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수필] 숨은 공주의 구애

전봉석 2006. 8. 1. 18:28

 

 

숨은 공주의 구애求愛





  착하다는 말, 선하다는 말, 예의바르고 경우가 있다는 말. 어쩌면 이날 이때껏 내가 악착같이 들으려 해왔던 말들이다. 나는 분쟁을 싫어하고 다툼을 멀리한다. 지고 말지, 나서서 이기려들지 않는다. 때론 억울해도 내 몫의 분냄으로 족해한다. 그래왔다. 그게 옳은 것이라 여겨왔고, 이와 같은 무의식은 고스란히 성격으로 고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적이 없다.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더러 선한 인상으로 남기도 한다.


  이러한 고착된 성격은 마음에 이어 몸을 지배하고 있다. 내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할 상황에서는 목소리가 먼저 떨리고 지레 말더듬이가 된다. 긴장을 하면 똥이 마렵고 불편한 자리에선 식은땀이 흐른다. 마음의 상태가 몸의 증세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이어 편한 사람이 불편하게 여겨지고 가까웠던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하였다. 굳이 나서서 먼저 챙기고 돌보던 사람에 대해서도 부러 외면하게 되었고, 그러한 관계를 애써 회복하려 들지 않는다. 


  이를 나는 내 안의 숨은 ‘공주’ 때문이라 여긴다.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그것이다. 남성 속의 여성성과 여성 속의 남성성의 하나로, 내 안에 숨어있는 공주는 나를 번번이 흩트려 놓는다. 겉으로 보이는 '예의범절'이 숨은 공주의 배면이었던 셈이다. 융은 이를 두고 ‘페르조나’라 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이 그것의 반대 면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끼리 단짝을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라 했다. 즉 서로는 상호 대립하고 보완하는 관계인 것이다.


  어설프게도 나는 이런 내가 싫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책들을 골라보게 되었고, 오늘에 고착된 나의 ‘착하다’를 깨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김현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면서 왜 자꾸 울컥거리게 되는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사람마다 성격의 발달과 심리구조는 달리한다. 이를 아홉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해놓은 책이 『에니어그램(Anneagram)』이다. 나는 천주교 재단에서 이 교재를 갖고 하는 토론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보았다. 물론 자기 고백적 토론 위주의 수업방식에 견디지 못해 초반에 그만두었지만….

   

  “세상에 치이다 보니, 이젠 말 못하는 물고기한테 화풀이군.” 전에 언제 낚시터를 따라왔던 친구가, 물고기를 잡았다 도로 놓아주는 나를 두고 했던 말이다. 그때는 그저 씩, 웃어넘긴 소리였는데 두고두고 그 말은 나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점점 더 낚시에 빠져드는가 싶기도 한 것이…… 착하다는 것이 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운전 중에 있을 법한 가벼운 다툼에서도 나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하물며 나름의 이유와 사정을 들어, 되도 않는 논리를 펴는 사람 앞에서는 기꺼이 승복하는 것으로 나는 물러선다. 잘잘못은 차치하고, 따져 물은들 나는 그를 이겨낼 자신이 없다. 또한 그런 자의 용기가 부럽다.


  언젠가 문구점에서 복사를 할 때의 일이다. 꽉 찬 둘레가 잘릴 거 같아서 미리 당부를 하였는데도 주인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예닐곱 장의 파지를 내었다. 그제서 다시 정렬을 하고 복사를 끝낸 여자는 내게 파지까지 건네며 복사 값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어줍게 파지 값은 빼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한데 주인여자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갖고 빡빡하게 군다며 도리어 타박이었다. 결국 돈은 다 물고, 그 일은 상처로 남았다.


  이러한 경우는 나의 생활에 비일비재하다. 난폭운전을 하던 시내버스 운전수가 막무가내로 끼어들고는 도리어 창을 열고 내게 욕지기를 할 때, 슬그머니 내 창을 닫는 것으로 나는 자리를 피한다… 기껏 택시를 잡아탄 이유가 좀 더 편하게 가까운 거리에서 내릴 요량이었지만, 돌려서 나오기 힘들다며 골목길 입구에서 내려줄 때 아무 말도 못하고 택시에서 내린다… 그랬으면 그냥 넘어갈 일이지, 왜 이런 일은 상처로 남아 쿡쿡 쑤셔대는 것일까. 숨은 공주의 구애가 지겹다.  


  그러나, 그래도 공평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작정 주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내 쪽에서 받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한테는 괜한 관심과 배려가 절로 넘쳐서 때론 주기만 하는 것 같아 억울한데, 나에게도 또한 누군가는 그러하다. 내가 나서서 먼저 해주는 것도 없는데 늘 나에게 먼저 주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이 만났다가 헤어졌는데도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고, 또 누구는 무심한 나를 먼저 마다하지 않고 챙겨만 주는 사람도 있다. 보니 그러하다.


  내 쪽에서 주기만 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데, 내 쪽에서 받기만 하는 사람도 있듯이…… ‘나’ 안에는 ‘나’ 외에도 ‘너’와 ‘우리’가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숨은 공주는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구애를 한다. 고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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