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밭
▣
트럭은 멈추고도 한참을 툴툴거리다 예고도 없이 툭, 하고 멎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소년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귀에 익은 소리를 좇느라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어서 오세요, 얘 집에 뛰어가 전도사님 도착했다 해라. 왁자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소년은 저도 모르게 길게 날숨을 내찼다. 금세 오줌보가 터질 것만 같았다.
포장이 펄쩍, 걷히면서 따가운 햇볕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이고, 여기 타고 오셨어요? 누군가 엄마에게서 젖먹이동생을 받아 안았다. 뭐해, 얼른 일어서지 않고? 햇빛을 등지고 아버지가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 소년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번쩍 들어 안았다. 아버지의 몸에서 싫지 않은 땀 냄새가 났다. 바닥에 내려선 소년은 땅바닥만 툭툭, 걷어차며 고개를 숙였다. 다 해져 실밥이 터진 운동화 끝에서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인사드려야지, 뭐하고 있니? 언제 내렸는지, 엄마가 곁에 서며 말했다. 그래도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둘러선 사람들의 신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끝이 벌어진 고무신과 꺾어 신은 운동화 그리고 버캐 핀 검정 장화와 슬리퍼…… 가지각색의 신발이 보기 좋게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낡은 구두에도 허옇게 버짐이 돋아 있었다.
소년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게걸음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알록달록한 엄마의 월남치마가 힘없는 부챗살처럼 펄쩍 펼쳐졌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치마를 말아 쥔 소년의 손을 탁, 쳐냈다. 그리고 황급히 늘어난 치마를 끌어당겼다.
트럭운전사가 포장을 걷어내자 둘러섰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리로 몰려갔다. 그제야 빨간 벽돌의 야트막한 예배당이 한 뼘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다시 엄마의 치맛자락을 말아 쥐며 애원하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얘가, 진짜! 하지만 엄마는 쯧, 소리를 내며 도드라진 하얀 이로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엄마의 입술은 소태처럼 갈라져 있었다.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예배당 첨탑계단에 앉아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 머리 위로는 커다란 무쇠종이 걸려있었고, 길게 늘어진 종 불알이 저대로 툭, 하고 떨어질 것만 같아 소년은 더욱 오줌이 마려웠다.
그 사이 텃밭을 가로질러 예배당 옆에 딸린 조그마한 집으로 엄마는 사라졌다. 싸리나무가지가 삐딱하게 경계를 이루며 텃밭을 에우고 있는 집이었다. 일개미들처럼 한 보퉁이씩 손에 들거나 어깨에 메고, 사람들은 일렬로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왔다. 트럭은 금세 반이나 비워졌다.
예배당 마당에는 소년의 그림자만 붙박여 있었다.
소년은 언덕 아래로 눈길을 주었다. 저 아래 수수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수리마다 하얀 깃털을 꽂고 있는 것이 평창 할아버지네 것과 많이 닮아보였다. 그 주위로 듬성듬성 집들이 외따로웠다. 집근처마다 까만 천으로 감아놓은 듯 한 양계장에서는 뭉근한 구린내가 풍겨났다. 그 뒤를 아카시아 꽃무리가 병풍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더 멀리 성냥 곽처럼 네모난 것이 학교인 모양이었다. 축축 늘어진 미루나무가 운동장을 한데 감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카시아 꽃무리가 느닷없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하얀 꽃잎을 사방으로 흩뜨리며,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진저리 치듯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는 것이었다. 또한 튀어 오른 아카시아꽃잎보다 더욱 요란하게 머리채를 흔들며 미루나무는 채신머리없게도 늘어뜨린 가지를 훠이훠이 휘저어댔다. 그것은 서서히 마을 안쪽으로 넓게 펼쳐진 수수밭으로 옮겨오는가 싶더니, 하얀 깃털을 좌우로 흔들며 수숫대는 일제히 가락에 맞춰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지휘봉을 닮은 까만 기차가 사라지기까지, 온 마을은 일제히 흥에 겨운 놀이에 전념을 하는 것 같았다. 마을 뒤편 산중턱으로 기차가 사라지자 아카시아나무와 미루나무는 금세 시치미를 떼듯 먼 산만 쳐다보았다.
입을 헤벌리고 바라보던 소년은 입 안 가득 단침이 고였다. 아, 이제 좀 살 것만 같았다. 종아리가 서늘해지면서 딛고 선 땅이 동그맣게 원을 그리며 번져나갔다. 저도 모르게 소년은 뒤늦은 진저리를 쳤다. 첨탑계단에 앉아있던 아이들도 다 지나서야 깔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
집을 나서다말고 소년은 텃밭 고랑에 버려둔 낡은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학교까지는 널따란 사탕수수밭을 지나쳐야 했다. 소년은 수수밭 안쪽에다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던지고 낡고 해진 운동화를 갈아 신었다. 그제야 발이 편하고 걸음이 가벼웠다.
이장 집 마당을 비껴 돌면 탱자나무 울타리를 끼고 개울물이 흘렀다. 그 물은 탱자나무 때문인지, 시큼하니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도랑을 건너면 두 개의 임자 없는 무덤이 봉긋봉긋 평지에 솟아있었다. 아이들은 거기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하였다.
마을중앙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널빤지로 주둥이를 막아둔 것이었다. 소년은 매번 그 널빤지를 밀치고 한참씩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야아- 하고 소리 지르면 끝 모를 어둠 저 밑에서도 야아- 하고 누군가 대답을 해주었다. 야아- 하고 부른 뒤 얼른 뒤로 물러서는 것은 아직도 검은 얼굴이 쓱, 올라올 것만 같아서였다. 학교까지는 거기서부터 온 만큼을 더 걸어가야 했다.
미적미적 늦장을 부리기는 매일 마찬가지였다. 종소리가 울리는데도 소년은 느릿느릿 교문으로 들어섰다. 교문 오른편으로는 가축 사육장이 있었다. 닭, 오리, 토끼, 염소, 그리고… 키 작은 낙타가 한 마리 있었다. 낙타는 왜 저 혼자 여기서 저러고 있는 걸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순간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오신 줄 알았는지 뒤미처 오줌싸개 왔네, 하며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 아침마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오줌싸개와 미친 영자!
짝꿍인 영자의 몸에서는 늘 비린내가 났다. 언제나 누런 콧물을 질질 달고 있었고,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놀려도 그저 헤헤, 웃기만 하는 아이였다. 소년은 자리에 앉자마자 연필을 꺼내 선을 그었다. 책상 위에는 이미 홈이 패진 선이 그어져있었다. 서울촌놈에 오줌싸개가 하필이면 미친 영자의 짝꿍이었다.
우리 모두 혼(混)분식을 해야 하는 거 알지요? 쌀밥만 먹으면 살이 푹푹 들어가서 안 나올 수도 있어요! 점심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아이들의 도시락을 검사했다. 너, 너, 그리고 너… 짤막한 막대기로 도시락 뚜껑을 탕탕 치며 보리쌀을 섞지 않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탕, 하는 소리에 소년도 일어섰다. 번번이 청소당번을 하는데도 엄마는 보리쌀이 없다며 며칠 더 참으라고만 했다.
교실은 그릇 부딪치는 소리로 왁자그르르해졌다. 영자의 묵은 김치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도시락 뚜껑이 금을 넘어왔는데도 영자는 쩝쩝거리며 밥을 먹었다. 소년은 연필을 꺼내 영자의 어깨를 쿡, 찔렀다. 영자는 움찔 놀라기만 할 뿐 또, 또 헤- 하고 웃기만 했다. 그런 영자가 날이 갈수록 더욱 얄미웠다. 소년은 도시락뚜껑을 도로 가져갈 때까지 영자의 어깨를 쿡쿡, 찔러댔다.
▣
예배당 애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걸 봐요, 이걸!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텃밭을 내다보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다 저녁에 미친 영자가 웬일일까? 제 엄마 손에 이끌려 해죽거리고 서있는 영자의 폼이 유난히도 우습고 볼썽사나웠다.
똑바로 서있어 이년아! 영자엄마는 아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욕을 해댔다. 그래도 길게 빼물고 있던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영자는 그저 헤- 웃기만 했다. 들춰 업은 젖먹이동생을 치올리며 엄마는 연신 영자엄마를 향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무슨 일이야? 하필 이럴 때 아버지가 돌아오시다니. 소년은 얼른 문을 닫고 개다리소반에 가 앉았다. 전염병이 돈다며 아랫마을 닭장에 기도해주러 가셨는데…. 얼마나 찔렀으면 애 어깨가 이게 뭐예요? 네? 영자엄마는 아버지를 보자 더욱 크게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낮은 음성이 끊겼다 이어졌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실랑이가 벌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당장 회초리 해 와! 당신은 푸줏간에라도 들렸다가 얼른 뒤좇아 가보고! 아버지는 양복저고리를 방바닥에 휙,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소년은 비실비실 텃밭으로 나갔다. 싸리나무 울타리에서 네댓 가지 손에 잡히는 대로 쑥쑥, 뽑아들면서도 소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애 어깨가 그게 뭐야? 응? 아버지는 회초리를 받아들기 무섭게 소년의 종아리를 치기 시작했다. 휙휙, 휘는 소리는 찰싹, 종아리를 감을 때보다 더욱 아팠다. 아버지의 이마에는 금세 구슬땀이 맺혔다. 소년은 눈물을 훔치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가뜩이나 힘든데 왜 너까지 말썽이냐며 아버지는 회초리를 치셨다.
무릎을 꿇자 살갗이 허벅지에 닿아 더욱 쓰리고 아렸다. 엉덩이를 비틀어 바람을 통하게 좀 했으면 좋겠는데, 소년은 아버지가 말하는 동안 자꾸 몸을 뒤채었다. 야단을 치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풀풀, 단내가 풍겼다.
방안에는 부러진 싸리나무가지들이 흉측스럽게 널려졌다. 눈물이 마른 얼굴은 뻣뻣하게 땅겼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누차 받고, 아버지는 예배당으로 건너가셨다. 쓸어 담듯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고 소년은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사위는 까맸다. 텃밭에는 먼저 자란 대파가 하얀 털북숭이를 드러내며 땅거미에 젖어 있었다. 소년은 부러진 회초리를 울타리 밖으로 휙, 집어던졌다. 고추는 더 있어야 커질 모양이었다. 깻잎은 어느새 젖먹이동생 손바닥만 했다. 빨랫줄에는 아직 걷지 않은 아버지의 하얀 와이셔츠가 양팔을 휘저으며 거무튀튀한 하늘을 어림재기하고 있었다. 받히고 선 장대가 힘겹게 쓰레해보였다. 자꾸 눈물이 나서, 소년은 펌프 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다 늦게 돌아온 엄마도 저녁상을 봐주고 예배당으로 건너가셨다. 김치찌개에는 모처럼 돼지고기가 숭덩숭덩 들어있었다. 젖먹이동생은 포대기에 싸여 아랫목에 잠들어 있었다. 쟤보다 더 어린 동생이 생길지도 모른다. 문 밖에서 엿듣는데, 아버지는 그때도 엄마만 타박이었다. 소년은 국물만 떠다 밥을 비볐다. 고기살점은 이따 엄마나 좀 드시게 밀어두었다. 밥을 다 먹고 젖먹이동생 곁에 가 누우려니까, 서울 이모네 집에 맡겨진 누나와 동생이 보고 싶었다.
▣
재 너머로 멱 감으러 간다던 아이들을 뒤밟아갔다. 부지런히 따라잡았는데도, 둑길에 줄지어 자란 질경이풀 위에서 아이들의 속옷만 너풀너풀 아는 체를 해주었다. 오줌싸개에 서울촌놈이 하필이면 예배당집 전도사아들인데, 알고 봤더니 못돼 처먹은 애였단다. 영자 일이 어떻게 부풀려졌는지 마을이고 학교에서는 소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소년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다 당산나무 뒤쪽에 있는 험상궂은 목각인형 앞으로 갔다. 언제나 눈매가 매섭고 섬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눈길을 피하지만 않는다면, 슬그머니 정겹게 웃어주는 당산할아버지였다. 그러다 수수밭에 가면, 수숫대 사이로 해 어름 마주한 그늘은 신작로처럼 뻗어있었다. 숨겨둔 고무신을 돌돌 말아 트럭운전사가 되고, 번번이 팔딱 뒤집어져 대형 사고를 내지만 소년은 지칠 줄도 모르고 운전을 했다.
소년은 벌렁 드러누워 수숫대 허리를 앙 물고 온몸으로 단맛이 돌 동안 쭉쭉, 빨아마셨다. 쉴 새 없이 파란하늘에 붓질을 해대는 사탕수수는 화가 같았다. 하늘에 그려놓는 여러 마리의 동물 중에서 언제나 키 작은 낙타가 제일로 느림보였다. 그러다 멀찍이서 기차가 달려오면 소년은 야아- 소리치며 뜀박질을 하였다.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날이면 마을 앞 두 번째 전봇대까지는 따라잡을 수 있었다.
▣
마지막 수업시간에 영자가 또 금을 넘었다. 소년은 이제 더 모른 체 참견도 안했다. 알기나 하는지, 영자는 바보처럼 연필로 쿡, 찌를 줄 알고 지레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또 저 혼자 금을 넘었다. 소년은 칠판만 보고 있었다. 이번엔 연필이 데구루루 굴러와 소년의 팔꿈치를 툭, 치고 멎었다. 눈을 흘기다 소년은 금 밖으로 슬쩍 연필을 밀어주었다. 또 데구루루, 데구루루 연필이 굴러왔다. 소년도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치워내도, 치워내도 자꾸만 얼굴을 간질이는 수수이파리 같았다.
팔꿈치에 와 닿는 것을 기다렸다가 툭, 쳐내니까 굴러오던 연필이 이번에는 기겁을 하고 데구루루 굴러 교실바닥에 탁, 떨어졌다. 소년은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쭉, 잡아당겼다 놓으면 푸드득, 놀래자빠지던 수수이파리만 같았다. 진저리 치며 멀찍이 달아나다 하늘가에 도로 깨알 같이 모여 날던 하루살이들만 화들짝 놀라게 하던 사탕수수밭….
갑자기 입을 삐쭉거리더니 영자가 찔끔찔끔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돌아보자 뒤에 있던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러바쳤다. 굴러 떨어진 연필이 하필이면 마룻바닥 틈새로 빠진 것이었다. 아이들의 참견에 영자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넌, 왜 그렇게 못됐니? 이따 남아서 연필 꺼내주고 가! 선생님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렸다.
수업이 끝나고 소년은 마루 틈새를 살펴보았다. 삼십 센티 자를 디밀자 연필은 꼭 손톱만큼씩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소년은 잠시 두리번거리다 창틀가로 다가가 보았다. 차라리 마룻바닥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화단을 경계로 스케치북만 한 구멍들이 교실마다 일정하게 뚫려있었다. 견고하게 가로막힌 철창은 막상 손을 대자 맥없이 툭, 밀려났다. 마룻바닥 밑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몸을 반쯤 디밀던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어둠 속의 가는 빛줄기가 더 안쪽에서부터 책받침처럼 얇게 펄럭였다. 크게 숨 호흡을 하고, 소년은 손을 뻗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무언가 손끝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누나 거랑 똑같은 컴퍼스였다. 지우개도 있었다. 삼각자, 연필, 칼, 각도기… 없는 게 없었다. 앞으로 조금씩 기어가면서 소년은 손에 닿는 것마다 모조리 움켜쥐었다. 마루 틈새로 드는 빛줄기가 너울너울 들까불며 자꾸 재채기를 냈다. 소년은 급한 대로 윗옷을 벌려 쥔 것을 쑤셔 넣었다. 영자의 연필은 이제 될 것도 아니었다.
누가 노려보고 있는 걸까? 두 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 반짝이는 눈들이 늘어가는 것 같았다. 소년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무서운 건 처음이라서 그래, 당산할아버지가 그랬다. 까만 우물 속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은 원래 무서운 거야! 소년은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쿵쾅, 쿵쾅! 마룻바닥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려보고 있던 눈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야아, 야아-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둠 속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 팔을 최대한 벌리고 그래, 두 번째 전봇대까지만 달리는 거야! 야아, 야아…!
▣
이제 정신이 드니? 낙타처럼 순하고 봉긋 솟은 무덤에서, 너 참 대단하구나! 너처럼 용감한 아이는 처음이야! 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에요? 물으려는데 콜록콜록 먼지가 날렸다. 고운 모래언덕 위에 키 작은 낙타가 서있었다.
깨어났어요?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눈을 슴벅거렸다. 아이고, 이 녀석 진짜!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담임선생님이 서있었다. 옜다, 이거! 선생님은 검정비닐봉지를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비닐봉지 속에는 들쭉날쭉한 연필과 지우개, 컴퍼스, 구슬 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괜찮으면 얼른 일어나! 밖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선생님은 소년을 번쩍 안아 침대에서 내려주었다. 선생님의 와이셔츠에는 흙물이 번져있었다.
복도에는 청소당번이었던 아이들과 함께 헤- 하고 영자가 웃고 있었다. 소년은 비실비실 아이들 앞으로 다가갔다. 여며 쥔 비닐봉지를 열어 가장 길고 고무가 달린 노란연필을 영자에게 주었다. 곁에 섰던 아이들이 고개를 빼고 비닐봉지를 들여다보았다. 각도기, 연필, 지우개… 소년은 아이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창문 밖 저만치에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소년은 아이들과 함께 야아- 하고 소리치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끝)
|
|