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호 8:7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 147:6, 20
어디에서 누구와 같이 거하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게 달린 문제다. 오늘 1절,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하시는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은 나팔을 입에 대라는 명령은 파수꾼이 적군의 침공을 목도하고 경고의 나팔을 부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곧 임하게 될 북이스라엘의 붕괴는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오면서이다. 그렇듯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를 보고도 문제의식이 없다면 나팔을 입에 대고 있는 의미가 없다.
저들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을 덮친다. 여호와의 집이란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성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북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부여받은 삶으로 저들의 축복된 삶이 수치와 조롱이 아니라 찬송과 영광의 삶이 돼야 할 터, 이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범죄 하였고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저들의 부패한 삶과 우상숭배의 날들로 더럽혀졌다. 이에 대하여,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신 말씀과는 이미 너무 멀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것은 그들만큼 주의 은혜를 입고 살았던 민족이 없는데 이를 당연하게 여겨서인지, 주변의 죄악으로 물들어서 당혹스럽다. 아무리 죄악 된 삶을 살고 있다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세우셨고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시기를 어떻게 행하셨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보듯 그들은 약속의 땅에 거하며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 여겼을까? 주변의 이방 민족들로 저들은 물들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이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두고 저는 의인이나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베드로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6-8).” 이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 거하던 롯이 저들 성이 멸망하기까지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둘려져 살았다. 결국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한다.
저는 멸망 직전에 천사들의 강권하심으로 멸망의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두 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나 듣고 따르지 않았고, 롯의 처 역시 기껏 소돔을 벗어났으나 뒤를 돌아보다 그 영혼이 떠났다. 하여 예수님은 이를 엄히 보시고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셨는데 이는 엄중한 경고다. 스스로 다 이루었다, 구원 받았다,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엄히 경고하시는 것이다. 곧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그 심령이 상함으로 죄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 같이 어울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간다. 이는 심판과 파멸에 대한 경고를 선언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누구와 어울리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삶을 점검할 수 있는 열쇠다. 우리가 행한 바 그 삶을 따라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다. 죄는 그러한 하나님을 애써 외면하게 한다. 세상을 더 바라게 한다. 어울리는 관계에 더 집중하게 한다. 이번에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부친이 걸어온 길을 문상 온 이들의 면면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목사님들이었고, 후배들과 그 제자 되는 목사님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적으로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목회에서 그 긴 여정을 돌아보며 회고하였다. 그날도 같이 낚시를 가셨던 목사님은 총신 때 동기 목사로 서로가 그 시절 개척교회를 하면서 삼삼오오 함께 모여 서로들 돌아가며 성경공부를 하였고, 그때마다 작은 사경회가 이어지고는 했다.
곧 우리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리는가? 하는 문제는 그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오늘의 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람들의 멸망은 주변국들과 같이 어울려 따르던 문화나 우상숭배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하다못해 아이들도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는가를 보면 그의 성품이나 성향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주를 경외하며 사는가? 하는 문제는 평소 어떤 일을,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하고 사느냐?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이 단지 환경의 요인이 크다고 할 수 없지만 그만큼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 아래 살았다는 것을, 현실적인 삶과 신앙이 동떨어진 게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곧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9-10).” 하시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신앙은 현실과 이상이 다를 수 없다. 곧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19:8).”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신앙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겔 36:17).”
하심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나의 삶에서 나로 무엇에 정신 팔려 살고 있는지,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나팔을 입에 물고도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는 데도 불지 않는다면 이는 설마, 하고 안이한 것이거나, 모르는 것이거나,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선을 버렸기 때문에 원수가 그를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호 8:3).” 이는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나의 하나님으로 그 삶에 주인 되게 하시는 것은 다른 일이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 하면서도 세상과 어울려 아무렇지 않을 때, 즉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그러므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심도 그 때문이다. 오늘 날에도 그렇지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요즘처럼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적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 하신 이 말씀이 크게 두려움으로 다가와야 옳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에 오늘 말씀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곧 일련의 일을 겪고, 나아가 교회를 이전하는 데 있어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다만 주를 인정함으로 따를 뿐이다. 앞으로의 일을 두고 걱정이 앞서지만 이 또한 주께 맡김으로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 10:14).” 더러 세상을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럴 때면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고,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결국,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합 2:18).”
스스로 어찌하여 주어진 상황을 모면하려 드는 것이 그러하다. 사람들의 이목과 저들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여 오늘도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하시는 데서 주의하고 또한 경각심을 갖는다. 이는 경계의 몫으로 전쟁의 신호를 알리는 일이다. 세상은 ‘독수리처럼’ 날아든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하심 같이 우리 삶에 나팔을 입에 물고 언제든지 이를 알려야 한다. 이를 위해 오늘의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일 테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하심을 다시 한 번 명심하게 한다.
이는,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어제는 새로 이전하게 될 교회를 계약하였고 이달 말에 잔금을 치르면서 다시 주어진 환경에서 남은 생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당장에 감당해야 할 몫의 임대료나 관리비 등 여러 시설과 이용이 걱정부터 앞서지만 그 또한 주가 책임지실 것을 잘 안다.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를 의뢰한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아나이다.” 하고 오늘 말씀으로 나의 걱정을 다스린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호 8:2).” 이는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을 아나이다.’ 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부르짖는 것은 진실 된 회개의 마음에서, 의뢰와 신뢰를 가지고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그리 돼야 할 것이다.
이에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하시는 말씀으로 오늘의 명령으로 삼아 다시 한 번 허락하시는 교회와 사람들로 주 앞에 세워지기를. 하여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2).” 하심으로만 주 앞에 바로 세워지기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시 147:1).
부친을 주 앞에 보내드리고, 남은 우리들은 동시에 맡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로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앞서 걸어가신 이의 발자취를 따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2-3).
이에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6-7).
겸손은 곧 감사와 찬송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1).
주의 기쁨이 되어,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8).
하실 때에,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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