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하현. 2026. 4. 11. 05:49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욜 1:3-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시 4:3-4

 

 

브두엘의 아들 요엘 선지자는 유다의 죄로 인해, 유다에 임했거나 임하게 될 심판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이 심판은 매우 큰 심판으로서 지나간 역사에 있어 살아 있는 자의 기억으로나 과거 어느 심판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심판이라 이른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2).” 요엘이란 이름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 즉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는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로 소개된다. 호세아, 미가, 스바냐 등 동일한 형태로 그들의 부친이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뜻한다. 요엘은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이라’ 하는 데서 이 말씀의 기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명확히 한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이에,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하고 먼저 고한다. ‘늙은 자들’에 해당하는 뜻은 ‘장로들’이다. 14절에서 금식일이나 성회 등 공식석상에서 장로 직분을 일컬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이어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는데,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는 것은 ‘들을지어다.’ 하는 것과 같이 강조된다. 이는 명령이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신 32:1).”

 

곧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하시는 주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오래 전 일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에게 호소한다.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거민도 그와 같은 일을 기억할 수 있다면 증언하도록 요청한다. 어느 누구라도 열조가 터득한 일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욥 8:8).”

 

곧 죄에 있어서 선조를 능가하는 자들은 선조들이 받은 심판보다 더 크고 쓰라린 심판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마땅하다. 이 심판은 장차 올 시대에도 결코 잊히지 않을 심판이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3).” 하는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도 전가되어 오늘에도 이르렀다. 곧 우리가 믿는 자로 살면서 지켜야 할 가장 초보적이고 단순한 사명이다. 이를 자녀에게도 제대로 고하지 못하고, 자녀에게도 알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어쩌면 ‘유약한 어른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겠으나 이를 운운하다 어른 부재의 시대가 되고 만 것은 아닐까? 뭐라 꾸짖고 야단치고 징계하는 일이 더는 이 시대의 부모에게 용인되지 않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알다시피 동생은 선교지에서 한 아이의 터무니없는 고소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촉법소년법에 저촉되었다. 그에 따른 결과로 저쪽에 합의금 수천만 원을 주어야 했고 재판은 다 알면서도 교육 몇 시간, 집행유해로 치러져 이번 주에는 교육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이 부모들이었다. 그 가운데 자기 자식이나 자식의 친구에 의한 고소당해서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서로가 돌아가며 그간의 일을 발표하기도 한 모양인데, 특히 자기 자식에게 고소를 당한 부모는 그 자체로 부끄러움이 배가 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하긴 요즘은 지나가는 아이를 보며 함부로 말을 걸거나 뭐라 어떤 식으로든 내색을 해선 안 된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고 이를 빌미삼아 문제를 걸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루는 아내와 산책을 하다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보고 뭐라 제지하려고 하는데 아내가 슬그머니 나를 끌면서 말렸다. 자칫 그야말로 고소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길을 가다 귀여운 아이를 봐도 함부로 시선을 주거나 말을 걸면 안 된다고 했다. 이러니 이게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의 세태를 반영하듯, 전하여 그들로 경고를 받고 ‘너희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우도록’ 하라고 한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먼저 경고를 하라는 것으로, 남들보다 자기 자녀에게 말씀을 고하고, 그 자녀는 또 후대의 자녀에게 고할 것을 명령한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이러한 믿음의 계대가 이어지게 할 것을 엄히 명한다. 그러니 신앙을 가진 부모가 이를 강요할 수 없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큰 경고가 될까?

 

이를 모르면 재앙은 더욱 큰 재앙이 되어 심판에 이를 것을 강조한다. 곧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4).” 하는 표현에서 이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전개는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 느치, 황충이’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메뚜기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곧 메뚜기가 급습하여 갉아먹는 모습을 가리키며, 아예 끝장을 낸다는 의미를 더욱 점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동일한 메뚜기를 언급하는 것은 ‘메뚜기의 재앙’으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매우 시적이며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는 장차 시행될 심판이 그만큼 철저할 것을 알게 한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렘 15:3-4).” 하시는 기법과 같다. 또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4:21).” 하심 같이 장차 임할 심판은 점점 더 두렵고 가차 없을 것을 강조한다.

 

이 일의 심각성을 알면 자녀를 교훈하기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게 한다. 앞서 우리 어른 세대가 겪은 가난이나 핍절한 삶을 오늘의 자녀들이 모른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가난은 보편적이어서 헌옷을 꿰매 입거나 남의 옷을 돌려 입고, 물려 입는 것은 예사였다. 손발에 트고 피부는 거칠어서 갈라지는 것도, 버짐이 돋고 진흙탕이 묻은 채로도 잘만 돌아다녔다. 그러나 나보다 앞선 세대들은 전쟁을 겪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숱하게 겪으며 살았다. 그럼에도 오늘 날 어른들은 ‘나 때는 말이야!’ 하고 훈계를 하면 고약한 꼰대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요엘 선지자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문서 선지자 중에 최초의 선지자로 알려진다. 요엘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를 남유다의 왕위에서 몰아내고, 남유다 8대 왕인 요아스가 남유다를 통치하던 때이다. 요엘은 주전 835-796년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종교,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대였다. 북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남유다 역시 요아스의 선왕들인 아하시아와 아달랴가 자신들의 정치적 추종 세력과 함께 북왕국 아합 왕가와 손잡고 범국가적으로 바알을 숭배하던 때이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가의 지배력을 물리치고 남유다의 여호야다 왕은 생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요아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여호와께 대한 순수한 열정을 상실하고, 정치적, 종교적 저항 세력에 부딪혀 종교 개혁은 흐지부지 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를 서로가 묵인함으로 동조하게 되어 국가적으로도 거룩하고 고귀한 기풍은 사라지고 개인적인 자기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때 그들을 치라고 보냄을 받은 동물이 ‘메뚜기와 황충과 팥중이와 느치다(4). 이렇듯 전무후무한 메뚜기 대재앙이 남유다 온 땅을 휩쓸고 지나고,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백성들이 피폐하여 그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백성들 일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고 절망하였고, 반대로 또 한편으로는 자연재해일 뿐이라 여겨 안일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보내시며 이 메뚜기 재앙은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선민 모두에게 보이시는 초자연적인 징조임을 알리었다. 장차올 ‘여호와의 날’을 예시하며, 메뚜기 재앙이 예시하는 ‘여호와의 날’은 온 하늘과 땅이 울리고 대격변이 일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이 ‘여호와의 날’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로는 당대의 역사적 실제 곧 메뚜기 대재앙을 계기로 ‘복수하시는 날’로서 여호와의 날과 ‘세상 끝 날의 단회적인 종말론’으로 여호와의 날을 동시에 묵상해야 한다.

 

곧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말세의 때는 이어지고 있다. ‘여호와의 날’은 어느 특정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시는 모든 날들로 오늘 우리가 겪는 날이다. 이렇듯 포괄적으로 지칭되는 날들에 대하여,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총체적인 난국이 아닐 수 없다.

 

저마다 안이하게 생각하기 십상인 날들에 그 어느 때보다 이단이 득세하고 사람들은 미신적인 것에 홀려 ‘문화’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덩달아 이를 수용하고 있다. 동시에 신앙과 종교 또한 각자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하고, 언제든지 그만두거나 새로운 것을 택할 자유가 보장된다. 이러하여 본문의 이 한 구절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3).” 곧 우리를 심판의 날을 경고하고 가르쳐야 한다.

 

예전에 알던 친구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신앙도 그러했듯이 자녀들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 성숙한 가족관계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각각 다른 종교를 선택하거나 한 쪽이 안 믿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때가 되면 믿겠거니 하면서도 심지어는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더는 강요하거나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오늘 여기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해 역동적으로 펼치시는 구원과 그에 따른 심판의 징계가 우리 삶에도 큰 두려움으로 다가와야 한다.

 

요엘은 본문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그와 같은 면면을 예언한다. 주로 바벨론 등 이방 제국에 의한 선민 국가가 멸망당하는 날로 전개된다. 특히 요엘 시대 사람들에게 종말의 때와 다름없이 여겨졌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신약 시대는 세상 끝 날의 최후 심판의 날까지를 모두 함축한다. 오늘도 그 날의 한 가운데 속한다. 그러므로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5).” 하고 당시에 안일하게 구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를 일깨운다. 가장 크게 번영을 누렸고 극도로 사치하던 시기에 저들이 그랬던 것 같이 우리도 다를 게 없다. 이에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6).”

 

장차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유린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선언한다. 여기서 특별히 ‘내 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보이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2:18, 3:2).” 이처럼 비록 영적으로 암울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선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8, 11).”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13).”

 

그리하여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4).” 돌이킬 것을 촉구한다. 회개를 강조한다. 요엘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19-20).”

 

오늘도 이와 같이 피조물들이 먼저 갈구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20).” 이와 같이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하물며 사람만 더욱 더 멀어져가는 것 같다.

 

이에,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시 104:21-23).

 

다들 그저 사느라 급급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온전히 그 믿음을 지키는 일은 왠지 사치스러운 것 같다. 친구 중 누구는 예상치 못한 퇴직에 갈 바를 잃고 한숨을 길게 내쉰다. 누군 또 낮부터 술자리에 가 있다면서 사업상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다들 그러고 사는’ 것에 비통함인지 핑계인지, 저의 푸념이 안이하게 들릴 뿐이다. 어디서부터 그리 된 것인지, 서로의 관심이 다르고 시선도 다르다보니 대화는 한정되고 그저 구하고 바라는 게 세상뿐이다. 그런 가운데 내가 가진 묵상의 깊이나 감동을 나누려고 하면 이와 같은 말씀이 저들에게는 생경한 소리일 뿐이다. 한가하게 들리는지 듣다말고 다른 화제로 전환한다. 하여 나는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한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4:1).

 

주 앞에 엎드리며 오늘도 구하기를,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2-3).

 

주 앞에 바르게 아뢸 때,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오늘도 시편을 기도로 하여 구한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