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현. 2026. 4. 14. 06:06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암 1:1-2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0-11

 

 

유다 왕 웃시야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에 지진이 있었는데, 그전 이 년에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것 같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 1:1).” 호세아는 온몸으로 주의 뜻을 받들어 살았다면 아모스는 열방의 죄를 담당하고 살았다.

 

당시에는 여로보암 2세가 남방 유다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이처럼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지진이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스가랴에 의해 다시 언급된 것을 보면,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슥 14:4-5).” 상당히 큰 지진이었던 것 같다.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했을 때 문둥병이 발하였던 시기로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대하 26:16, 19).” 이 지진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그런 가운데 드고아의 목자 중 아모스가 부르심을 받았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다. 넓은 들판이 있었고(대하 20:20, 렘 6:1), 목양에 좋은 곳이었다. 이에 목자는 비교적 좋은 양을 키우고 있어 당시 모압 왕 메사에게 공급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저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로 받은 말씀이다. ‘받은 말씀’이라함은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잠 30:1).” 하는 것과 같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 1:1).” 또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렘 1:1).” 하는 것과 같이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아모스는 당시 부패했던 선지자들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참신한 인상을 줄 수 있었으나 선지자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할 때, ‘부르짖는’에 해당하는 뜻은 ‘사자의 부르짖음’에 주로 사용된 단어와 같다. 이런 표현은 요엘의 표현과 동일한데,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욜 3:16).” 한 것 같이, 사자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강한 우뢰소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욥 37:4).”

 

여기서 ‘음성을 발하시리니’에 해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인한 권능을 표현한다. 사실 하나님의 힘 있는 말씀은 어떠한 자연 현상보다 웅장하고 강력하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하시며 먼저는 다메섹을 지목하신다. 다메섹은 아람(수리아)의 수도로 그 국가 전체를 대표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사 7:8).” 마치 국가의 이름처럼 사용되기도 하여, 아람, 수리아, 다메섹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은 동과 서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일찍부터 교역의 중심지였다.

 

아합이 통치하던 시대부터 주전 8세기까지 이스라엘과 다메섹 간에 적대감이 분출되었다. 특히 예후가 통치하던 9세기 후반에는 수리아가 이스라엘의 영토를 침입하여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하되 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왕하 10:32-33).”

 

이에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하시며 당시에 많이 사용되던 수적인 격언으로 그렇듯 죄가 일상적인 곳에 대해 언급한다. 아모스는 이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6, 11, 13).”

 

곧 그만큼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이 저지른 여러 죄악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3).” 길르앗은 우거진 수목이 있었고(렘 22:6-7), 향료로 유명했다(8:22). 이 지역은 풍요로우며 변경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많이 받았다. 특히 여호아하스 때에 수리아가 침공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마치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만들어버렸다.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3:7).”

 

이를 보면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보응하신다. 가령 어제 오전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선교지에서의 ‘아이 일’로 지난 한 주간 강제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러한 판결과 합의금으로 수천만 원을 마련해서 줘야 했던 일은 심적으로 큰 부담이었고 억울하였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아파트 난간을 내려다보며 몹쓸 생각도 여러 번 했던 모양이었다. 전 주에 부친을 떠나보내고 그 다음 주에 이어 이 교육을 갔어야 하니까,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그냥 가지 말까도 숱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럼 실형을 살아야 한다는 엄포에 참고 갔던 것이다. 동생은 앞으로 3년 간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일체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 이 잘난 촉법소년법이란 게 그런 모양이다.

 

하긴 본인도 더는 징글징글할 정도여서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강제교육을 받는데 앞서도 어디에 언급했던 것처럼 대부분이 부모들이었고, 자기 자식에게 신고당해서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모들도 수두룩했던 모양이다. 강사로 온 서울대 아무개 교수는 자신도 이 법의 맹점을 잘 알지만 그러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면서 하다못해 자식이라 해도 무조건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하며 지내라고 하더란다. 그런 점에서 강사도 이 교육의 한계나 비현실적인 문제를 알고, 문제는 부모들의 무너진 심정과 자식에 대한 한계인데 이를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늘 교육 끝에는 허무함이 든다는 심정을 토로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동생과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이 여러 번 있었고, 자신은 사실 실질적인 경험이 없어 이론적으로나 아이들과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뿐 그 다음을 어찌해야 하는지… 도움을 구하듯 같이 협력하여 일을 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아이들을 상대할 수 없지만 근본 문제는 부모들이었고, 허물어진 가정과 가장과 그 부모의 심정을 어찌 영적으로 접근하여 치유할 수 있을까? 하는 게 교수의 관심이었고 동생에게 먼저 제안을 하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교육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동생은 죽기보다 싫었고, 사모는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여 눈물부터 흘린다는데…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려나 싶은 것이, 이제 외면하고 살 거였는데 아이들의 문제의 주된 원인이랄 수 있는 상처 받은 부모들의 심령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신 것이다.

 

동생은 새롭게 가족과 부모와 자녀의 상담심리를 공부하게 되었고, 그렇게 인연이 된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를 물으며 권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또는 울컥, 하는 심정으로 설명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역발상에 놀라웠다. 거의 20여 년을 청소년 사역으로 중점을 두고 심적으로든지 물리적으로든지 병든 영혼을 치유하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던 것이 그렇듯 길이 막히고 새로운 사역으로 전환하시려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듯 자식에 의해 고소당하고 법적으로나 심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울분만 토로하는 상처 입은 부모들을 돌아보게 하신 것은 놀라운 발상이었다. 동생도 그 강사의 제안을 받고 아직 기도 중이기는 하나 의욕을 잃고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던 엘리야처럼 시무룩하였는데….

 

오늘 본문에서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심에 주목한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자 같은 목자 아모스를 선지자로 불러 세우시고 말씀을 받들게 하실 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 하고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시는 것 같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그러니 이 일이 누가 시켜서 될 일이겠나? 동생 처는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개인방송으로 친정 동생 사업으로 물건을 판매하는데 소위 말해서 대박이 났다. 하루 천만 원 가까이 매상이 오르고, 물론 원가에 직원 월급에 창고 대여료에 드는 부대비용을 떼면, 그래도 적당히 먹고 살 길이 열려서 얼른 합의금으로 빚진 것을 갚고 적당히 돈을 모으며 살면 전혀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듯한데 왜 또 굳이 ‘남의 일’에 끼어들듯 그런 가정이 그런 것이야 애가 그 모양이든지 그 부모들이 어떤 문제이든지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사느라 그저 사는 일이 전부인 생이라면 오늘의 이 주변국들이 어떠하든지, 그러든가 말든가 그게 다 어떻다고 관여할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1).” 이 말씀 때문이다. 형은 어때? 하고 묻는데, 나야 늘 내가 할 수 있는 한 영혼의 문제라 어디 교육을 다니고 전문적으로 기관에 들어가거나 운영하며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라, 뭐라 할 수 없으나… 이 일은 엄연히 감정소모가 크다. 한 영혼이든지 열 명의 영혼이든지 같을 것이고, 단지 상담의 역할처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혼의 문제라, 나도 울고, 나는 같이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딱히 도움이 될 말은 주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우리의 목적은 그리하여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으로 주를 만나게 하는 것일 테니…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잃으면 사회의 여느 기관이나 복지와 다를 게 없거나 더 못한 처지에 불과하다.

 

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즉 사람들이 교회나 목사라 하면 부정적이라 저들과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이를 감추고 한다는 것인데, 나는 오히려 그 뒤에 숨어서 방어를 한다. 나는 목사고 여기는 교회다. 단지 가정의 문제나 자신 또는 아이의 심적 문제가 이유라면 굳이 내가 아니라 정신과든지 어디 유명한 기관을 찾으면 될 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우리의 목적은 하나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8).”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이런저런 각오와 생각을 듣고 응원하여 기도하면서도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곧 저 가정의 회복도 중요하고 아이의 상한 영혼이나 부모의 것으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일 테니, 나는 동생의 새로운 역발상의 사역에 공감하고 응원한다. 오늘 본문에서 ‘가사의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하심과 같이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거민과 아스글론에서 홀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하심과 같이 악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단호하신 뜻을 살핀다. 그렇듯 ‘두로의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에돔의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암몬 자손의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 모든 이유가 주의 백성과 그 나라를 괴롭힘이라.

 

악이란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섬기지 않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렘 40:3).”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시 7:1-2).

 

나로서는 주에게로 피하는 법을, 주를 의뢰함으로 모든 짐을 내려놓는 것으로,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0-11).

 

주께 맡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2,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