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겔 20:19-20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시 99:1-2
인생의 여러 문제의 답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기쁨도 슬픔도, 어떤 어려움도 형통함도 모두 주께 그 답이 있다. 한데 주께서 묻지 마라, 하시면 우리로서는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으니 답을 찾기보다 만들려고 우상을 둔다. 각자의 산당으로 향한다. 거듭되는 본문의 내용도 그런 관점으로 예언을 이어간다. 곧 선민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에 대한 예언을 다루며 특히 유다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다. 앞서 성전이 피폐해지고 사람들이 성전까지 우상으로 더럽히고 여러 방백과 제사장들이 성전 뜰에서 태영신을 섬기는 것을 보았다.
오늘 본문은 주전 591년 5월에 주어진 계시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께 물어도 답하지 않으실 것을 알리신다.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3).” 하시고 한 번 더 강조하여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31).” 여기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다.
즉 저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심으로, 그 이유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곧 선민의 패역과 여호와의 인내의 역사가 거듭 반복되는 가운데 자신들의 오랜 포로 생활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나 알려주지 않으신다.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이를 거듭 되풀이하는 가운데, 우리는 단지 숭배하는 우상에게 묻듯이 하나님께도 묻기 위해 ‘에스겔에게 나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주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거나 뒤로 하면서 스스로는 신자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분명 이는 증표요 표징이다.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12).” 그럼에도 안식일을 더럽히는 가운데 주께 묻기를 바란다는 게 염치가 없다. 응답은커녕 묻는 것 자체를 용남하지 않으신다.
패역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은 하나님의 심판뿐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먼저 패역과 구원이 교차한 선민의 역사를 지적하시며 상기시키신다. “인자야 네가 그들을 국문하려느냐 네가 그들을 국문하려하느냐 너는 그들로 그 열조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4-5).”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그럴 때마다 여호와의 인내가 어떠하셨는지,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 하여 행하였음이로라(8-9).”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참고 또 인내하심은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 하여 행하였음이로라.” 하심으로 이 모든 역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신다. 마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조명하여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생각하지만 그 사랑의 완전은 하나님께 향한다. 곧 하나님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14).”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에 영광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곧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22).” 오늘 본문에서 이처럼 강조하심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고로 오늘 우리의 섬김은 주의 영광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산적한 우리 인생의 질문에 답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물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곧 다윗은 늘 하나님께 여쭈었고 그 답을 좇아 행하였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5:19).”
이스라엘의 비극은 이러한 물음에 문이 막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더는 답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토록 애굽에서의 불순종과(1-9), 광야생활에서의 불순종(10-26),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27-29), 그리고 에스겔 당대의 불순종(30-44)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에 남방에 불을 보낼 것을 예언하시는 것이다(45-49).이처럼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불순종은 오늘에도 이어져 우리 삶을 조명한다. 계속되는 반역과 배도의 삶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렘 34장).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렘 34:2).”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과 성실하심으로 백성들을 돌보시며 또한 참고 인내하심으로 긍휼을 더하셨으나 우리는 끊임없이 배반을 일삼았다. 출애굽의 과정에서도,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에서도,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를 만홀히 여겼다. 이를 나의 삶에 놓고 볼 때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도 저들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이방과의 연합을 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그러하듯 오늘 우리의 삶도 같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이스라엘의 범죄와 역사를 대비하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오늘 우리의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의무가 있는데 이를 저버리고 세상을 따라 간다. 다들 그렇다는 식의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한다. 마치 하나님을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존재로 여기는 것 같다. 자기들 필요할 때만 부른다. 스스로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누구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교회를 어찌할까 할 때, 앞으로의 일을 마치 사업을 구상하듯 이해득실을 따진다. 조금도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의 영광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형편을 놓고 보면 임대료도 빠듯하여 간신히 유지되는 상황에서 마치 사업적인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접근으로 대화가 이어져서 불편하였다. 하나 주님은 이르시되,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나는 그저 듣기만 하다 속으로 또 마음으로 되뇌어 기도할 뿐이었다. 설령 문을 닫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기를. 이를 위해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그러기 위해 먼저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스스로도 죄가 없다고 느끼면서 어떤 은혜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곧 은혜는 회개에 비례하고 감사는 기도에 산물이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미 3:4).” 오늘 본문에서 왜 이처럼 하나님이 더는 묻지 말라고 하시는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곧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럼에도 주일을 엄히 여기지 못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거나 뒤로 하면서 무슨 표징을 구하는 것일까?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인색하면 그 또한 얼마나 아둔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는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우리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더하신다(1-32). 유다의 패역한 역사(20-24장)에 대해 거듭 지적하는 것은 오늘 우리로 듣고 보고 자신을 깨달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정작 이스라엘은, 소돔성은, 노아의 때 사람들은 끝내 듣지 않고 외면하여 멸망하였다. 현재 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산당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 (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29).”
산당은 히브리어 ‘바마’라 하여 본래 단순히 지방의 성소가 서 있는 언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섰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에 들어오셨나이다(삼상 9:12).” 후에 이 신성한 장소라고 생각되는 곳을 가리킬 때도 바마 곧 산당은 유용하였는데, 그렇다 해도 유일한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후에도 ‘바마’는 유지되었고, 기어이 우상을 섬기고 저들에게 제사하는 장소로 변질되었다. 곧 우상 숭배의 온상이 산당이다.
이와 같은 ‘바마’ 곧 교회를 대신하여 주일이면 우리를 부르는 곳이 여럿이다. 저마다의 사정과 그 일정에 따른 것이겠으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심을 가벼이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코로나로 인한 ‘줌’이나 ‘영상’을 통한 예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전에는 더러 어쩌다 주일에 교회를 빠지면 그것으로 문제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어디서든지 줌으로도 예배에 참여한다. 더러는 누구와의 약속으로 카페에서, 더러는 이동하는 대중교통 안에서… 그래도 되는 저마다의 산당이 생긴 것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릴 때 이스라엘은 유다에 속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산당을 장려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서로 이념논리가 달라서 그리 됐다 해도 신앙의 문제에서는 그리하면 안 됐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다.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 하여…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금하고 달리 행하였었나니… 열국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다(9, 14, 22).”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여러 번 반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도록 하신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이에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고로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게 아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내 이야기로 역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 상태를 책망하심은(33-39), 저들로 장차 회복될 나라에 대한 예언이다(40-44).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심판과 연결되어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예배의 회복과 직결되어 있다. 미래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온전함으로 우리의 신앙은 바로 선다. 오늘도 이처럼 말씀으로 시작하고, 주일에 말씀이 전하여지는 것도 예배의 회복이 곧 구원과 축복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변화를 받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럼 우리가 드리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란 무엇일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곧 오늘 이 하루를 사는 동안 여러 행사에 그때마다의 상황이 각기 다르겠으나,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이 날은 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벌써 우리 안에 이루어져 가고 있다.
곧 오늘도 우리가 우리 안의 산당을 헐어버리고 쫓아낸다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귀신은 사탄으로 죄다. 죄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모든 기쁨도 위로도 성공도 만족함도 모두 다 포함된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는 인생의 답을 구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1-3).
오늘을 살면서 사는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5, 8-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지라 (0) | 2026.02.17 |
|---|---|
|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 (0) | 2026.02.16 |
|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0) | 2026.02.14 |
|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 (0) | 2026.02.13 |
|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0) | 2026.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