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겔 19:1-2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2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애가를 부르는 자들이다. 바벨론에 잡혀가 그발 강가에서 눈물을 지으며 찬송하던 시인과 같이 이 땅의 죄악으로 슬퍼해야 한다. 아이가 병들어 정신과 약을 의존하고 불안정한 가운데 분노조절이 어려워서 스스로도 난감해한다. 수업할 때 나는 아이 앞에 나와 앉아 원고를 읽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사춘기까지 와서 아내의 말에 토를 달고 비딱한 말투로 서로가 날카로워져서 말이다. 아이는 그래도 내가 어려운지 수업 중에 나와 앉아 있으면 고개를 푹, 숙이고 고분고분해진다. 그런 아이를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하며 마음이 어렵다. 저들 부모는 사느라 분주하여 아이를 건사하지 못한다. 위로 성인이 된 아이도 있다는데 은둔형외톨이로 자기 방에 스스로 갇혀 게임만 한다. 몸은 고도 비만으로 거동이 불편할 지경이라 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내 곁으로 여러 가정이 비슷한데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더 많을 것이다. 유난히 아이들이 병들어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온전한 가정이 드물다. 더하여 내가 그 사연을 듣거나 서로 상담하는 경우는 열에 아홉이 ‘예전에’ 교회를 다녔고, 자신은 믿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자신한다. 기도를 부탁하면서도 자신들은 더 이상 기도하기를 포기하였다. 그때마다 여기 용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간다. 당장 무엇이라도 잡고 싶은 것인데, 사실 저 아이도 곧 좋아질 거라는 어느 용한 아무개가 말해주어 모든 치료나 검사를 거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애가를 지어 부르라 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1).” 애가는 슬픔의 노래로 동시대의 예레미야의 애가가 별도로 있을 정도이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으라’ 하신다. 방백들은 나름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다. 지도자나 통치자를 뜻한다. 또한 간접적으로는 당시 시드기야 왕을 가리킨다. 이에 애가(哀歌)는 일반적으로 슬픈 곡조의 성격을 띠는 시(詩)이다. 아모스 선지자도 애가를 지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암 5:1-3).”
애가는 이음절로 간결하게 호흡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방백들에 대하여 애가를 짓도록 한 것인데, 이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고귀한 신분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잘 목양(牧羊)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바,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교훈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어 묻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하고 은유적으로 서술한다.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2).” 여기서 ‘네 어미’란 비유적 표현은 요시야 왕의 부인이며, 여호아하스 왕의 모친인 하무달을 가리킨다.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왕하 23:31).” 더하여 일반적으로는 유다 왕국을 가리킨다. 한 국가나 지역을 ‘어미’로 묘사하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사 50:1).” 이를 시편에서도,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
(시 87:5-6).
이와 같이 한 국가 또는 지역이 ‘어미’로 묘사되는 것은 그 국가 또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그곳에서 출생하고 안주하며 그곳에 예속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호 2:4).” 오늘 에스겔에게 이를 ‘암사자’로 표현한다.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겔 19:2).” 유다나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된 표현에서 ‘사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 49:9).” 하거나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민 23:24).”
오늘 본문도 ‘암사자’라 표현하는 데 있어 ‘사자들’이나 ‘젊은 사자’와는 다른 의미로 이 암사자의 생산성 또는 양육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듯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있다. 유다 왕국 주위에 거하는 이방 열국들이다. 암사자가 다른 사자들 가운데서 편안히 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유다 왕국이 이방 열국 가운데 안연히 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칼빈(Calvin)은 이를 사자가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유다 왕국이 주위 이방 열국들과 마찬가지로 안일하게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설명은 유다 왕국 말기에 국한된 것이기 보다 평소의 현상을 뜻한다. 여기서 ‘그 새끼’란 여호아하스를 가리킨다.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겔 19:3).”
곧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악을 애가의 형태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각 개개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앞서(18장) 밝힌 뒤, 본문은 이스라엘의 상층부 곧 지도자들의 죄를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여호아하스 왕이 애굽의 포로로 잡혀간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1-4). 이어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실을 비유하고(5-9), 이어 바벨론에 의해 세워진 시드기야도 이내 포로로 잡혀간 사실에 대해 애가를 지어 슬퍼하는 것이다(10-14).
외람된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부모의 생활과 그 죄의 형국으로 아이들이 병들어가고 있다. 가령 두 형제 아이의 경우 이제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부모의 잦은 다툼과 이혼으로 작은 애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데 항정신성약물로 버티는 실정이다. 큰 애는 눈치껏 요령껏 거짓말이 늘어간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지만 듣기로는 남편의 잦은 폭언과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다 이혼하였다. 아이엄마는 아이들 몰래 그런다지만 술담배에 의존하고 돈벌이를 위해 노래방도우미로 밤에 주로 일을 간다. 아이들도 눈치가 있다. 어떤 냄새가 나고 무슨 일을 하는지, 큰 애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 방치되어 게임에 빠져서 모든 훈계와 지도의 방법이 핸드폰으로 이를 빼앗거나 못하게 하는 것으로 통한다. 그러니 밤새 아이들은 게임에 방치되어 각각 구석에서 날을 샌다.
오늘 이 슬픈 애가는 방백들에게 향한 메시지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파멸이 아닌 평온에 대해 헛된 소망을 갖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두 개의 상호 보완적 애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암사자와 사자들로 표현하고(1-9), 두 번째 부분은 포도나무로 표현한다(10-14). 에스겔은 본장의 내용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역설적으로 서두에 밝히며 시작한다(1). 곧 다윗 왕가를 암사자에 왕들을 젊은 사자에 비유한다(2-6). 동일한 방식으로 다윗 왕가를 포도나무에, 왕들을 가지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네 피의 어미는 물 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실과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그 가지들은 견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서 보이다가(10-11).”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우리를 가지에 비유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포도나무 비유는 하나님과 택한 백성의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서술이다. 에스겔은 애가를 통해 유다 왕국의 패망을 슬퍼하고, 유다 백성들의 죄와 슬픔을 후대에 가르치려 한다. 결국 유다 왕들의 죽음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도록 촉구한다. 평온에 대한 헛된 소망을 갖지 못하도록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이 땅에서의 소망으로 자칫 참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간혹 누구는 어떤 실패나 성공으로 그 신앙의 완성도를 평가한다. 누가 잘 되고 어디서 평온하면 이를 축복으로 규정하여 은혜라 한다. 누가 어려운 지경에 놓여 간혹 깊은 슬픔에 빠졌다면 이를 죄로 연결하여 벌 받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매우 단편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로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의 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경의 영웅들은 모두가 고난으로 씨름하고, 어려운 지경에서 어찌 그 믿음을 지켰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작사도 대부분 그와 같은 극한 슬픔으로 빚어진 주옥 같은 신앙고백들이다.
오히려 나는 누가 믿는 자로 잘 살고 평안을 누리며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을 위태롭게 여긴다. 그런 이유로 저는 헌금 잘 내고 교회에 뭘 잘 하고, 무슨 헌신을 했고 하는 식의 자가당착에 빠진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교회에서도 안타깝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은 소외되고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누가 간증을 할 때 가장 위험한 결론은 ‘~해서 ~일을 겪고, 그래서 이만큼 축복을 받았다.’ 하는 식이다. 가령 누가 사업을 하는데 자신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를 낸다고, 사업가로서 돈의 원리를 알았다는 식으로 소개한다. 누구는 무슨 일에서 어떻게 교회에 충성했더니 죽을병에서 나았다고 한다. 일명 ‘나가서도 복을 받고 들어와서도 복을 받는다.’는 논리인데, 이는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리로 접근하는 것과 같다.
물론 모든 고통과 죽음의 원인은 죄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죽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하여 욥의 간증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13:15, 42:5).” 이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다. 경이롭고 영광스럽다. 하여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6-37).” 이를 성경은 단언하길,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38).”
하여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으나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39-40).” 하는 말씀으로 우리 믿음의 놀라운 증거는 새롭다. 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렇게 찬송가의 가사들이 나온 것이고, 많은 이들의 신앙고백이 현실의 어떤 현상과 사태에도 불구하고 주를 영화롭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 짐작하는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들의 소행과 그 죄악들로 인하여 여호아하스는 주전 609년에 애굽에 끌려가 죽었다. 여호야김은 주전 609-598년 동안 통치하였는데 요시야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악하고 무능하였다. 저는 바벨론에 대항하다 끌려갔다.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왕하 23:34).” 여호야긴은 주전 598년에 느부갓네살 침공 때 포로가 되었다.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왕하 24:8).”
시드기야는 주전 597-586년에 통치하였는데 요시야의 3자(子)로 에돔, 모압, 암몬, 베니게, 유다의 연합으로 바벨론에 반대하다 멸망하였다.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왕하 24:17).” 이와 같이 본문의 애가는 유다 말기의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선포되고 있다.
또한, 본 단락의 애가는 예레미야의 애가와 동일한 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망해가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슬픔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본문의 배경은 여호아하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3절에서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라는 표현은 여호아하스가 행한 악과 잔인성을 표현한 말이다.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왕하 23:34).”
곧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하는,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겔 19:4).” 하는 내용은 애굽과 그 동맹국들이 여호아하스의 침략 정책을 보고 그를 잡으려고 함정을 놓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바로느고에 의해서 여호아하스가 사로잡혀간 사실을 말한다.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비유한 것이다(렘 22:11-12).”
이러한 내용을 살피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위안을 삼고 의지할 때 그것으로 참 소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알게 한다. 하여 예레미야는 슬픈 노래에서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애 3:24-25).” 이에 시인은 우리로 주목하게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11).
오늘도 이 한 날을 사는 동안 내 곁의 상한 영혼을 위해 애가를 지어 주를 바란다. 이런저런 사연은 다양하겠으나 공통적으로는 주를 멀리하거나 외면하면서 드러나는 현상으로 세상을 의지함이다. 애굽을 찾아가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였던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는 얼마나 더 세상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시 98:2-3).
자, 오늘 우리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4).
이는 우리에게 더하신 사명이고 주가 영화롭게 하심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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