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욜 2:12-14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5:11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요즘은 걸어서 교회로 온다. 내 걸음으로 20분 정도 걸리는데, 아직은 새벽 공기가 차다. 오늘은 문득 어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새벽예배에 나가던 길이 생각났다. 아마도 세례식을 앞두고 있던 부활주일이었을까? 당시는 시골이랄 수 있는 교회 예배당은 사택에서 나와 오른 쪽 언덕을 끼고 오르는 길이었다. 그런 날은 종지기 집사님 대신 내가 예배당 마당의 종을 울리고는 했다. 이렇듯 요즘은 여러 기억이 다양한 감정을 이끌면서 밀물과 썰물처럼 들었다 났다 한다. 감정의 골은 깊기도 하고 넓기도 해서 아주 깊은 곳까지 가 닿을 때면 저절로 눈물이 맺히고는 한다.
예배당에 들어오기기 전에 포도주스 작은 것을 하나 샀다. 예배처소를 이전하고 첫 예배이기도 하고 지난주일 부활절에 드리지 못했던 성찬식을 거행할 생각이다. 아버지 없이 드리는 성찬식으로는 처음이다.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집례하고 나는 보조하였었다. 그런저런 감정은 다양한 기억을 이끌면서 마음 골 깊은 곳까지 쓸려왔다가 밀려나간다. 어릴 적에 걸어서 새벽예배에 나가던 길과 다른 것은 어둠과 그 고요함이 서로 다르다. 우리는 이처럼 기억을 더듬으며 묵상의 징검다리를 건넌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2).”
하는 오늘 말씀이 어려서도 몇 번 들었고 그 기억은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메뚜기 대재앙’이 제시되고 돌이켜 회개를 촉구하던 말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종말론적으로 ‘여호와의 날’이 도래할 것을 증거하며, 그 날에 있을 무서운 심판과 징벌을 예언하던 말씀(1:1-2:17)에서, 오늘은 본격적으로 여호와의 날이 도래할 것과 그 날에 이루어질 무서운 심판과 함께 그럼에도 돌이켜 주 앞에 설 때 그게 “누구든지”,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고 이르신다.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고 우리에게 소망을 더하신다.
좀 더 강하고 공포스럽게 전달되던 심판의 경고가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순식간에 반전을 더한다. 먼저 ‘두려운 여호와의 날의 도래가 임박하였음’을 알렸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1).” 그런 뒤의 내용은 무섭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2-3).”
이에 따른 모두의 두려움은 죽음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였고, 그 일이 주의 은혜로 그처럼 간단하게 일어났다는 데서 놀랐다. 처음에는 허망하였다가 이제는 감사하는 것은 죽음을 주의 나라로 들어가신 아버지의 경우도 순간이었고, 이를 곁에서 직면하였던 가족들도 순간이었다. 다들 나름의 여러 감정을 겪으며 그리워하겠으나 공통적으로 우리는 모두 감사한다. 60년을 넘게 같이 지냈던 어머니조차 덤덤하니 잘 견디며 이겨내는 것으로 서로가 놀란다. 순간 울컥, 하다가도 감사가 나온다. 거기에 또 다들 살아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 주일을 앞두고는 감정이 오르내릴 겨를이 없다.
우리에게 심판의 경고는 동시에 주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평안을 동시에 바라게도 한다. 비록 살아서 느끼는 두려움의 양상은 좀 더 생생하게 다루어져 ‘산 위에 진용을 펼친 대군의 위용’과 같고(4-6), 성을 뛰어넘고 성을 장악하는 군사와 같이 두렵게 느껴지지만(7-9) ‘여호와의 날’에 임할 두려운 상황은 그저 대참사의 끔찍한 현실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에 오늘은 심판의 두려운 경고에서 소망을 가진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어쩌면 우린 주 앞에서 이 일이 가장 익숙하지 않았나? 가령 나는 개인적으로 나의 부친에게 매를 자주 맞았다. 그만큼 말도 안 듣고 말썽도 잦았다. 더하여 나의 유약함이 행여 밖에서 흠이 될까 하여 부친은 더욱 엄하고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럴 때면 한참 매를 때리고는 훈계와 함께 꼭 그 끝은 기도로 끝맺음을 하였다. 내가 심하게 잘못했을 때, 가령 누구에게 아주 못되게 굴어 해를 끼쳤거나 심히 버릇없었을 때, 그 중에 가장 큰 사건이랄 수 있는 것은 치밀하게 계산하여 6개월 동안 수면제를 모으고 자살을 하려다 걸렸을 때가 아닐까 싶은데?
부친은 나를 때리고 혼내면서 울었고, 나 역시 맞고 울고 하였는데 끝내면서 그 날은 나더러 먼저 기도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당연히 우리의 기도는 용서를 구하며 잘못을 고하는 게 아니겠나? 그때 처음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울던 아버지와 옆에서 훌쩍거리며 서러워하던 어머니의 기도까지… 나는 진심을 다해 잘못을 고했고 용서를 구했다. 내가 너무 했다. 잘못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지으셨다면, 이걸 못 견뎌한다면서 스스로 죽으려고 한 것은 엄연히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어린 게 뭘 안다고 그 정도는 염치가 없었고, 나는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무리 기도로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는데 나는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처럼 포효하듯 울부짖으며 용서를 빌면서도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없었다.
그 뒤 나는 종종 죽고 싶다는 충동은 몇 번 있었으나 이를 준비하거나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나는 이 이야기를 단호하게 전하였고, 자살은 가장 큰 죄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때 5학년으로 여학생들 반을 맡았었는데, 그 아이가 자라 아이 셋의 엄마가 되어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수면제를 삼켰다가 그때 그 말씀이 생각나서 억지로 손을 넣고 다 토해내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서 간신히 살아났다는 고백을 들은 적도 있다. 가끔씩 돌아보면 나의 기억이나 경험이 남다른 게 많아 은혜롭다.
하여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하시며 이어지는 말씀으로 나의 체험에 감격하고 감사하곤 한다. 이는 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하는 주의 은총을 증명한다. 그렇듯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심으로 누구라도 어떤 경우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신다(욜 2:12-14).
이를 예수님의 사랑의 충만함으로 진술하여 바울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곧 우리가 죄가 아무리 깊고 넓고 끔찍하게 길고 높다 해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 주의 사랑이다.
이를 요엘은 증명하길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18).” 하심으로 단정한다. 곧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28-30).” 하실 때 우리 주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무궁하심을 알겠다.
하여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1-32).”
곧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라고 하심은 ‘여호와의 날’이란 용어는 심판과 관계가 있는데, 이날이 이스라엘과 유다뿐 아니라 바벨론, 애굽, 에돔 등 모든 이방의 민족들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사 13:6).” 곧 이러한 경고를 듣고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은 돌이켜 그 온 집이 구원을 받았고, 모압 여인 룻도 역시 이 놀라운 비밀을 알고 시어미 나오미의 하나님과 민족을 자신의 하나님과 민족으로 받은 것이다.
곧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렘 46:10).” 하심 같이 우리 산 자에게 모두는 죽음이란 두려운 일일 것이나 동시에 소망의 출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지껏 나는 네 번을 죽음을 간접적으로 겪었는데, 먼저는 조부모의 죽음으로 조부의 것은 그저 생경하고 시원섭섭한 정도였고, 조모의 죽음은 신기하며 평온하여 당시 직전에 부모님이 곁을 같이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부친은 꿈을 꾼 듯 ‘어머니 천국 가신다!’ 하고 소리치며 깼고, 그 곁에 누웠던 모친은 인자한 눈길로 한 번 웃음 짓고 고요히 잠든 시어머니를 회상했다. 부친 한 사람으로 우리 일가는 모두 예수를 영접하였던 터라 같이 곁을 지켰던 삼촌 둘도 이를 목격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친구 동생의 50일 간의 병상에서 같이 나누었던 묵상과 어쩌다 나 같은 자가 예배를 인도하고 임종을 맞인지 이는 기적이며 은총이고 축복이었다. 몇 번씩 고백한 적 있지만 그때 나는 두 번의 목사 고시 낙방(각각 논술과 심리검사에서)으로 더는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다시 또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겨를도 없이 50일 간 함께 아침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말씀을 나누었고, 임종의 순간에도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저의 영혼이 주 앞에 가 닿은 영광의 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이번에 부친의 사망도 그와 같이 놀라운 경험으로, 슬프나 동시에 더 큰 감격이 있다.
이처럼 ‘심판의 시기’는 즉각적이고도 현재적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하심을 목도하고 체험하였다. 이는 다시 미래적인 의미도 가진다.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0:3).” 우리는 누구도 언제 어찌될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도 ‘크고 두려운’ 일이나 결론은 하나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 간단하고 매우 단순한 일일 것이나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못하는 사람은 못하고 거부한다.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이를 바울은 예정과 택정하심으로 규정하여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럴 수 있는 자가 주의 자녀이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것을 말하는데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그럴 수 있는 자는 제한적이다. 그리하여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결국은 그럴 수 없는 자들도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오히려 의아하다.
하여,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2).”
하는 오늘 말씀을 다시금 되새기며,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1-3).
할 때에,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5,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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