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호 7:1-2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 146:6-7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신다. 치료자 하나님을 ‘여호와 라파’라 하는데, 이는 형벌을 뜻하지 않고 죄악을 회개시키기 위한 예언자들의 책망과 훈계를 가리킨다. 마치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고 끊어진 것을 이을 때에 고통이 더욱 심한 것과 같다. 곧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을, 예언자들의 책망이 회개에 따른 치료의 가능성이 있어서인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돌이켜 그 마음에 찔림이 가해질 때 복이 있는 것과 같다. 말씀은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을 지목하여 부른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사마리아는 그들의 수도로서 도덕적 부패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 곧 그 죄악을 하나님이 치료하시려하나 이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1-2).”
곧 저희가 노략질하며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하심은 이스라엘의 개인이고 집단이고 모두가 온갖 악행들을 저지른 것을 말한다. 이를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기억하여 형벌을 내리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저들은 마음으로부터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란 것이다. 곧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의미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여 나타나는 형상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 사회의 악한 모습을 그대로 연상하면 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이와 같은 사회적, 개인적 현상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이루어진다. 하여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악 된 행위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답습되고 이어져 오는 악의 실체이다. 그 죄악이 너무 커서 회개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인 것을 오늘 본문은 지목한다. 이처럼 사방에 둘러싸인 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어서 악행을 일삼는 일에 뻔뻔함을 더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결코 숨기우지 못할 것임을 말한다. 곧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8-9).
곧 죄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내보여야 한다. 숨기고 하나님조차 모실 거라 여겨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윗은 이를 고백하였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3-4).
마치 모두 다 모를 것 같으나 자신은 안다. 자신이 아는 것을 하나님은 모르실 거라 여기는 데 대해 다윗은 참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나는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나의 잘못과 허물을 돌아본다. 주 앞에 이를 인정하며 용서를 구한다. 가령 내가 공황이 오고 어려운 마음으로 살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를 구실로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엊그제 아버지 집을 다녀오며 청평에서 인천까지 매달 한 번씩 예배를 인도하러 오셨던 부친의 수고 앞에 새삼 감사를 느꼈다.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드러나지 않을 죄는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스스로도 잘 숨기고 살았을, 그래서 기억에서조차 지우고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하심을 주의하게 한다. 이에 나는 이와 같은 글쓰기를 자주 권한다. 일기 쓰기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이를 말씀으로 비춰서 주 앞에 내어놓는 시간으로 묵상이 또는 우리의 일상이 드려져야 한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21).” 이에 따른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일기 같은 일상들이 주의 앞에 펼쳐져 있다.
이를 무시하고 살 때 우리는 아첨하고 뇌물을 받고 하는 은밀한 죄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잠 1:19, 15:27).” 같은 내용 속에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본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죄란 이어져 흘러 온 일가와 후대까지 병들게 한다. 상대적으로 이번에 우리 형제들이 모두 부친의 소식에서 감격해하는 것은 생전에 아버지의 회심과 소명이 우리 가족들은 물론 주변의 많은 영혼을 살렸다는 것이다.
뒤늦게 알고 예전에 교회 형님들 곧 다들 목사님들이 된 서너 명의 저들이 연락을 하고 만나기로 한 모양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형들은 중고등학생으로 당시에 교회는 방과 후 모임 장소와 같았다. 더욱이 교회에 사택이 좁아서 교회 마루에서들 나가서 잤는데, 널찍한 교회 바닥에서들 뒹굴며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 형님들이 대체로 주의 길을 가는데, 어떤 이는 선교사로, 어떤 이는 신학교 교수로, 목사로 다들 주의 일을 행하며 산다고 들었다. 지난해에는 한동안 선교사로 나갔던 이가 잠깐 귀국하였을 때 다들 모여 청평 부친 댁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던 모양인데, 이번 일로 황망한 마음이야 같은 것이라 우리는 이번에 미처 연락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곧 한 영혼이 주 앞에 돌이키는 일이란 전우주가 뒤바뀌는 일과 같다. 내 또래들 역시 당시 나환자촌 교회에서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한 번에 세례를 받으면서 성경공부를 했었는데, 그 가운데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사모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곧 우리가 속하여 있는 그 작은 공동체의 놀라운 역사가 이 작은 한 알의 밀에서 발화한다. 그래서도 더욱 더 주의할 것은 행여 주를 떠나면 얼마든지 다시 악으로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일이어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시 5:9, 52:1-2).
곧 주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언제든지 세상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라, 오늘의 상황과 슬픔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다들 이런저런 일로 분주하여 경황이 없는 가운데 이번 일을 이겨낸다. 나 역시 급물살을 타듯 교회 집기들을 처분하고, 새로 이전할 교회 장소는 오늘 계약서를 쓰기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순간 멍하니 시선을 놓칠 때면 어떤 슬픔이 또는 아픔이 명치를 찌르듯 와락, 하고 눈물이 나게 한다. 그럴 때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견딘다. 주께 부르짖지 않으면 패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여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고로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그러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사 7:10-12).” 이를 어찌 읽어야 할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하였을 때,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의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 시킨다.
‘징조’는 한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다. 그것은 때때로 이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사 38:7-8).” 또는 미래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이 가능한 상징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8:3-4).”
하여,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8).” 여기서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였다.
곧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는 일은 그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어떤 노력과 애씀으로 이루어가는 게 신앙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는 궁핍하고 빈궁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우리들 산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시었다. 나의 부친은 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숱한 빚더미에서 주의 사명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내가 저의 사역을 전투적이었다고 회고하는 것은 앞뒤 가릴 게 없는 병사와 같았기 때문이다. 명령에 따라 포화가 빗발치는 들판을 내달려 나가는 주의 군병처럼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달려온 길이 아닌 게 없다.
막냇동생이 열병으로 곧 죽을 지경인데도 기도원 집회 인도를 위해 나의 부모는 그 아이를 기도원 바닥에 눕힌 채 사역을 감당했다. 아직 어린 누이는 두 동생을 건사하느라 늘 엄마를 대신했고, 특히 두 살 터울인 나를 거의 업어서 키우다시피 했다. 그렇듯 사택도 없는 어느 허름한 건물 예배당이나… 모두가 꺼려하는 나환자촌으로나… 맨땅에 처박히듯 인천으로 와서 개척을 할 때도 어린나이에 나는 그때마다 그 일을 덩달아 겪었던 게 지금에는 복인 것인 것을 안다. 결국 7년 넘게 교회 건축으로 진 빚으로 허덕이다 빈손으로 다시 교회를 이뤄 매형이 이를 감당하였다. 부친은 쫓겨나듯 하곤 느닷없이 미국 LA 교회 초빙으로 3년 여 나가셨을 때, 하나님은 나를 고꾸라뜨려 기어이 신대원을 하고 목사가 되게 하셨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곧 나의 하나님, 나의 믿음은 막연하게 맺어진 관계나 추상적인 의미의 신앙이 아니다.
나의 부친은 마치 생의 최전방에서 맨몸으로 맞서 주의 길을 헤쳐 나갔고, 이를 어린 우리 형제들은 덩달아서 견뎌내야 했다. 그 결과 우린 모두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목회의 길을 따르게 되었고, 앞서 밝힌 것 같이 그 시절 같이 했던 교회 학생들이 하나둘 어엿하게 자기 앞길에서 주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모든 게 실제의 것이라, 당시 교육 전도사로 갓 신학생이었던 이가 이번 부친의 장례 예배에서 어엿하게 한 노회의 노회장을 역임하고, 시찰회 목사님들과 함께 수십 명이 와서 장례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자리에 마침 이번에 우리 딸아이의 사돈 될 내외가 함께 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저들은 감격하여 마치 어디 부흥회에 와 있는 것 같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이 일 후에 우리 자녀들은 저들 앞으로 일일이 전화를 드리고 작은 과일 상자를 하나씩 보내며 감사를 표했다. 장례 절차에서 뿐 아니라 이후에도 나타나는 일들 가운데서 우린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곧 주가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는 사실을 우린 이를 알리시는 일에 일원인 것이다. 살면서 살아서 주를 알릴 뿐 아니라 죽어서 그의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하심은 삶으로는 물론 죽음으로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여기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하심 같이 주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 백성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된다. 이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 7:13-14).” 하여서 오늘도 주 앞에서 되뇌어 말씀으로 선다.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16).” 하는 본문의 교훈으로 나를 견책하여,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2).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를 인정함이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3-4).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고,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고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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