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수필] 양버즘나무

전봉석 2006. 8. 1. 18:16

 

 

 

양버즘나무





  양버즘나무 아래에서 단아한 교복차림의 소녀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정류장 팻말은 넙데데한 나무 이파리에 가려져 한껏 고개를 비틀어야 글자가 보인다. 소녀는 나무 그늘에서 한 발쯤 비켜서서 부러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소녀의 얼굴 위로는 눈이 부시도록 고운 가을볕이 촘촘하니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빼앗긴 시선과는 무관하게도 공책 한 권을 들고 오후 내내 생각이 많다. 물끄러미 창밖의 소녀를 내다보며, 그렇듯 우연히 발견한 공책을 어쩌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떨어내다 더는 없어도 좋을 책들을 정리하였다. 철 지난 잡지나 파지뭉치 따위를 따로 묶어, 나는 종이 줍는 노인에게 내어줄 참이다. 얼마 전 그 노인은 낡은 위인전집 한 질을 나에게 주워다 주었다. <글방>으로 오는 아이들에게 읽히면 좋을 것 같다면서, 노인은 짙게 주름 잡힌 손으로 책 뭉치를 건넸었다. 아브람링컨이 들려있던 손에는 간디가 들려지고, 나이팅게일이었다가 파브르가 되면서, 노인의 손바닥 골 깊은 주름마다 위인들 못지않은 지긋함이 자글자글 배여 있었다. 


  딱히 책장을 정리하게 된 것이 노인 때문은 아니다. 아이들의 책이 늘어나면서 무조건 아무 책이나 가져다 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자면 내 책들을 우선 따로 분류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 세계 단편집들이나 수필, 시집 들은 중학생 이상 된 아이들이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청소년 시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선뜻 빌려주기가 꺼려지는 것들도 없지 않았다.


  이참에 잘됐다 싶어 한몫에 책장을 둘러엎은 것인데, 우연히 발견하게 된 오래 전의 공책은 나로 하여금 또 한 차례 지긋함을 강요하였다. 이는 매우 낯설고 멋쩍은 기쁨이다. 내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감히 ‘화양연화’를 떠올리기까지 하면서. 비좁은 <글방>이 한 뼘쯤 넓어진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하물며 뜻하지도 않은 공책 한 권이 마음을 노곤하게 적실 줄이야…….


  종강을 얼마 앞두고 있던 어느 해 가을 날, 댕기머리 소녀는 그렇게 비망록을 건네었었다. 서로에게 돌려가며 무어라 이별의 아쉬움을 적어달라던 것이었는데, 어쩌자고 이 공책을 여태 내가 갖고 있던 것일까? 졸업과 함께 두어 차례는 자취방을 옮겼고, 결혼 후에도 예닐곱 번은 족히 이사를 하였을 텐데, 그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공책이 새삼 예고도 없이 툭하니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자못 생소하고 짜릿한 느낌이 아닐 수 없다. 삐뚤빼뚤 제멋대로 씌어져 있는 글자들이 제풀에 겨워 정겹기도 하고, 적혀져 있는 이름들을 소리 내어 불러보면 마치 저마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여 지레 가슴만 설레면서.


  오전 내내 배시시 혼자 웃던 나는 문득 이 공책의 주인이었을 댕기머리소녀를 떠올린다. 또래 누구나 그 시절에는 풋풋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는데…. 분명 공책 어딘가에 그녀의 이름이 한 줄쯤 적혀있을 줄 알았지만, 여남은 명의 이름과 글 가운데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짚어낼 수 없었다. 수줍음 많은 얼굴로 공책을 건네던 장면은 어렴풋이 기억하면서, 선뜻 이름을 떠올릴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하면 그녀 또한 이 공책을 잃고 얼마나 허망했을까. 이미 지나간 시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이제나마 나는 공책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장난스럽게 써 갈긴 글들마다 사뭇 이별의 아쉬움을 저음으로 낮게 읊조리고 있는 공책을 펼쳐보며, 아무리 궁리를 해도 맞춤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연락이 닿는 친구에게라도 새삼 전화를 넣어볼 수 있을 텐데, 공책에 적혀 있는 이름들마다 마치 별개의 사람인양 우리는 서로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다. 저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괜한 그리움은 두방망이질하듯 마음만 보챌 줄 알지, 뾰족한 수는 내놓지 못하고 뭉그적댔다. 그나마 연락이 닿는 두어 명의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말했을 때,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괜스레 안달이라며 타박이나 들었다.


  아무래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작정을 하고 수소문하면 못 찾을 리도 없을 일을, 애꿎은 공책만 툭툭 쳐가며 시간을 버는 걸 보면. 그러는 동안 양버즘나무 아래에 서있던 소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볼품없는 등껍질에 필사적으로 햇볕을 쬐는 양버즘나무만 길게 그림자를 끈다. 우리네 삶의 가장 최전방에까지 내려와 서있는 양버즘나무. 한껏 잎사귀를 펼치고 사력을 다해 햇볕을 쬐는 양버즘나무의 모습을 보다 또한 문득 지긋함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화양연화’를 연상하는 이 못난 사람을 두고 양버즘나무는 버스가 내뿜고 간 시커먼 매연도 달게 삼킨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어서 아름다운 이유를 일깨우기나 하려는 것인지 노인의 주름 잡힌 손과 어쩜 저리도 닮아있을까. 꺼칠한 등껍질은 한껏 가을볕을 받아 투명하였다. 깊은 산속에 있는 나무들 못지않게 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서있는 플라타너스, 양버즘나무는 우리네 삶의 최전방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그저 지긋하니 오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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