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에 대한 담론
가슴 어디 한 구석에 소녀가 있다. 여전히 생으로 삭히지 못한 소녀가 있다. 버찌 생각이 절로 간절한 날, 나는 어김없이 소녀를 더듬는다. 아픈 배를 쓸어안는다. 언제고 소녀를 삭히는 날, 비로소 나의 우울한 영혼은 하늘을 날 수 있으리.
똥에 대한 나의 담론은 아버지의 신념信念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해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간 곳은 음성나환자촌이었다. 왜 하필 그런 데로 이사를 했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다. 아버지는 늘 그러했다. 이는 가난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사는 사람의 특권과도 같았다. 신념이란, 한 달에 서너 차례를 이사하면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법이다. 하면, 바로 직전에 살던 곳은 옥탑 방 가건물이었다.
옥상 위에 베니어판으로 얼키설키 만든 집에는, 변소가 따로 없었다. 2층에 달랑 교회를 세 얻고 아버지는 사택을 부릴 형편이 못되었다. 이도 주인이 선처를 하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을 횡재였다. 한데 늘 똥이 문제였다. 오줌이 아닌 똥은 어쩔 도리 없이 단박에 달음박질을 채근하였다. 마침맞게 초등학교 하나가 골목길 끝에 담벼락을 나란히 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번번이 주인집 대문을 두드리기보다 골목길을 달려가는 편이 나았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어디서 커다란 함지박을 하나 주워오셨다. 그 위에 널판을 두 장 얹었고, 명색이 그것은 우리 가족의 변소였다.
때는 매서운 초겨울날씨가 살얼음으로 똥을 얼린 날이었다. 차면 비워내야 하는 이치는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동일한 몫이었나 보다. 그나마 길 건너 남의 집 텃밭에 거름으로나 쓰이곤 하였는지, 아버지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어머니와 함께 똥통을 비워내야 했다. 그날은 앞서 내려가던 어머니가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있었다. 계단은 삽시간에 똥으로 범벅이 되었고 어머니는 몸 져 앓아누울 새도 없이 몇날며칠 계단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사를 하였다.
정착촌이란 격리된 땅을 일컫는 말이었다. 나는 격리됨을 소중히 여긴다. 그 안에는 오롯이 내 것이 있다. 남고 모자람이 없이, 나는 처음으로 소녀를 사랑했다. 눈에 번쩍, 콩깍지가 씌운다는 것, 그러한 사랑의 시발에 대해 나는 가감하지 않는다.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포만감은 뒤집힘에서 비롯된 말과도 같다. 과식으로 인한 배탈이 이에 준한다. 나는 이보다 더 광분하여 사랑에 대해 말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는 생짜다. 날것이다. 날것은 비리다. 소녀에 대한 나의 추억은 언제나 날것이고 비리다. 소화될 수 없는 것의 비애는 생 똥으로 배설되는 이치와 같다(그래서 나는 또 소녀에 대해 썼다. 그리고 또, 지웠다.).
어쩔 수 없이 비워내야 하는 것에 대해여 나는 기꺼이 동정을 보낸다. 전날 삼킨 것이 날것으로 나올 때의 아찔함이란,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만큼이나 거북하고 슬픈 일이다. 생으로 버려지는 것의 순수함이여, 삭히지 못한 내 몸의 책임이 크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달릴 때 물씬 풍기는 똥냄새는 그래서 구수하다. 덜 삭아 코를 찌르는 물똥냄새는 그래서 위협적이다. 똥은 똥인데 어느 것은 구수하고 어느 것은 역하다. 찔끔찔끔 물똥을 싸고 나면 애써 비워냈는데도 개운하지가 않다.
똥의 담론은 이렇게 소녀에게서 귀결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소녀’ 누기를 시도한다. 이것은 고착되어 오늘의 나를 격리하고 있다. (고 한다면)너무 엄살로 비춰지겠지만 나는, 사랑을 하면 똥이 마렵다. 사람들 앞에 서야할 때면 똥이 마렵고 낯선 자리에 가면 똥이 마렵다. 꼭 어딜 가서는 먼저 변소를 확인해야 하고 언제든 달음박질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 아는 사람은 나를 두고 병적이라고 했다. 실제 상담치료와 함께 약물복용을 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사양한다. 똥은 내게 정직한 척도와도 같다.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끔 하는, 정착촌으로의 격리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똥이다. 나는 다만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아가 속이 안 좋냐? 옜다, 이거 한 주먹 꾹꾹 씹어 삼켜라. 그럼 씻은 듯이 낫는다.”
한나절 똥도 못 싸고 쩔쩔매고 있을 때면 조모祖母께서는 내 어린 손에 버찌 한 주먹을 쥐어주셨다. 그것을 받아먹은 날이면 거짓말처럼 물똥을 지리고 속이 편했다. 비록 덜 삭은 똥이라도 비워내면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생 똥이든 잘 삭은 똥이든 싸서 비워내고 살 수 있다면,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버찌 생각이 절로 간절한 날, 그래서 나는 소녀에 대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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