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귀 맞은 영혼
말할 수 없어 감출 수도 없는 그런 통증이 있긴 하다. 슬픔이란 지극히 개별적인 것이고 누구의 것과 견주어 물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만한 일 갖고 뭘 그래, 라고 하면 괜히 싱거워지는 슬픔도 있기 마련인 것처럼. (그래서 글을 쓸 수 없었다, 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쓸거리가 없어서가 아닌 쓸 수 없어서, 말할 게 없어서가 아닌 말할 수 없어서. 다분히 말장난 같은 이러한 통증을 더러는 우울증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는가본데….) 그럴만한 이유나 단서도 없이 배부른 소리만 같은, 그런 이유 없음에게 보기 좋게 따귀를 맞아본 사람은 안다. 불쑥 자신 안에 이는 통증이 얼마나 주체할 수 없는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할머니의 죽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나는 의연했고 태연했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쯤이야 남들 다 고만고만할 터, 새삼 이 나이에 그이에 대해 말하며 감정이입을 꾀하고 싶지는 않다. 한데 몇 주가 흐르고 몇 날이 더해지면서 나는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낚시터로 전전긍긍하였고, 기껏 찾아 나선 저수지나 수로 앞에서 멍하니 몸을 뒤채다 먼 산만 바라보고 돌아오곤 하였다. 이처럼 배회 아닌 배회도 늘면서, 밤새 뒤척이다 이른 새벽 뜬눈으로 집을 나서 무작정 내달리곤 하였던, 물가. 그 어디쯤에 낚싯대를 던져놓고 또 멍하니 앉아 시름에 잠기기도 하였다. 막상 그러다 예상치도 못한 눈물을 맞닥뜨린 것은 참으로 난감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절간 아래 아주 조용한 저수지에서였다. 퍽, 눈물이 솟구쳐 주체할 수 없는데, 아른거리는 수면을 마주하고 어? 내가 울고 있잖아, 하듯 어색하기만 하던 눈물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넌 사람이 왜 그리도 매정하니. 누이는 나를 두고 말했다. 영정사진 앞에서 한 번쯤 눈시울을 붉힐 만도 한데, 마지못해 끌려온 남의 집 문상객처럼 굴던 나에게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며 키웠는데… 하는 핀잔 아닌 핀잔을 누이한테 들을 때도 몰랐다.
난데없이, 은은하게 퍼지던 목탁소리에 퍽, 쏟아지던 눈물은 가뜩이나 묽게 이겨 논 떡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래서 떡밥그릇을 슬쩍 한쪽으로 밀어두며, 내가 울고 있었구나, 하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정직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분히 감정을 이입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나는 그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그이는 늙었고 적당한 나이에 죽었다. 다시 말해,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핑계로 나의 통증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노모(老母)는 어린 나를 앞세워 종종 절간에 들곤 하였다. 생후 육 개월에 앓은 열병 때문인지 나는 유난히 잔병치레가 심했던가 보다. 첩실 들여 쫓아낸 서방을 지척에 두고 평생을 외롭게 보낸 노모는 유독 나를 대할 때면 눈물부터 찍어내곤 하였다. 노모와의 절간 생활은 언제나 아련하다. 죽을 때까지 꼿꼿했던 노모의 등에 업혀 하루 반나절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던 건 장손이라는 감투 때문이기 보다 당신의 외로움이 주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에 이름을 두고 노모만은 항상 나의 어릴 적 애칭으로 나를 부르길 좋아했고, 희끗희끗하니 내 머리에도 서릿발이 내릴 나이인데도 때마다 마주하면 어이구, 이노무 자식, 하며 얼굴부터 쓰다듬곤 하였다.
이게 다다. 딱히 할머니에 대한 별 다른 기억이 애틋하게 남아 있는 것 같진 않다. 그이가 내게 준 마음보다 내가 그이에게 둔 마음이 인색해서인지, 달리 뚜렷한 어떤 사건도 없다. 무슨 말만 나오면 젊을 적 시집살이에 푸념을 실타래 엮듯 하는 어머니의 넋두리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노모와 함께 보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러고 보면 슬픔에 대해서도 다소 분석적인 접근을 시도하곤 하는 것 같다. 왜 슬프지? 굳이 슬플 이유가 없잖아! 하면서, 스스로에게 야박하게 구는 것도 어쩌면 그 몫을 노모가 먼저 짊어져 준 까닭인지도 모른다.
(속으로만 감기는 말은 난감하다. 토해내고 싶은데, 목에 걸린 사과조각은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다. 그 상태로 목을 조이듯 숨통을 막는, 말하기나 글쓰기는 그래서 나에겐 상담치료를 받는 여느 우울증환자의 독백과도 같다.) 굳이 써지지 않는 글을 억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이라면 애써 내 안에 적당히 머물다가 분해되고 소화되어 내장을 지나 똥으로나 버려졌으면 좋겠다. 겅중겅중 수업이 없는 날이면 더욱 멍하니, 그러면서 말이 하고 싶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울의 늪을 건너는 법, 루비레드, 따귀 맞은 영혼, 심리상자 열기 들을 이참에 읽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자가진단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우울증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성피로를 생의 몫으로 지불하면서까지 도대체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저마다 제 몫의 값을 지불하느라 서로를 거둘 겨를이 없다. 이런 와중에 오늘의 나의 통증이 무슨 대수겠는가 마는, 연거푸 따귀를 때리는 것도 남이 아닌 나인 바에 어디다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야멸치게 호통이나 치고 갈 일이지, 매번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의 죽음 또한 없는 듯 있는, 있는 듯 없는, 목에 걸린 사과조각이 되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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