 조현병으로 힘겨워하는 아이엄마는 그래서 혼자 벌어서 아픈 아이를 건사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제는 노래방 도우미라도 불사하고 밤거리로 나간다. 다들 정답을 알면서도 한사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누군 그래서 더 부동산이나 경매에 몰두한다. 그 신앙의 허탈함은 혼자 잠시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서 성경을 공부하듯 읽고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피면서 지식적으로 말씀을 다진다. 누군 더 악착같이 돈을 벌고 더 모아서 노후를 대비하고 자식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직도 현장에서 몸소 열심을 다해 산다. 사느라 교회를 떠난지 오래다. 세상은 저들을 높이 평가하고 스스로도 그러한 자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참회와 속죄의 시간을 뒤로 한다. 목사인 나를 앞에 두고는 자신들의 수고를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으며 변명하듯 정당화한다. 그러면서도 기도를 원하고 말씀을 원하는 것인데, 그 상한 영혼의 불씨를 살피는 일이 늘 어렵다….
오늘 본문의 비유와 역사적 사실과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서 나는 또 다시 먹먹해진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에게 당면하는 현실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알게 하시려고 이런저런 환경과 사람과 상황을 두어 비유로 또는 예언의 증거로 삼으신다. 이를 어찌 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어서, 나는 종종 나 혼자 내 곁의 한 영혼으로 신음하다 저가 훌쩍 그만두거나 다른 길로 갈 때면, 순간 길을 잃는 기분이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나 혼자 뭘 하고 있나?’ 싶다가도, ‘이 길이 맞나?’ 싶다가도…. 다시 또 다른 사람을 붙이시는데, 저 역시 아이가 혹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병들었거나 현실에 부딪쳐 상한 영혼으로 호소하는 것을 듣는다. 그럼 또 다시 씨름하다 덩그러니 혼자만 남겨지는 기분이다.
이처럼 에스겔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붙들고 전하여 자신이 포로로 잡혀가서도 이처럼 주의 뜻을 전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유다의 멸망이었다. 우린 과연 무엇을 붙들고 서야 할까? 지혜자가 답을 준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잠 2:4).” 여기서 ‘그것’은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3). 이는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5-6).” 고로 우리는 인내하여 찾고 구함으로,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7-8).”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나의 결과가 늘 나 혼자 남겨져서 다시 또, 다시 또, 같은 일의 반복인 것처럼 소위 교회가 늘 열 명도 안 되는 성도로 유지되고, 그나마 반은 이런저런 이유로 모이기에 힘쓰지도 않는 가운데 근근이 후원의 손길로 교회를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낙심하지 말 것은,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115:13).
그렇게 무던히 주를 경외하는 자로,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일이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그리하여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잠 21:30).” 다만 주가 이루실 것이라, 내 곁의 안타까운 사연들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스스로들 수고하여 어찌 해보려는 열심인 것을 두고 주의 은총을 구한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오늘도 이에 말씀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시편으로 산다. 하여,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시 96:1-2).
오늘도 나는 보잘것없으나 이 시간으로 주께 드리며,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9-10).
이에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4).” 하심과 같이,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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