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겔 21:27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
시 100:4-5
유다에 대한 심판 에언 가운데 주전 591년 5월 10일에 주어진 계시를 다루는 20장 1절에서 23장 49절까지의 기사 내용의 연속이다. 남방 삼림을 비유로 유다의 멸망과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을 20장 33-44절에서 진술하고, 이어 바벨론을 통한 유다 심판을 예언을 일련의 ‘칼의 비유’로 서술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그 얼굴을 예루살렘과 성소를 향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을 쳐서 예언하라(1-2).”
칼을 빼어 심판을 시작하실 것에 대한 예언과 백성들 앞에 탄식하며 다가올 재앙을 경고하게 하신다(3-7). 여기서 ‘칼’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가리키며, 그 칼로 유다 전역을 친다는 것은 바벨론으로 유다를 유린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유다 백성들의 목전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 탄식하며 행하라 명하셨다.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집에서 빼어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혀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5-6).” 이는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이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적인 것이 될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다.
이에 칼의 날카로움과 빛남이 부각된 비유로 예언하여 에스겔에게 부르짖으며 넓적다리와 손뼉을 치며 재앙을 경고할 것을 명하신다(8-17). 이러한 본문은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가혹할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살육자의 손에 넘기실 것을 알린다.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마광되었도다(9).” 곧 이는 ‘마광되었다’ 하는데, 이는 마치 돌을 자르며 튀는 불꽃 같이 날카롭고 가차 없음을 뜻한다. “그 칼이 손에 잡아 쓸만하도록 마광되되 살륙하는 자의 손에 붙이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마광되었도다 하셨다 하라(11).”
이어 에스겔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넓적다리와 손뼉을 치며 행하라 하심(12-14)은 칼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공할만한 것임을 백성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공격에 세 번씩 연이어 거듭되며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렇게 칼의 경로가 부각된다(18-27). 이 비유는 앞서 에스겔에게 칼 곧 바벨론의 침략의 경로가 미리 작성되어 명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마치 니느웨로 가라 하실 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욥바로 가서 다시스로 배를 탔던 요나로 인하여 광풍이 준비되고, 이내 바다에 던져질 때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앞서 준비하셨던 것과 같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욘 1:17).”
곧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칼’로 바벨론 군대를 준비하셨고 저들로 몇 차례 거듭 침략하여 유다를 침범하고 예루살렘을 함락하게 하신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바벨론 왕은 동일하게 자신을 배신한 유다의 예루살렘과 암몬의 람바를 침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성읍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데서 예루살렘을 먼저 공격할 것을 예언한다. 그리하여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함락하였고(주전 586년), 연이어 암몬의 수도 랍바를 쳐서 함락하였다(581년). 이렇듯 바벨론을 통한 유다 심판을 예언하는 ‘칼의 비유’는 예루살렘은 물론 암몬 또한 멸절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28-32). 암몬이 유다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회개하기 보다는 마치 자신들은 안전하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며 멸망하는 유다를 조롱하고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에스겔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도 존재하시는 분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에 거침이 없으시다. 더러 너무 가혹하고 가차 없어 냉혹한듯하나 앞서 하나님의 뜻은 수없이 많이 전달되었고, 더러는 그에 따른 순종으로 복에 복을 더하시기도 하였으나 어김없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일은 거듭되었다. 앞서 수많은 선지자들과 사사들을 세워 그때마다 다시 또 용서하시고 징계하시고 경고하시고 다시 회복하시기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하셨다. 이는 오늘 우리의 모습도 그리 다를 게 없다.
하여 성경의 관점은 고난이 유익이라 정의한다. 시인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며 이를 고난 중에 알았다고 했다(시 119:67, 71). 바울 사도는 덧붙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5).” 우리로 소망을 알게 하는 것이 고난인 것을 강조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도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하는 주의 뜻을 전하였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즐거울 때나 슬플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주어진 삶에서 복된 날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말하길 살아서 산 자의 의지로 깨달아야 할 것을,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죽어서는 더 이상 회개도 용서도 없다. 원망과 변명과 이를 갈며 슬픔만이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는 패역의 역사로 규정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부각시키는 20장에 이어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역의 길을 갔던 이스라엘의 철저한 죄악으로 ‘칼의 심판’은 예고된 것이다. 즉 오늘 본문은 ‘남방에 대한 심판(20:45-49)’을 해석하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1-7). 앞서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있었음에도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도 암몬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과 같다(21:28-32).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칼’에 의한 살육으로 비유하는 오늘 본문(8-17)은 결국 바벨론에 의한 절박한 심판을 예언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18-27).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세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 아들을 내어주어 죽이시기까지 하신다. 죽여서라도 살리신다. 이를 바울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곧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이 영혼의 구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에 따른 연마의 과정이다. 이에,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1-22).”
요나를 통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해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은 설령 저들이 악하다 하여도 동일하게 하나님는 돌이킬 수 있는 시간과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신다. 곧 저들로 하여금 나중에 더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말씀은 임하였다.’ 다만 바울의 설교와 같이 듣기 싫어하고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였으니 이는 어쩔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9-20).”
다시 말해 그 어떤 제 3국가라 해도 또한 타종교를 국교로 섬기든지, 하나님을 저들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그 속에 두셨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저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그 마음에 두었고 심지어는 문화나 예술, 유행과 상식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대신하였다. 그 결과 바울의 설교는 오늘의 실상을 그대로 표출한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23-24, 26-27).”
각종 우상은 물론 성매매는 어떤 식으로든 역사를 달리해도 성업 중이다. 하여,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8-31).”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현상이 그러하다. 이는,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32).”
마치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앞서 있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들을 돌아보아 바뀌었어야 하는데도 남유다는 그러지 않았고, 유다의 멸망을 보면서도 암몬은 기뻐하고 조롱하였을 뿐이다. 이에 ‘여호와의 심판의 칼’로 비유하는 데 있어 ‘악인은 악한 날에 쓰인다.’ 곧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신속하고 전면적으로 집행되었음을 예언 이후 연이어 증명되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각성을 유도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엄중함을 드러내고자하였다. 이상과 같은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에 있어 오늘도 동일한 것을 이사야는 알게 한다(사 60:21-22).
이를 수없이 강조하고 또 경고해도 오늘 날 우리 교회나 믿는 자들의 시각은 안이하다. 연일 스포츠에 열광하고 코스피 상한가에 환호하며, 곧 있을 BTS 광화문 공연에 열을 올린다. 저렇듯 한 번 공연으로 수조 원의 수익이 창출된다는 데서 사람들은 미쳐 날뛰고, 고작 몇 년의 노후 생활을 윤택하게 살고자 영원한 삶을 담보로 위태로운 도박을 즐기는 것 같다. 설마, 하고 오늘을 웃어넘기며 조롱하듯 말이다. 회개하기는커녕 이러한 말씀에 불평이 따른다. 너무 그러지 말라며 한사코 가벼이 여기며 외면한다.
이는 마치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의 멸망 직전과 같다. 농담으로나 듣고 만다. 이내 방주의 문이 닫히는 날 하늘이 열리고 땅이 솟구쳐 물이 범람할 때는 늦었다. 불기둥이 떨어지고 난 뒤에는 돌이킬 수가 없다. 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러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셨다. 더는 기회가 없는, 소금기둥으로 굳어져 그 영혼이 떠난 뒤에는 저가 ‘죽은 사자’인들, 황금 용이었든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이 땅에 이름 석 자를 남긴들, 그래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가?’ 그렇지 않을 것은 그것으로도 산 자의 몫이다. 4.3 제주 항쟁을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무슨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어느 작자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게 아니라 기어이 살아서 산 자들에 의해 재조명되는 것이다.
오늘 이 ‘여호와의 칼의 심판’을 보면서 이것이 주전 586년에 있었던 유다의 멸망이 아니라, 주후 2026년의 오늘을 조명하고 있음을 묵상한다. 곧 죄의 악습은 끊어야 한다. 우리의 가까운 날에도 이와 같은 가혹한 심판의 때가 올 것이라,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 하여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을 산다면, 그때의 시각이 오늘에 우리로 경각심을 갖게 한다면 살 것이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증거하였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단 2:22-23).”
이에 예수님도 이르시길,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
곧 오늘의 어떤 어려움이 또한 고통의 순간이 복인 것은 이로써 우리가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은 그리하여 저로 기도하게 하였고 서원을 이행할 것을 다시금 다질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하나님은 분명히 먼저 우리로 알게 하신다. 표적을 보이시고, 이와 같은 말씀으로 교훈하시며, 삶의 현장에서도 겪게 하시는데,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 16:4).” 그러니 수만 번을 참고 또 기다리시며 다양한 사람과 사건과 역사를 통해 알게 하시는데도 부정한다면 더는 가망이 없다. ‘저희를 떠나가시다.’ 하는 말씀에서 두려움이 몰려온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대부분은 이러한 메시지에 반응으로 ‘다음에’ 또는 ‘에이 설마!’ 하고 회피하거나 미루려는데 그 이유는 당장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안위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재림 예수를 바라는 것은 이 땅의 고단함으로 육신은 물론 온 영혼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도 다르지 않다. 오늘도 이 한 날을 하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1-3).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감사한다. 아프고 괴롭고 고달프고, 실패와 좌절뿐이라 해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것으로 나는 안도한다. 참 다행이다. 내가 주의 것이라, 나의 허물과 죄악뿐인 나의 모든 것을 주가 책임지시고 감당하셨다. 고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
(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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